“무슨 소리냐? 쟁취하고 극복하기 위한 싸움. 그게 바로 삶의 투쟁인 법이다. 룬,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 거냐!”
페르디키온다운 주장이었다.
룬은 흐린 눈으로 한치의 물러남 없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말했다.
“그거 몰라도 심장은 원래 두근두근 잘 뛰어.”
룬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맞대꾸를 했다.
“이 자식이, 반항기냐.”
페르디키온이 거친 어투로 눈치를 준다 한들 눈 하나 깜짝할 룬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닌데. 형이 다치지 말지 그랬어.”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좀 정도껏 해야지. 비늘 껍질 다 까지고 뭐하냐.’
다시 떠올려 봐도 참 흉한 상처였다.
좀 전의 과격한 전투는 좀 지양했으면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 정도 상처는 어린 네겐 놀랄만한 일이었나보군. 뭐, 조심하도록 하지.”
걱정을 하는 룬이 귀여웠는지 화룡족 소년이 픽 웃었다.
“그거 아니야.”
‘같이 던전 다 돌고, 전투까지 해본 사이에 뭔 소리야.’
룬은 답답했다.
그냥 몸 좀 조심하라는 말을 한 건데, 어린 외모 탓에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젊었을 때부터 몸을 그렇게 막 굴리면 노년에 고생한다는 것도 모르나.’
그렇게 생각한 룬이 항변하려 했으나 작은 웃음소리가 그 기회를 지워냈다.
“쿡쿡…….”
뭐가 좋은지, 아멜리아가 작게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둘은…… 정말 좋은 형제인 것 같아.”
보고 있으면 왠지 즐거웠다.
깜짝 놀랄 일도 있지만, 툭탁 거리는 모습이 참 잘도 어울렸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다투는 것 같아도 묘한 신뢰가 느껴졌다.
‘신기해. 남자애들은 이렇구나.’
입 밖으로 내었다간 룬과 페르디키온이 또 한바탕 서로 신경전을 펼칠까 염려한 아멜리아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기대된다고.
정말 즐겁겠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황금빛 실타래를 한데 모아둔 듯, 아름다운 여성이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연락 한번 안 해서 날 걱정시키고 이 시간에 들어왔다, 이거니?”
팔짱을 끼고 선 크리스티나가 눈앞의 두 해츨링을 내려다보았다.
“뀨우우.”
“캬……우.”
후욱, 하는 한숨이 비늘 위에 뿌려졌다.
“내가 못살아. 룬은 그렇다 치고, 페르디키온. 넌 다 큰 아이가 이런 걸 못 챙기면 어떻게 하니.”
“캬아.”
[죄송합니다.]
말 그대로 가시방석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
룬과 페르디키온은 방으로 귀환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창 밖을 보았다.
그들을 반긴 건 밤하늘 풍경.
경직된 두 해츨링들의 기운을 느낀 크리스티나가 직후에 들이닥쳤다.
호환마마(虎患媽媽)의 공포 따윈 저리 가라 치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골드 드래곤이 둘에게 엄한 목소리로 명령했었다.
“당장 무릎 꿇으렴.”
정말이지 어조가 상냥하다고 공포스럽지 않은 게 아니었다.
냉큼 본체화 하고 무릎 꿇은 둘에게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연락용 수정구도 도통 불통이지. 남들이 얼마나 걱정할 지 생각은 했어야지. 둘 다.”
“뀨우우우.”
[미안해, 크리스티나.]
“캬우우우.”
[잘못했습니다, 크리스티나 님.]
까맣고 빨간 어린 해츨링들이 고개를 연신 꾸벅 거리며 사과했다.
다행히 진심은 통하는 법이랬던가.
크리스티나가 노기를 다스리며 좀 전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멜리아를 보러 간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크리스티나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불과 어둠의 어린 해츨링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꼬옥.
햇살처럼 따뜻한 품으로 두 해츨링을 끌어안았다.
“뀨우욱?!”
[크, 크리스티나?!]
당황한 룬과 마찬가지로 페르디키온도 주둥이를 벌리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캬, 캬우우욱……?”
[저, 저기 크리스티나 님……?]
둘 다 이런 포옹에 전혀 면역이 없는 자들.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몸은 물론이고 꼬리 끝을 움찔할 수 없을 만치 딱딱하게 굳었다.
토닥
토닥
그녀의 상냥한 두 손이 하나씩 해츨링들의 등을 두드렸다.
“얘들아. 너희들끼리 우애를 다지는 건 나도 찬성이야. 다만, 걱정하는 내 마음도 생각해주렴.”
“뀨우…….”
“캬우…….”
벌이라기에는, 너무 상냥했다.
양심에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이는 페르디키온도 마찬가지였는지, 빨간 동공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세상 어떤 석화나 구속 마법을 가져온다 한들, 너그럽게 품어주는 크리스티나의 포옹을 이길 게 없었다.
한참 뒤.
“그러고 보니…… 너희 배고프지는 않니?”
포옹을 푼 크리스티나가 둘을 한 번씩 보며 물어왔다.
“뀨욱.”
[그게 잘 모르겠는데…….]
룬이 대답하긴 했지만 굶주림을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묘한 긴장과 머쓱한 기분 탓에 분위기가 영 어색하기까지.
룬과 눈을 마주친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 혹시 모르니 간단한 걸 준비해 줄게. 마침 오렌지 마들렌을 구워두었단다.”
당연히 먹으리라 여긴 크리스티나가 음료 종류를 물었다.
룬과 페르디키온은 서로를 보다 대답했다.
“뀨뀨뀨.”
[그럼 난 따뜻한 우유.]
“캭. 캬우.”
[저는 핫초코나 레몬에이드 부탁드립니다.]
까만 해츨링과 빨간 해츨링의 전음을 순서대로 들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아보니 바다의 향이 느껴지던데……. 찬 곳을 다녀왔으니, 따뜻한 핫초코를 준비해 줄게. 괜찮겠니?”
페르디키온은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그럼 둘 다 이 방에 함께 있으렴. 오븐에 새로 데워 올 테니까.”
크리스티나가 보기엔 아직 어리기만 한 두 해츨링.
그녀는 둘의 매끈한 머리를 가볍게 문질러주며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문을 연 크리스티나가 돌아보자, 룬이 감사를 건넸다.
“뀨우.”
[응, 고마워 크리스티나.]
“캬우.”
[감사합니다.]
페르디키온의 인사까지 받은 그녀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둘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뀨후우우…….”
“캬후우우…….”
몸을 축 늘어뜨린 둘은 잠시 뒤 서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페르디키온은 인간 모습으로 변신했고, 룬도 황금 팔찌를 사용했다.
“역시 크리스티나 님이 최강자로군.”
먼저 말문을 연건 화룡족 소년이었다.
“그러게.”
순순히 동의한 룬이 말을 이었다.
“설마, 이야기하다 시간이 다 갔을 줄은 몰랐어.”
페르디키온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약해 보인 인어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다니. 나도 놀란 참이다.”
페르디키온이 자신의 과업 목표와 방향성을 이야기 할 때, 아멜리아가 생각보다 맞장구를 잘 쳐 준 게 컸다.
어리든 나이가 들었던.
약하던 강하든.
옳다고 생각하면 떳떳하게 목소리 내도 되는 레어를 만들고 싶다는 말이 아멜리아가 무척 감명 깊어 했던 것이다.
사람이 같은 가치관이 생기면 말 없던 사람도 갑자기 말문이 트이는 법이었다.
‘언젠가 둘이 같은 가치관을 두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사이가 좋아지겠거니, 싶었는데.’
룬은 아련한 시선을 했다.
긴 이야기 중에는 룬을 화제로 삼은 이야기도 있었다.
페르디키온이 어찌나 룬이 가만있지 않고 다니는지 챙겨주기 바쁘다 하면, 아멜리아는 룬은 진짜 바빠 보이긴 했다며 그 말을 거들었다.
‘내가 적절하게 끊어서 망정이지. 하루 종일도 떠들 기세였어.’
그 많은 오해를 하나하나 바로잡기를 택하느니, 무한하게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을 깨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룬과 페르디키온이 가벼운 잡담을 하며 기다리는데, 문 밖에 인기척이 났다.
똑똑
가벼운 노크소리.
이미 소리의 주인공을 짐작한 룬이 응답했다.
“크리스티나?”
문틈으로 스며드는 달달한 초콜릿 향과 파근한 바닐라와 오렌지 향.
향기가 문을 열고 들어오듯, 부드럽게 방 문이 열렸다.
달칵
들어온 크리스티나가 둘을 보더니 가볍게 탄성을 터트렸다.
“어머. 그 사이 인간 형태로 바꿨구나.”
“응. 누가 갑자기 올지도 모르는 거니까.”
이어진 룬의 대답에 크리스티나가 살짝 웃어보였다.
“후훗. 잘 했어.”
크리스티나는 가져온 쟁반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김이 나는 컵 세잔, 그리고 작은 단지 둘.
섬섬옥수 같은 손이 작은 스푼을 들었다.
“자, 꿀도 조금 섞어줄게.”
“응.”
룬이 대답하자 크리스티나가 작은 꿀단지를 열었다.
달그락
스푼을 넣어 푹 퍼 올리자 끈끈하고 진한 꿀빛이 나무 수저 가득 흘러 넘쳤다.
주르륵
달그락
그녀는 귀부인 같은 움직임으로 우유에 달콤함을 섞었다.
‘뭔가, 배가 고프다고 느끼진 않았는데 묘하게 입맛이 도네.’
룬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스푼과 컵이 가볍게 부딪혔다.
탁
룬의 앞에 얌전히 잔이 놓였다.
향이 좋아서 절로 컵에 시선이 갔다.
꿀빛이 우유에 섞이는 잔상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페르디키온이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의자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크리스티나 님.”
룬도 함께 앉으며 감사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