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242)

“맛있겠다. 잘 마실게, 크리스티나.”

살짝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티나를 두고, 둘 다 컵을 잡았다.

호륵.

“!”

따끈한 우유향이 공중에 번졌다.

풍부한 밀크향과 고소한 맛.

그리고 몸을 천천히 도는 기혈 도는 느낌.

마무리로 달콤한 꿀맛.

‘역시라고 해야 하나.’

금빛이 흐르던 꿀과 농후한 우유 맛이 입안을 훑었다.

심지어 몸을 편안히 하기까지.

크리스티나가 만든 허니밀크는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진한 핫초코를 가져간 페르디키온도 몸의 긴장이 풀린 듯 했다.

두 해츨링들이 음료를 반쯤 마셨을 즈음.

자신 몫의 차를 가져와 홀짝이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물의 레어라……. 얼마 전에 갔을 때 많이 정화 된 상태였지.”

고개를 끄덕이며 룬이 말을 받았다.

“응. 아멜리아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눈에 보이더라고.”

이 가벼운 문답으로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잡혔다.

달칵

크리스티나의 찻잔이 컵받침 위에 내려졌다.

애플민트향을 풍기며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물의 레어에는 무슨 일 때문에 가게 된 건지 좀 더 말 해줄 수 있겠니?”

‘올 게 왔군.’

룬은 그렇게 생각하며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렸다.

아마도, 크리스티나 역시 대략적인 큰 흐름은 짐작할 터.

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멜리아가 수면기에서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았어. 마침 볼일이 있어서 바로 가봤고.”

뒤이어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오후에 방에 들렀더니 룬이 방에 없었습니다. 해서 연락 해 보니 아직 그쪽에 있다기에. 혼자 두면 안 되겠다 싶어, 함께 갔습니다.”

후, 하고 한숨을 쉰 페르디키온의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룬, 볼 일이라는 건 뭐였니?”

크리스티나의 푸른 시선이 자연스럽게 룬을 향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여기서 얻은 세계수의 열매를 전해주려던 거였어. 아멜리아의 부모님이 많이 아프셨잖아.”

“그건 기특한 말이로구나.”

부드럽게 풀린 목소리로 크리스티나가 칭찬해왔다.

이런 룬의 마음도 모르고 너무 혼내기부터 한 걸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런…… 룬을 혼낸 게 조금 미안해지는걸.’

크리스티나는 룬이 순수한 마음으로 아멜리아를 걱정했다고 여겼다.

물론 룬의 속마음은 약간 달랐지만.

‘아멜리아는 내 힘이 될 인재니까. 잘 챙겨놔야지.’

물론 이 영악한 속마음까지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룬은 그저 순하게 웃어보였다.

어린 해츨링의 미소에 크리스티나는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연락 없이 간 건 조금 경솔했어. 내 레어도 아니고, 여긴 엘프의 영역이잖니.”

“미안…… 안 그래도 물의 레어에 간다고 쪽지를 남겨두긴 했는데.”

룬의 대답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쪽지?”

부드러운 금발이 달빛을 받아 살짝 흔들리며 열린 입술을 스쳤다.

“그런 건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그 말에 화룡족 소년이 고개를 살짝 더 들어보였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스럭

무의식중에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쪽지가 잔뜩 구겨진 채 페르디키온의 손에 쥐여 나왔다.

“제 불찰입니다. 이걸 두고 갔어야 했는데.”

“줘보렴.”

쪽지를 펴 본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그랬구나. 하지만 연락이 늦으면 이걸 봤다 해도 분명 걱정했을 거란다. 둘 다, 다음부턴 시간이 늦는다면 중간에라도 연락을 해 주렴.”

엄하진 않지만 단호한 목소리.

그 말을 들은 화룡족 소년은 시선을 테이블 바닥에 내렸다.

“죄송합니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 것 또한 잘못.

페르디키온은 순순히 사과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본 룬이 입을 열었다.

“나도 미안해, 크리스티나. 아멜리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다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반성하는 모습 덕분인지, 크리스티나는 잠시 둘을 주시하다 대답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주었다.

“그럼, 안에서는 아멜리아만 만난 거니?”

곱고 하얀 손이 제 몫으로 가져온 허브티를 한 모금 머금었다.

룬이 머쓱하게 말을 받았다.

“응. 원래는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이야기하다보니 형의 과업에 아멜리아가 함께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흐음…….”

크리스티나가 호흡 속에 따끈한 차향을 은은하게 퍼트렸다.

룬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멜리아는 물 속에서만 살아서 다른 세상을 본 경험도, 누군가와 충분히 대화해 본 경험도 적잖아. 그래서…….”

룬은 아멜리아에게 동행을 제안한 일.

그리고 아멜리아가 용기를 내어 부탁한 일.

페르디키온과 함께 아멜리아를 만나 수호를 약속받은 일을 쭉 설명해주었다.

“이 후에는 형이 아멜리아와 이야기를 했고, 과업 수행에 함께 하기로 결정했어.”

“그렇구나. 이야기는 알겠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 나름대로 사정이 이해되었다.

기특한 구석도 존재했다.

크리스티나가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저들끼리 서로를 이끌고, 밀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구나.’

이제껏 교류를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어린 해츨링들이 이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성인이 될 페르디키온이 과업을 수행할 때 함께 하기까지.

‘올망졸망 잘 모여다니는 모양이네.’

셋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좀 전에 속이 탔던 마음이 잊힐 지경이었다.

이 모습이 무척 귀엽고, 또 신선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독립적인 성향이니, 억지로 함께 묶이는 건 독이라 여겼었는데…….’

그녀 세대의 드래곤들은 유난히 합을 맞추기 어려웠다.

같은 전쟁에 임하는 것도 각자 다르게 대응했으니.

어쩌면 드래곤들 역시 일족들끼리만 뭉치지 않았다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전쟁을 하면서도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까.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들에 크리스티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지금은 이런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닌데.’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크리스티나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두 해츨링을 눈에 담았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이 아이들이 그걸 증명해 주리란 예감이 들었다.

한편, 룬은 그녀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고 남몰래 눈을 반짝였다.

‘이거, 잘 하면?’

안 그래도 페르디키온의 과업에 함께 하려면 한번은 말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룬의 외출에 대한 허가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이야.’

슬그머니 타이밍을 재 본 룬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크리스티나. 부탁이 있어.”

차분한 푸른 시선이 룬을 바라보았다.

“무슨 부탁이니, 룬?”

물어보고 있지만, 이미 짐작하고 있는 어투.

룬은 그녀가 예상한 말을 던졌다.

“나도 페르디키온 형의 과업에 함께 할 수 있게 허락해 주면 안 될까?”

룬의 말을 들은 그녀가 고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염려스러운 마음은 불허에 대한 이유를 먼저 떠올렸다.

“룬, 이 대륙에서 오직 인간만이, 어리석은 탐욕으로 드래곤의 뼈와 살. 피와 심장을 탐한단다.”

그뿐이랴.

엘프나 수인 같은 이종족은 물론, 같은 인간조차 노예로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 편으론 성자나 용사.

세상과 대의를 위해 사는 자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간계.

때론 사랑스럽고, 때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혼돈스러운 인간.

어느 순간부터, 드래곤들은 인간으로 변하는 마법을 가장 먼저 배우게 됐다.

큰 이유는 가장 유희 활동.

가장 흔한 외형이기 때문에 어딜 가도 편해서.

그리고 해츨링의 관점에서는, 혹시 모를 보호를 위해서였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허락하기 어려운 일이구나. 룬, 네가 나이에 비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그들을 마주치도록 둘 순 없으니.”

200년도 되지 않은, 어린 해츨링.

비늘은 여전히 덜 여물었고, 갑피는 성체의 그것과 비교하면 말랑거리는 수준이었다.

룬은 내심 아쉬워했다.

예상했던 바지만, 직접 들으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크리스티나가 그렇게 나올 줄은 알았지만.’

이제까지 룬은 크리스티나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른 편이었다.

약간의 꼼수를 부린다거나, 몰래 일을 벌여놓아 크리스티나가 제지하기 힘들게 만들어 원래대로 다니긴 했지만.

‘하지만, 그도 슬슬 마무리 할 때가 됐어.’

룬은 숨을 들이켜고 단숨에 말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티나,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말을 들은 크리스티나의 눈이 깊어졌다.

그녀의 분위기가 바뀐 걸 눈치 챈 페르디키온 역시 긴장된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둠의 인장, 불의 인장, 물과 숲의 인장을 얻고 나니 알겠어. 이 세상은 정말 넓고, 다양한 것들이 존재해.”

꾹.

룬은 주먹을 쥐었다.

아이가 가지기엔 무척 강한 의지를 담은 시선이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이 힘이 흐르고 순환하는 모습. 그 순환의 일부인 생명을 가진 자들이 궁금해.”

물끄러미 룬을 내려다보는 크리스티나의 시선은 속을 읽기 어려웠다.

살며시 눈꺼풀이 내려닫히고, 뜻 모를 초연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미지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미지가 아니니까.”

룬의 말에 살며시 눈을 뜬 크리스티나.

깊은 푸른 눈이 룬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동공이 살며시 떨려왔다.

“세상은 내 일부고, 나 역시 이 세상의 일부야. 두려워 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

크리스티나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아이의 말에 현기가 담겨있는 탓이다.

크리스티나가 준 전승 지식만으로는 알아챌 수 없는 이치를 본능으로 깨달은 룬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 아이는…… 정말로 천재구나.’

몸은 둥지에서 날갯짓을 하는 어린 새.

하지만 말에서 느껴진 현숙함은 이미 거대한 날개를 펴고 나는 독수리 같았다.

불만 있나?

룬이 말을 맺었다.

“엘프와 심해 지역뿐만이 아닌, 더 많은 세상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싶어.”

그를 본 페르디키온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역시, 내 아우. 내 느낌이 맞았다.’

상식적으로 따지면 한참 어린 룬과 함께 과업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그의 아우를 볼수록 꼭 같이 가야 한다 느껴왔었다.

그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리스티나 님.”

“…….”

크리스티나의 가늘어진 푸른 시선이 둘을 내려다보았다.

“펠, 네가 그렇게 말 할 정도인거니?”

말을 꺼낸 페르디키온은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예. 룬이 아직 어리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작, 제 아우의 그릇이 무척 크리라 짐작 하고 있었습니다.”

페르디키온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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