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242)

“혹시 압니까. 이 세상을 담아 낼 만큼 일지.”

세상을 담는다.

이 표현을 쓸 자들은 몇 되지 않는다.

크리스티나는 직감적으로 페르디키온이 드래곤 로드급이라 생각했음을 감지했다.

한때 크리스티나가 그랬듯이.

느린 숨과 함께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섣부른 판단과 기대는 금물이지.’

생각에 잠겼던 크리스티나가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래. 다녀와 보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사랑하고, 때론 고민스러운 시간을 경험해보며 그를 이겨내는 것도 필요하겠지.”

“!”

룬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혹여 다른 말이라도 나올 새라 냉큼 대답했다.

“믿어줘서 고마워, 크리스티나.”

됐다.

크리스티나의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거칠 게 없었다.

“음! 역시 아우님이다. 아주 잘 됐군.”

페르디키온도 축하의 말을 보탰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리 쉽진 않은 법.

“물론, 그냥은 안 돼.”

‘칫.’

룬은 속으로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물론 표정은 살짝 당황했다는 정도로 드러냈지만.

“이번에도 조건이 있는 거야?”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이며 답했다.

“그저 강하기만 해서는 당하기 마련이니까. 인간계에 가기 위해 정말 필요한 건 따로 있단다.”

‘단순한 전투 능력이 아니라는 소리군.’

아직은 그게 무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시련이 와도 천 년 가까이 수련한 그의 끈기를 이길 수는 없으리라.

룬은 자신 있게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크리스티나가 손을 들어 보이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가장 최우선은 변신 마법 수련. 다른 종족의 영역으로 가는 이상, 그들의 모습으로 변환하는 게 자연스러워야지.”

‘기본이긴 하지.’

룬은 그렇게 생각하며 충분히 납득한 눈을 해 보였다.

“하긴, 팔찌만 벗기면 정체가 발각 되는 상태에서야 곤란하겠죠.”

페르디키온도 일리 있다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의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만.

“룬, 너는 그 모습뿐 아니라, 더 다양한 종으로 변할 줄 알아야 해.”

“……?”

“엘프나, 수인. 동물들의 모습도 마음먹으면 가능할 정도는 되어야지.”

의외로 다양한 배움 목록에 페르디키온까지 의아한 눈치를 해 보였다.

“그렇게까지 말입니까?”

“물론이지.”

팔짱을 낀 크리스티나가 당연한 일이라는 말을 이었다.

“그뿐이겠니. 자력 생존이 가능할 만큼 다른 기술들도 익히는 조건이야. 최종적으로는.”

생긋.

그녀의 웃음에 룬의 자신만만했던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레어에서 내게 들키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니?”

“크리스티나에게?”

벌써부터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들었다.

“그냥 하면 그저 숨바꼭질에 지나지 않겠지. 돌아가면 좀 더 수련다운 걸 해보자꾸나.”

좀 전에 외출을 말리고 싶어하던 모습과 달리, 그녀는 적극적이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생각하는 ‘숨바꼭질’에 한해 그런 거겠지만.

‘잡히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는 거 아니야?’

별거 있겠냐며 쉬이 넘길 수 없었다.

등짝이 남아나지 않던 전적이 있었으니.

룬의 경계하는 눈을 본 크리스티나가 안심시켜주려는 듯 상냥하게 말했다.

“안심하렴. 수련이라 했지만, 격투와는 다른 거니까.”

“…….”

말과 달리 그녀의 상냥함에서 느껴진 묘한 불길함.

한때 신수였던 그가 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그냥 넘길 리 없었다.

“더욱 확실하게 잠입할 수 있도록 해 줄 수업이지. 페르디키온도 같이 들어보겠니?”

“사, 사양하겠습니다.”

페르디키온은 뭔지 이미 짐작한 눈치였다.

그는 룬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룬이 가늘게 페르디키온을 노려보았다.

‘저놈이 저렇게 행동할 정도면 분명 또 애먼 수업일 텐데.’

불길한 예감은 꼭 틀리지 않는 법이다.

***

벨리아누스가 왕 위에 오르는 날이 되었다.

룬과 페르디키온은 지정된 순서에 얼굴만 비추기로 합의를 보았다.

아직 새벽별이 남아있는 시간.

룬은 왕성 주방에 도착했다.

달그락 거리며 부엌을 오가던 룬은 모아둔 재료를 하나하나 쥐며 언령을 외쳤다.

“소생하라!”

오염된 최근의 재료는 이제 없었다.

남은 건 아주 예전에 보관해 둔 말린 과육. 혹은 콩 같은 곡물류.

오래되어 묵은 냄새가 났던 것들이 룬의 손에 갓 수확한 농작물로 태어났다.

“많지는 않네.”

마지막으로 오래된 씨를 발아시켜보는 데, 흑미와 페르디키온이 함께 들어왔다.

“룬 님! 저희 왔어요!”

“삐약!”

해맑게 웃는 흑미가 백야를 안고 한 손을 흔들었다.

페르디키온은 룬을 보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새벽부터 굳이 요리를 돕겠다고 여기에 와 있는 거냐.”

못마땅한 듯 말하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부분의 요리는 이미 엘린과 제프가 다 하기로 했어.”

“그들은 오늘 늦게 출근 하지 않나? 대신 네가 식전 요리를 해 두기로 약조했다지.”

룬이 눈을 깜빡이자, 흑미가 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를 본 룬은 단번에 상황을 눈치챘다.

‘흑미가 말 해줬구나.’

엘린과 제프는 백야에게.

그리고 백야는 흑미에게.

흑미는 페르디키온에게 전달했으리라.

어색한 눈으로 볼을 긁적인 룬이 말했다.

“요리 연습도 할 겸 약간만 돕는 거야. 마지막 인사도 할 겸 백야를 직접 데리러 왔더니 며칠 새 살이 쑥 빠졌길래.”

왕성 요리사 부부인 엘린과 제프.

그들은 최근 백야의 눈물로 치료요리를 만드느라, 꽤나 지친 상태였다.

일주일 동안 잠도 못 자고 요리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세계수 열매까지 먹어가며 일주일을 달렸지만, 약빨이란 한계가 있는 법.

그대로 버텼다간 요리하다 쓰러지게 생겼더랬다.

‘언령 수련도 할 겸, 오전에 눈 좀 붙이라고 보냈지.’

다행히 두 요리사 부부는 행운의 달 조각과 요리에 대한 지식이 출중한 룬을 믿고 부엌을 맡겼다.

‘언령 연습용 재료가 생각보다 적어 영 아쉬웠지만.’

드워프 왕성처럼 산양 뼛조각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었다.

대신 다양한 곡물과 씨 발아 연습은 꽤 많이 했다.

“엘프 왕성 요리실에 출입해 볼 일이 흔하지도 않잖아. 수련도 해 볼 겸 와 봤지.”

이어진 룬의 대답에 페르디키온은 아련하게 어린 아우를 바라보았다.

“순한 녀석 같으니.”

페르디키온이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이쯤 되니 룬은 페르디키온의 머릿속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거 아니라니까.’

차마 100년밖에 안 된 몸으로 언령을 깨우쳤다 말하지 못하고, 룬은 끙 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페르디키온이 부엌을 슥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도와주마. 요리라면 나도 손은 대보았으니.”

“형……이?”

영 못미더운 눈치로 룬이 되묻자,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왜. 불만 있나?”

“…….”

‘넌 진짜 ‘불’만 있는 놈이잖아.’

룬은 예전,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함께 요리해 본 기억을 떠올렸다.

‘부엌 다 태워먹을 기세였지.’

당시엔 감자 조각을 세어보라 하여 넘어갔다.

이번에는 딸기 조각을 세어보라 할까 고민하던 그때.

“룬 님, 흑미도 도울게요!”

“!”

문득, 룬의 눈에 흑미의 가슴에 정령이 담긴 붉은 브로치가 눈에 띄었다.

‘살아있는 불 그 자체인 정령이라면?’

룬은 반짝이는 눈으로 흑미의 브로치와 페르디키온을 번갈아 보았다.

“형, 나 좋은 생각이 났어.”

“말해 봐라.”

“정령을 이용해서 좀 더 편하게 요리 하면 어때?”

이야기를 다 들은 페르디키온은 쉽게 승낙했다.

“뭐 좋다. 살라만다 역시 내 레어에 사는 놈들.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쓰도록 하지.”

고개를 주억거린 페르디키온 옆에서 흑미도 눈을 반짝이며 작은 손을 꼭 쥐었다.

“흑미도 즐거울 것 같아요!”

둘 다 의욕적이었다.

룬은 즉석으로 정령과 함께 하는 요리법을 설명한 뒤, 재료와 냄비를 페르디키온에게 넘겼다.

“준비 됐지, 형?”

“물론이다.”

비장한 눈으로 냄비와 국자를 쥔 페르디키온.

그의 눈짓을 받은 룬이 흑미를 바라보았다.

대기하고 있던 흑미는 씨익 웃으며 가슴에 있던 붉은 펜던트를 잡았다.

“얘들아!”

쇽!

쇽!

쇽!

쇽!

쇽!

제법 덩치가 실한 불도마뱀들이 각자 포즈를 취하며 튀어나왔다.

“너희도 이야기 들었지? 각자 위치에!”

쇼쇽!

쇼쇽!

쇼쇽!

쇼쇽!

쇼쇽!

화구와 페르디키온에게 붙은 녀석들을 보며, 화룡족 꼬마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떴다.

“간다!”

화르륵!

화구에 불길이 치솟았다.

드래곤이 뿜는 화염처럼 강렬한 불.

화구에 있던 살라만다가 기합을 토하듯 입을 벌렸다.

“힘내, 일식아!”

흑미의 응원을 받은 살라만다가 꼬리를 파닥거렸다.

드래곤의 불길을 받은 살라만다는 입을 꾹 다물고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알맞게 화력이 조절되며 불의 크기가 적당해졌다.

성공을 직감한 페르디키온이 물었다.

“좋아. 이제 기름과 야채를 먼저 볶으면 되겠나.”

“그렇지.”

대답한 룬을 힐끔 본 페르디키온이 장인의 칼솜씨로 다듬은 대파와 양파, 감자와 당근을 한 번에 밀어넣었다.

촤아!

치이이익!

기름에 야채 구워지는 냄새가 먹음직스러웠다.

후르륵!

화아아아!

이어, 화려한 불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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