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이걸 해냈네.’
룬은 감개무량한 눈으로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불을 약하게 하는 법을 어려워 하여 늘 요리를 태웠던 그.
도무지 그 감을 못 잡았는데, 불의 정령인 살라만다와 합을 맞추자 아주 능숙하게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형! 이제 야채 볶음을 큰 접시에 담으면 돼!”
“알겠다!”
힘찬 외침과 함께, 페르디키온은 흑미의 불 도마뱀을 화구에서 꺼냈다.
화륵!
혀를 날름거리는 불 도마뱀이 뜨거운 온천에 몸 지지고 나온 양 몸을 털었다.
‘좋아. 불의 정령 덕분에 녀석도 요리를 꽤나 잘 하게 됐군.’
룬은 페르디키온이 접시에 요리를 담아내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워 했다.
“맛을 봐라, 룬.”
“알겠어.”
룬은 포크를 하나 들어 잘 익은 버섯을 콕 찍었다.
하압!
불질로 불향까지 입혀진 버섯.
그 맛이 일품이었다.
“형, 맛있어.”
“!”
페르디키온이 입가를 실룩이며 기쁨을 꾹 참았다.
“거 봐라. 내가 하면 다 된다고 하지 않았나.”
룬은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진짜 맛있게 잘 되긴 했다 형.”
“흑미도 먹어볼게요!”
야채보다 고기파인 흑미도 한입 먹더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불의 정령 진화
“신기해요. 파에서 바비큐 냄새가 나요!”
흑미가 부지런히 몇 조각 더 집어먹으며 외쳤다.
“더요! 더 주세요!”
페르디키온은 자신감이 샘솟는지 입꼬리를 실룩이며 콧김을 훅 내쉬었다.
“흠, 특별히 더 만들어 주도록 하마. 와라, 일식, 이식.”
쇽!
쇽!
빠르게 화구로 들어간 살라만다가 다리를 벌리고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룬이 기특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정령 불 맛이라. 확실히 독특한데.’
시선을 느낀 불도마뱀은 의기양양해져 고개를 척 치켜들었다.
이내, 페르디키온이 냄비를 쥐며 외쳤다.
“좋아, 이대로 가겠다!”
“와아아!”
흑미의 환호와 함께 둘은 열심히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룬이 하나씩 맛을 보며 칭찬하자 재미가 들렸는지 다양한 요리를 시도했다.
일식이가 힘들어 하면 이식이가.
이식이가 힘이 부치면 삼식이가.
정령들은 각자 돌아가며 페르디키온의 불길을 쬐며 화력을 조절했다.
화룡과 정령 불꽃을 입힌 요리는 구이, 볶음, 부침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특별한 맛이 느껴졌다.
룬은 먹을 때마다 감탄했다.
‘이런 불맛은 처음인데. 크리스티나한테도 꼭 먹어 보라고 해야겠어.’
손이 편해진 룬은 페르디키온이 해주는 음식을 코스요리 즐기듯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 일식아?”
흑미의 의아함에 돌아보니, 흑미의 정령 일식이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룬도 먹던 볶음면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르르.
셋 모두 서로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화악!
갑자기 환한 빛과 열기가 화구 위에서 치솟았다.
“크윽……! 이건?”
“일식아! 앗, 이식이도?”
침음성을 삼킨 페르디키온과 놀란 흑미의 외침.
다섯 마리의 하급 불의 정령들이 한데모여 꼬물 거렸다.
눈부신 화염에 감싸인 살라만다들.
룬은 정령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설마…… 이건 정령 진화?”
낮게 중얼거린 룬의 말을 들은 화룡족 소년이 미간을 좁혔다.
“진화라고?”
엘프 왕궁의 주방.
마력이 넘치는 화구.
거기에 화룡족인 페르디키온의 불까지.
모든 퍼즐조각을 맞춰 본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어. 하급 불의 정령들이 중급 정령으로 진화하는 거야.”
“!”
불도마뱀 모습이었던 흑미의 정령들.
꼬리에 불꽃이 몸 전체를 덮으며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사뿐
이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정령들은 더 이상 도마뱀의 모습이 아니었다.
“개?”
페르디키온이 말에 네발 달린 짐승의 몸에서 불티가 튀었다.
캬아웅!
대표로 일식이가 날카롭게 소리를 내자, 흑미가 고개를 저었다.
“개 아니래요.”
짐승 모양을 유심히 살핀 룬이 확신했다.
“이건 고양이야.”
고롱고롱
삼식이가 주홍빛 눈으로 정체를 맞힌 룬을 보며 골골 소리를 냈다.
페르디키온은 황당해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진화를 한다고? 여기서?”
룬은 이미 짐작했던 일인 듯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흑미가 요 며칠 특별 수업을 받았거든.”
뛰어난 정령사들이 많은 엘프 왕궁.
백야와 함께 다니던 흑미가 그들의 눈에 띄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부터였어.’
룬은 며칠 전, 성에서 돌아온 흑미의 모습을 떠올렸다.
***
“룬 니임!”
벨리아누스가 마련해 준 처소에서 엘프들의 고서를 읽어보던 룬.
익숙한 기척은 여럿이었으나, 방 안에 들어온 건 흑미뿐이었다.
룬은 고서에서 눈을 떼고 흑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왜?”
수줍게 볼을 붉힌 흑미가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이거, 읽어보세요!”
“……?”
흑미의 손에 잡혀있는 건 와인색 실링과 말린꽃으로 봉인을 찍은 편지였다.
한 눈에 봐도 종이 질감이 고급스러웠고, 희미한 자스민 향까지 묻어있었다.
‘설마 흑미가 준비했을 리는…… 없고.’
아마도 상류층에 속한 엘프 중 누군가이지 않을까 추측하며 룬은 봉인을 뜯었다.
안에는 유려하고 가느다란 필체로 써진 글자들이 흘러나왔다.
「세계의 균형자여,
그대 머리 위에 존귀한 세계수의 축복이 있기를.
낯선 곳에서 온 어린 여행자.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 위에 설 운명을 타고난 밤의 귀족에게 인사드리오.」
“…….”
룬은 편지의 중반부까지 빠르게 눈으로만 훑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용이 있는 지점에서 시선을 멈췄다.
「……하여, 검은 발걸음을 딛는 꽃과 같은 이 생명체가 위대한 정령과의 교류.
즉 세상과 정령계를 이을 뛰어난 중재자가 될 재능을 타고났음을 알게 되었소.」
쭉 읽어본 룬은 편지를 접고 흑미를 바라보았다.
“모라고 써 있어요?”
검은 귀를 쫑긋 세운 흑미에게 룬은 심플하게 설명해주었다.
“네게 훌륭한 정령사의 자질이 있다고 성에서 좀 가르쳐보고 싶다 그러네.”
온갖 미사어구와 고상한 언어로 적힌 편지를 한 줄로 요약하면 딱 저랬다.
그 말에 흑미가 슬그머니 기대하는 눈치로 말문을 열었다.
“실은요, 엘프 분들이 제가 일식이들이랑 잘 논다고 칭찬해 줬어요.”
‘오.’
무려 엘프 정령사들이 흑미에게 관심을 줄 만큼, 뛰어난 기량을 지녔다는 말이었다.
흑미가 말을 이었다.
“저도요, 엘프 분들이 정령들과 즐거워 보여서 부럽다고 했는데…… 흑미가 원한다면 더 즐겁게 놀 수 있는 방법 알려주고 싶다구 했어요.”
타 종족을 배척해 왔던 그들조차, 뛰어난 소질을 가진 흑미를 그냥 두기엔 무척 아까웠던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마침 먼저 제안 받았겠다.
타고난 정령사인 엘프들에게 제대로 가르침 받는 건 분명 이득일 터였다.
룬은 미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너는 배우고 싶은 거고?”
“네!”
마침 흑미도 원한다니 더욱 좋았다.
“알겠어. 가서 잘 배우고 와.”
흑미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 그럼요, 확인 도장 찍어서 보내 달랬어요.”
수인여우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확인서를 꺼내들었다.
룬은 양피지를 받아들며 말했다.
“꽤 신중하네.”
말은 그랬지만, 드래곤 족과 관련된 자를 가르치는 일.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였다.
룬은 물끄러미 확인증 말미를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에 도장?”
“네!”
안타깝게도 룬은 도장이 없었다.
그때, 룬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뀨우.”
‘분명 꽤 많이 챙겨왔는데.’
팔찌를 뺀 룬은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였다.
스크롤을 만들 때 미리 만들어 두었던 마법 잉크를 꺼낸 룬이 앞발에 잉크를 묻혔다.
‘이거면 되겠지.’
꾸욱.
룬이 확인서에 발도장을 찍어 넘겨주었다.
그러자, 흑미가 꼬리와 귀를 세우며 만세를 했다.
“신난다아!”
까르륵 웃으며 방 안을 우다다 뛰어다니던 흑미가 문을 벌컥 열고 외쳤다.
“제드 아저씨! 라한아! 나 가도 된대!”
철그럭!
잘 됐다는 의미로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듀라한.
그리고 촐싹 맞은 제드의 말이 룬이 있는 곳 까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