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역시 흑미 님! 거 보세요. 제가 다 된다고 그랬죠?
“웅! 제드 아저씨 말대로야! 가고 싶다 말하니까 보내줬어!”
-여윽시! 자식을 키우는 마음은 다 똑같은 거라니까요?
앞발에 묻은 잉크를 닦으며 대화를 듣고 있던 룬.
그는 대화 흐름이 묘하게 흘러간다고 여겼다.
‘자식?’
제드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원래 자식 가진 집안에선 말이죠, 애들은 다 유명한 아카데미나 학원에 보내려고 하거든요!
“……??”
웬 교육열 높은 부모들 같은 소리라니.
백미가 들었다간 큰일 날 소리였다.
‘제드 이 자식이 진짜. 흑미 내 자식 아니라니까.’
정정해 주려는 마음에 룬이 빠르게 앞발을 닦고 방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룬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듀라한과 제드, 흑미는 이미 저들끼리 떠들며 계단 아래로 멀어지고 있었다.
***
회상을 마친 룬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 푸는 걸 까먹었지만, 수업만큼은 잘도 받아왔지.’
가르침을 받아온 흑미는 숙제라며 불 도마뱀을 꺼내 신나게 저글링을 했다.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모습뿐 만이 아니다.
착실하게 담당 엘프의 소견이 적힌 편지까지 함께였다.
편지에는 흑미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가 특유의 고상함을 담아 적혀있었다.
‘덕분에 숙제 검사 도장까지 찍어봤네.’
엘프들을 구한 은인이라 여긴 덕일지.
생각보다 친절하게 지도해 주는 덕에 이런 저런 검사도장을 찍어주게 된 룬.
솔직히 중간 즈음부턴 도장 받으려고 보내나 싶을 정도였다.
“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페르디키온의 말에 상념이 깨진 룬이 대답했다.
“아. 흑미에게 정령술을 가르친 엘프 생각이 나서.”
“가르쳤다고?”
룬은 회상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추려 설명했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 페르디키온에게 룬이 이어 말했다.
“특히 내가 만들어 냈던 스크롤 잉크 있잖아. 그걸 꽤 마음에 들어하더라고.”
매번 사소한 일에도 확인증을 받고자 하는 것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
바로, 잉크가 워낙 특이해서 이리라 여긴 룬이었다.
“생명의 마력석인 진주 섞은 잉크 말인가.”
척하면 척이었다.
룬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맞아. 그들은 마법에 관심이 무척 많으니. 그래서 교육비 셈치고 잉크를 선물로 들려 보냈거든.”
“흠, 은혜를 베푼 셈이라는 거군.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들이 네게 호의를 가진 건 분명해 보인다.”
안타깝게도 룬은 잉크를 받은 엘프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확인증은 꼭 발도장을 찍을 필요 없이 서명으로 대체가 가능했다.
흑미가 까먹고 전달을 못했을 뿐.
다만, 귀여운 해츨링의 발도장을 받으려고 엘프들이 앞 다투어 흑미를 가르쳤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룬은 씨익 웃으며 말을 맺었다.
“다섯 마리의 정령이 모두 진화했잖아. 잉크 값은 톡톡히 했지.”
룬의 말에 함께 감탄한 페르디키온이었지만, 그는 잉크 값이 다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음습해 보이는 것은 없었기에, 페르디키온은 그의 아우를 위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여러모로 잘 되었군.”
이어, 접시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페르디키온이 손을 탁탁 털며 마무리했다.
“요리는 이만하면 된 것 않겠나? 필요하다면 더 해주지.”
룬이 식탁 가득한 요리와 다섯 마리의 불고양이 정령들을 보며 긍정했다.
“이거면 충분해. 덕분에 수월하게 잘 끝냈어. 고마워 다들.”
히- 하고 장난스럽게 웃은 흑미가 대답했다.
“도움이 돼서 기분 좋아요. 얘들도 훨씬 강해져서 너무 좋대요!”
캬옹! 캬오옹!
다섯 마리 불 고양이들은 몸집이 각자 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미에게 찰싹 붙어서 골골 거리고 있었다.
‘실력이 좋은 정령 선생이었군. 나중에 직접 만나보고 싶은걸.’
룬은 그렇게 생각하며 부엌 정리를 함께 했다.
몇 시간 뒤.
-와아아!
-벨리아누스! 우리의 새로운 왕이여!
드디어 대관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룬은.
“이것 참, 이 옷을 입고 어둠의 후계를 뵈려니 조금은 어색하구료.”
대관식 복장을 입고 대기 중인 벨리아누스와 와 독대 중이었다.
“그러게. 그래도 잘 어울려.”
대답하는 룬도 엘프들이 준비해 준 전통 복장을 입은 채였다.
“고맙소.”
정중하게 인사를 보낸 벨리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하면…… 대관식을 전에 따로 만나고 싶다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소?”
벨리아누스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룬에게 던졌다.
고백할 게 있어
물끄러미 벨리아누스를 보던 룬이 말문을 열었다.
“고백할 게 있어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룬은 고민 끝에 결정한 말을 꺼냈다.
“어쩌면 이 엘프들은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 효과로 내게 호감을 가진 것뿐일지도 몰라.”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의 효과는 상자 안에 든 마법효능을 지닌 음식이나 재료 등을 향기의 형태로 만들어 퍼트리는 것.
상자의 효과를 체험한 횟수가 늘어날수록, 룬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졌다.
“벨리아누스, 당신도 예외는 아니고.”
벨리아누스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는 이내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내 아들을 살릴 때 한 경고가 그런 이유 때문이구료.”
“그렇지.”
중년 엘프의 마른 손이 제 턱을 슬며시 문질렀다.
“실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소이다.”
“진짜?”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의 감화 효과는 눈치 채기 어려운 축에 속했다.
하지만 벨리아누스는 마법 능력이 뛰어난 자.
어느 순간부터 미미한 위화감을 느껴온 터였다.
“어쩐지, 가끔 그대가 나와 같은 동년배로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그 상자의 효과 때문이었구려. 허허.”
노련한 미소를 지은 벨리아누스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룬은 속으로 내심 찔려했다.
‘그건 상자 효과가 아니겠지만.’
어린 해츨링 속 알맹이가 천년 가까이 묵은 이무기였으니 진짜 동년배가 맞긴 했다.
하지만 그 사실까지는 밝힐 수 없는 노릇.
룬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내가 말하려는 건…… 지금 상자의 효과를 대부분의 엘프들이 받았잖아?”
끝까지 비밀로 할 셈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의로 호감이 생긴 게 아니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거부감이 들 법한 이야기였다.
“나뿐만 아니라 내 일행과 란드에게 가진 호감도 거기서 비롯되었을 수 있지.”
호감이 있는 자의 지인에게는 마음을 열기 쉬운 법.
룬 개인에게 호감이나 충성을 느낀 이들은 자연스레 룬 주변 인물들에게도 마음을 열기 쉬웠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인 벨리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하면, 굳이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벨리아누스의 물음에 룬이 팔짱을 끼며 답했다.
“란드가 또 다시 홀대 받을 까봐. 상자의 효과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든.”
최근 란드는 엘프들과 드래곤을 잇는 오작교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란드의 됨됨이를 알아본 몇몇 엘프들과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상자의 효과가 사라지면?
그 뒤에 변심하게 된다면, 호의적인 관계에 익숙해진 란드는 아무 이유 없이 변한 그들을 보며 혼란스러워 질 것이다.
룬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한 벨리아누스가 가벼운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군. 그가 다시 괄시를 받게 될까 염려되었던 것이구려.”
“응, 맞아.”
고개를 든 룬이 말을 이었다.
“란드가 또 사막에 버려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린 드래곤 장로의 비늘을 끝내 품고 있던 란드.
끝까지 엘프들을 수호하려 들다 엘프왕과 마족의 간계로 사막에 추방당했을 때조차 어스 드래곤(Earth Dragon)이 되어 사막에 머물 정도로, 속이 무른 녀석이었다.
‘보고 있자면 정말 미련할 정도랄까.’
룬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행동들이 다 모양이었다.
당장 룬에게만 해도 어떠한가.
종종 어린 해츨링인 룬과 페르디키온을 물끄러미 보던 란드는, 둘을 은근히 놀리면서도 가면이나 진주 장식들을 챙겨주었다.
페르디키온의 무대를 충실히 도왔고 성에서는 위험하지 않게 살펴주었다.
숲의 힘을 잃고 땅에 추락하지 않았더라면, 란드는 엘프와 드래곤 모두를 사랑하며 행복 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내게 숲의 인장 사용법을 수련시켜주는 대가가 숲의 일족에 관한 거였지.’
한껏 냉소적으로 구는 것 같아도, 결국 정을 거두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룬의 생각을 이해한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다만, 그는 염려를 보인 룬과 달리 여유로운 태도였다.
“어린 후계께서 참으로 기특하시구려. 허나,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어째서?”
빙그레 웃은 중년의 엘프가 마른 손을 제 가슴에 얹었다.
“대지의 드래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정정해야 할 것이 있소.”
“?”
의아해하는 붉은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벨리아누스가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우리에게 상자의 효과는 없었을 거요.”
“뭐?”
벨리아누스는 엘프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는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세계수의 열매는 신목인 세계수의 정수가 담긴 축복, 그 자체요.”
“!”
룬은 자연스럽게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깨달았다.
“그 열매를 먹은 순간, 우리에게 어떤 마법적인 효과나 저주가 걸렸더라도 풀렸을 테지.”
룬이 아무 말 하지 못하자,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천천히 두 번 끄덕였다.
“한데, 요 며칠간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 걸 보았소?”
“…….”
부정적인 변화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호의적으로 변했다고 느낀 참이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읽은 벨리아누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우린 어떤 마법도, 구속도 없이 스스로 택한 거요.”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은회색 눈에 담겼다.
일렁이는 빛은 온화함을 품고 따뜻하게 흔들었다.
“그대들의 호의에 , 일상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미래를 선사해주었음을 감사하기로.”
<어둠에 물든 향기상자>의 효과는 엄밀히 말해 어둠과 저주 속성을 가진 아티팩트.
상자의 영향력에 노출되었다지만, 고작 한두 번.
세계수에서 갓 수확한 열매의 효과를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게. 괜한 걱정이었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룬이 피식, 웃는 얼굴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 나이 든 엘프는 그런 염려도 무척 좋아한다오.”
은은하게 눈에 담겨있던 빛이 그늘에 밀려 다시 사라졌다.
“오래 살다보면 말이오…… 진정 누군가를 위해주는 마음이 그리울 때가 있다오. 내 젊었던 시절에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