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이기는 법.
실력을 인정받아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야망.
효율적인 인적 재산과 시간 사용.
위기를 해결할 능력.
그런 것들이 분명 더 중요한 때가 있었다.
덕분에 명예를 얻고, 병사들의 영웅이 되어 집정관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치열하게 살던 그가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온 날.
소박한 집 밥과 가족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서야 그는 웃는 법과 눈물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회한에 잠겼던 벨리아누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줄 것이 있소.”
중년의 엘프가 장식장 서랍을 열었다.
푸른빛 비단에 싸인 네모난 모양.
작은 상자로 짐작되었다.
“대관식이 끝나면 이제 사적으로 뵙기 어려울 테니 말이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일 뿐, 벨리아누스 역시 원숙한 중년.
마족의 패악에 유린당한 땅과 고난의 후유증을 정리한 후에는 생의 끝자락에 서 있을 터였다.
어쩌면, 룬을 더 이상 보지 못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간, 참으로 감사했다오. 진심으로.”
벨리아누스의 말에 고개를 들어본 룬은 잠시 뒤 상자를 받아들였다.
“나도 고마웠어, 벨리아누스.”
말없이 서로를 본 뒤, 룬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벨리아누스도 왕이 되는 자리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뒤, 대관식이 시작되었다.
***
룬과 다른 일행들이 참관한 자리에서 벨리아누스의 머리 위에 나뭇잎을 엮어 만든 관이 씌워졌다.
가장 축복된 자로서 초대된 크리스티나.
평소와 달리, 하얗고 투명한 예식옷을 입고 있어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고아한 얼굴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많은 이들이 엘프들을 걱정할 지라도, 그대만큼은 엘프들의 미래를 의심치 않고 나아가리라.”
크리스티나가 축언을 내렸다.
그리고 엘프의 대표가 황금으로 된 잔을 기울여 벨리아누스의 머리에 세계수의 수액을 부었다.
“그대, 벨리아누스. 변화와 사랑과 헌신의 힘으로 엘프들을 이끌 것임을 세계수 나무 앞에 맹세하라.”
품격 있고 우아한 목소리에, 벨리아누스가 크리스티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맹세합니다.”
신목과 황금, 세계수 진액이 굳어 만들어진 보석이 박힌 예식 지팡이가 크리스티나의 손에 들렸다.
“이 자리에 함께한 이들 모두가, 그 증인임을 기억하라.”
예식 지팡이를 가로로 든 크리스티나가 벨리아누스에게 건넸다.
그를 받아든 벨리아누스가 대답했다.
“기억하겠습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로서, 엘프의 왕이 나셨도다. 이는 엘프들의 또 다른 번영, 그 시작이 되리라.”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대관식은 막을 내렸다.
***
“백야 어디 갔어?”
룬은 당최 보이지 않는 백야의 행방을 찾으며 미간을 구겼다.
“우웅, 아까 있었는데 안보여요.”
흑미가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룬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생각했다.
‘백야는 내 권속이 아니어서 즉시 소환할 수도 없고. 귀찮게 됐네.’
지금은 축제가 한창인 때.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백야를 찾으러 돌아다니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룬이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까 보니 축제가 아니라 왕이 허락한 광란의 시간이던데.”
우아하고 귀족적인 얼굴을 가진 엘프들.
허나, 대관식이 끝난 늦은 오후부터 축제 열기가 달아오르자 온갖 기행을 하는 자들이 튀어나왔다.
페르디키온도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그래, 설마 평범한 물놀이와 나무타기 따위가 그렇게 위험한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축제 자체는 꽤 평범했다.
가면을 쓰고 신나게 춤추는 악단과 요란한 환호성은 조금 시끄러웠지만 흥을 타기 딱 좋았다.
광장에서 술 많이 먹기 대회, 혹은 우유 많이 마시기 대회도 적당히 가벼운 일탈일 뿐.
그간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살던 그들에게, 완치 된 후 첫 축제는 먹고 마시고 날뛰고픈 시간이니.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축제 한번 제대로 즐겨봅시다!”
“그래요! 갑갑했던 마음 확 풀어보자구요!”
그리고 이어진, 술 마시고 숲으로 뛰어가 나뭇가지 달리기.
타고나길 우수한 신체 능력을 가진 그들의 질주는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얏호!”
“이얏하~! 어, 어어? 으아아!”
“악! 브루스가 나무에서 추락했다!”
“뭐? 낙오자는 버려!”
농담이 아니었다.
낙오된 엘프는 정말로 버려졌고, 지나가던 룬이 발견했을 때는 발목이 삐어있었다.
마법과 물의 정령의 힘을 이용한 워터볼 던지기는 또 어땠는가.
“워터볼 던지기! 워터볼을 맞추면 상품 드립니다!”
철퍽!
“우악! 워터볼 힘 조절 실패해서 얘가 맞고 기절했어!”
가면을 쓴 룬과 페르디키온이 잠깐 돌아 본 순간만 해도 이랬다.
벨리아누스가 안전을 담당할 엘프들을 두긴 했지만, 밤이 깊으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이 후 엘프 왕국은 그간 오염된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무척이나 바빠질 터.
그 전에 휴식과 기쁨의 시간을 가지도록 더욱 풍성한 축제를 마련했더니, 즐겨도 너무 즐겨서 탈이었다.
진혼제(1)
-아이고, 걱정되긴 하네요. 아까 보니까 벌써 낮술 마시고 꽐라 된 엘프도 있던데요!
제드의 말에 흑미가 귀를 쫑긋거리며 물었다.
“제드 아저씨! 꽐라가 모예요?”
전생에 타고난 술꾼인 드워프족이었던 제드.
그는 의기양양하게 설명해주었다.
-흠, 그건 말이죠. 아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서 지 부모도 못 알아 볼 정도가 된 걸 말하죠!
털털한 드워프식 유머를 곁들인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은 흑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히익! 술이 그런 효과가 있어요? 부모님도 몰라보게 된다니, 너무해요.”
“…….”
상황을 지켜보던 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는 쓸데없이 전문적인 술꾼의 설명 때문이지, 흑미의 탓은 아니었다.
이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룬이 나섰다.
“그냥 과하게 마시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적당히 마시면 그렇게 되지 않아.”
“적당히요?”
고개를 끄덕인 룬이 말을 잇는다.
“와인도 술이고, 일전에 페르디키온 형의 레어에서 드워프들이 마시는 흑맥주도 술이거든.”
흑미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기억나요. 하지만 그 음료가 맛있는 지 잘 모르겠어요.”
여우수인은 코를 한번 킁, 하고 맡아보고 고개를 저었던 음료를 떠올렸다.
“다들 맛있어서 술을 엄청엄청 많이 마시는 거예요?”
손으로 입을 막고 영 싫은 눈치를 드러내는 흑미였다.
“쓴맛이 달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더라. 몰라도 되는 일이지만.”
룬이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술맛이 제법 익숙한 그는 새삼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술 끊은 지 오래되긴 했네. 저잣거리의 탁주 한잔조차 걸칠 수 없는 신세가 됐으니.’
전생에 어쩌다 마신 탁주가 어른거렸다.
톡 쏘는 맛과 걸쭉하게 목으로 넘어가는 그 맛!
상상하자니 절로 침샘이 자극되었다.
한데, 이 말은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튀었다.
“룬, 너 왜 그렇게 술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냐?”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의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너?”
“아니야.”
오해 아닌 오해를 받은 룬이 표정을 냉큼 굳히며 재차 부정했다.
“안 마셨어. 진짜야.”
룬은 진심이 담긴 말로 마시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페르디키온의 삼엄한 경고가 뒤를 따랐다.
“분명히 말해 두마. 500살 되기 전에 입에 대었다간, 술 마실 시기가 올 때까지 크리스티나 님 레어에서 못나올 줄 알아라.”
룬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지만, 난감한 기색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앞으로 약 400년간의 금주라니!
인간들도 고작 20년도 안 돼 입을 대보는 걸, 그는 20배는 긴 시간을 버텨야했다.
‘차라리 그 맛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이래서야 쓸데없이 경계심만 올린 셈이 되었다.
재차 알겠다고 대답한 룬이 당면한 문제를 다시 꺼냈다.
“일단 백야부터 찾자. 원래 잘 돌아다녔지만, 밤늦게 다니던 녀석도 아닌데 좀 걱정되네.”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지. 우선 놈이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봐야겠다.”
흑미가 손을 들었다.
“왕성에는 흑미가 갔는데 없었어요.”
듀라한과 제드 역시 설명을 덧붙였다.
-마을 밖에 나갔나 싶어서 경비나 주변 엘프들에게 수소문 해 봤는데, 본 자가 없다덥니다!
철커덕!
고개를 끄덕인 듀라한까지 확인하고, 룬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별 생각 없이 창밖의 달을 보던 룬.
그의 눈이 거대한 세계수의 형태에 고정되었다.
‘설마.’
일전에 벨리아누스의 저택에 있을 때도 창 밖으로 세계수를 보던 백야.
그 장면이 불연 듯 머릿속을 스쳤다.
“저기 아닐까.”
룬이 창밖의 세계수를 가리켰다.
“뭐하러 저길 또 간다는 거냐?”
페르디키온의 되물음을 당연한 것이었다.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신비로운 나무인 세계수.
부정한 것을 태우고 스스로 새로 태어나는 불의 새.
개성 뚜렷하고 다른 종족인 둘에게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어깨를 으쓱인 룬이 대답했다.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전에 백야가 우울한 눈으로 세계수를 쳐다보던 모습이 떠올랐을 뿐이야.”
이건 뭔가 있다.
그런 직감이 든 룬이 씨익 웃었다.
“혹시 알아? <폐광 던전> 때처럼 비밀을 찾아낼지.”
“흠.”
불사의 능력을 가진 백야 덕에 드러난 <폐광 던전>의 비밀.
직접 경험한 당사자로서, 페르디키온 역시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쯤에서 한 발 빼볼까.’
적당히 흥미만 돋운 룬이 어깨를 폈다.
“싫으면 나 혼자 백야만 찾아보고 올게. 마족도 사라진 마당에 별 일 있진 않을 테니까.”
험지에서 터를 잡고 살아보기 까지 한 그.
어떤 흐름이든 다뤄 본 신수의 자신감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를 그냥 둘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혼자 저 큰 나무를 혼자 어떻게 살핀다는 거냐.”
혀를 찬 페르디키온이 채비를 했다.
룬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럼 다 같이 가보는 거야?”
룬의 말에 제드가 냉큼 말을 받았다.
-그럼요! 영특한 새니 또 금방 찾아지지 않겠습니까요?
일행들은 커다란 나무둘레를 살펴보고 모코지석으로 상황을 전하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
둥근 보름달까지 떠 있는 밤.
워낙 거대한 세계수인지라, 각자 한 자리씩 확인 후 돌아오기로 합의하고 흩어졌다.
“옛날 생각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