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은 흥겨운 축제거리와 동떨어진, 엘프들의 무덤이 있는 이 자리가 유독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했다.
혼자 다니고 있자니, 한편으론 예전 생각이 나기도했다.
혼을 갈고 닦아가며 홀로 서있던 순간들.
힘든 세상 속 어둠 속에 덩그러니 존재하고만 있던 때가.
“자, 그럼.”
그는 천천히 시린 달빛색 공기를 들이켰다.
차분해진 기감.
주변을 흐르는 기운 하나하나가 더욱 예민하게 벼려진 감각을 스쳤다.
눈을 감았던 룬이 허공에 천천히 손을 더듬었다.
파직.
“……!”
깨지기 전 그어진 금.
검지 끝에 걸린 균열.
금을 톡톡 건드려본 룬은 손을 내렸다.
이런 건 평범한 상황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기존의 상식을 깨고, 기감을 확장하여 마력의 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해야 한 순간 스치는 것.
‘이걸 찾을 실력이 되는 자가 흔할 리도 없고.’
아니, 없을 것이다.
실력보다는 다른 이유로.
‘속성과 파장을 조절할 수 있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니, 만약을 대비하는 게 좋겠지.’
룬은 아공간주머니를 뒤적였다.
꺼내진 건 란드와 함께 만들어 본 세계수 나무 인형.
외형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본체화 한 룬 모양을 띠고 있었다.
마력을 주입한 룬이 인형에 마력의 실을 이었다.
‘만약 뭔가 있다면 나무 기둥 뿌리까지 털어서 가져가야지.’
인형은 인위적으로 마력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이 결계의 금이 사라지지 않도록.
검지와 엄지를 확인한 룬이 금에 손을 밀어넣었다.
슈와악!
아무도 보지 못한 빛과 함께, 룬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
눈을 뜨자, 완전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무덤이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 한 것은 푸른, 붉은, 하얀 꽃밭.
눈을 뜬 룬은 세계수가 있던 자리를 살폈다.
“이건…… 왜 이렇게.”
꽃밭에 우뚝 선 세계수는 불길함을 품고 바싹 말라있었다.
분명 룬이 생기를 불어넣었을 터인데, 이렇게 시커먼 기운이 가득한 고목이 되어있다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문득, 인기척을 느낀 룬이 고개를 돌렸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아만다?”
“…….”
멍한 눈을 한 주근깨 소녀가 잠옷 차림으로 꽃밭에 서 있었다.
엘프 소녀의 입이 열렸다.
[어둠을 걷는 자여.]
작게 울림이 느껴지는 부름.
제정신이 아닌 아만다의 목소리가 텅 빈 눈을 한 채 누군가의 의지로 울려왔다.
[나는 이곳, 가장 오래된 나무 정령.]
아만다의 손끝이 마르고 죽어있는 세계수를 가리켰다.
[또 다른 나의 어머니.]
꽃밭과 나무를 본 룬이 하늘을 다시 보았다.
달과 별이 없다.
오직 밤하늘색으로만 꽉 차 있는 기이한 하늘이었다.
빛이라곤 바닥에 깔린 세 가지 색의 꽃이 밝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였다.
“삐.”
고목에서 내려온 작은 날갯짓이 룬을 향했다.
“역시 여기 있었냐.”
“삐이약.”
눈을 끔뻑인 하얀 새가 얌전히 룬의 어깨위에 앉았다.
룬은 백야의 부리를 손끝으로 긁어주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백야까지 동원해서 날 여기 오도록 만든 이유가 뭔데.”
너무나 침착한 말에 아만다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구원.]
검게 마른 고목을 올려다본 소녀가 멍한 얼굴로 공명하듯 눈물을 흘렸다.
[태어나기도 전에 버려진 이들을 도와줘.]
말을 하나씩 곱씹던 룬은 좋지 않은 기분이 스쳤다.
“그러니까 네 말은,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혼들을 구해달라는 거군.”
룬의 붉은 눈이 꽃들을 훑었다.
꽃 하나하나가 저절로 흔들리더니 작게 반짝임을 터트렸다.
“왜 나야?”
가장 강한 골드 드래곤인 크리스티나도 있고, 엘프의 왕도 있다.
심지어 세계수도.
아만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죽은 혼을 다루는 자이니까.]
과연.
뭔가를 깨달은 룬이 얕게 숨을 내쉬었다.
“흑미 때문에 안 모양이군.”
아만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룬은 그제야, 이 꽃들의 정체를 확신했다.
“죽은 엘프들의 혼이었어.”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끝없이 심어진 꽃들.
그를 자세히 보니,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린 아이 특유의 흐느끼는 소리.
혹은 작은 잠꼬대 같은 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나의 꽃이 하나의 혼이었다.
아만다가 입을 열었다.
[마기에 물들어 탁해지기 전, 세계수의 뿌리를 희생해서 만든 곳.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내, 슬픈 눈으로 아만다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저 나무는 이젠 버티지 못 할 거야.]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세계수의 일부.
아니, 일부였던 것에 룬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저 세계수 모양의 나무는 원래 뿌리였다는 거군.”
아만다가 얌전히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룬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어쩐지 백야가 세계수 쪽을 보며 계속 우울해하더라니.’
문득 크리스티나의 말이 떠올랐다.
‘불사조는 ‘본질을 꿰뚫는 눈’을 지녔댔나.’
그 말대로, 이 작은 새는 진작 이 상황을 감지한 게 틀림없었다.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퍼즐이 맞춰졌다.
“이 나무, 마족화 된 세계수 뿌리라는 거겠지.”
룬의 손에 새까만 어둠이 맺혔다.
“삐이이…….”
어딘지 모르게 슬픈 눈을 한 백야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우드득!
살의를 느낀 나무가 거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
커다란 옹이구멍에서 공포스러운 울림이 들려왔다.
룬은 침착하게 나무를 살피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저 나무, 확실히 죽을 거다. 지금까지의 희생은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이미 알고 있었던 일. 괜찮아.]
초연한 목소리로 말한 아만다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파앗!
소녀의 몸에 빛이 은은하게 감겼다.
그러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복소복, 꽃 위로 떨어진 눈은 꽃들을 감싸듯 하얗게 덮어냈다.
[이 눈이 고요한 담요가 되어줄 거예요.]
슬픈 목소리가 조용히 고했다.
진혼제(2)
후웅!
룬의 손에 들린 어둠이 거대한 낫 모양으로 화했다.
“베기에는 이게 적격이겠지.”
우우우우!
아아아아!
한 맺힌 울음소리가 어느새 고막을 터트릴 듯 울림을 더해갔다.
“너, 후회는 없는 거지?”
대답 대신 아만다의 조용한 끄덕임이 돌아왔다.
[한때 내 몸이었지만, 이젠 마족화가 된 뿌리일 뿐.]
각오를 입에 담는 눈이 서글퍼 보였다.
“……그래.”
룬은 나무에게 시선을 던졌다.
콰곽!
룬의 의지로 나무의 그림자가 넝쿨처럼 변해 새까만 나무를 묶었다.
치이익!
검은 붕대처럼 감긴 나무는 마기를 뿜으며 붕대를 삭게 만들기 시작했다.
‘어림없지.’
나무가 거대한 몸통을 훙훙 비틀어 찢어내려 했지만, 다시 그림자들의 구속이 이어졌다.
쿵! 쿵! 쿵!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나무뿌리가 땅을 발로 쿵쾅거렸다.
그럴수록 나무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끈이 나무 몸통을 죄었다.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봉쇄한 룬이 중얼거렸다.
“나무라면, 역시 불에 약하겠지.”
화륵!
쨍한 색의 불의 인장이 허공에 드러났다.
인장에서 나온 불길은 나무 몸통을 태우기 시작했다.
이내, 비명처럼 나뭇가지 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기기긱!
지독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마기가 깃들었군.’
룬은 살짝 들이킨 마기를 몸 안 어둠으로 흡수했다.
하지만 생기를 빨아들이는 힘이 담긴 연기를 전부 마실 수는 없는 법.
목 안을 새까맣게 물들이기 전, 룬은 물의 인장을 발동했다.
찰랑
맑은 소리가 나며 물의 주인을 따라 수분이 모여들었다.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진주가루를 꺼내 물의 흐름에 섞었다.
힐끔, 뒤를 보니 하얗게 내리는 눈에 마기가 튕겨지고 있었다.
소멸까진 아니어도, 저 정도 방어가 된다면 거칠게 없었다.
‘그래도, 계속 방어할 수는 없겠지.’
“삐이!”
백야가 울더니, 어느새 룬의 옷깃 안으로 파고들었다.
“백야, 눈치 빠르네.”
나무가 쏘아 댄 검고 날카로운 가시들을 적의를 품고 쏘아졌다.
피식, 웃은 룬이 낫을 휘둘렀다.
티딩! 팅팅!
새까만 가시들이 단숨에 튕겨나갔다.
이어, 활처럼 쏘아진 룬이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피슈슉!
룬은 작게 뭉쳐진 어둠 알갱이를 만들어 나무를 향해 쏘았다.
나무가 가지를 흔들어 쳐내려했지만, 요리조리 피한 룬의 어둠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나무를 파먹었다.
몸통을 어둠에 먹힌 나무가 괴성을 질렀다.
아아아아아!
어둠은 나무와 마기를 담뿍 뜯어먹은 채 크기를 키웠다.
콱콱! 콰콱!
우오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