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242)

식인 물고기처럼 몸을 뜯어먹는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나무는 옹이구멍을 벌리고 불길한 기체를 뿜어냈다.

삿된 모습을 본 룬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설치고, 얌전히 가.”

거대한 낫을 든 그는 나무의 사각에서 튀어나와 가지를 써걱 잘라냈다.

텅!

잘린 가지가 바닥에 떨어지며 거친 소음을 냈다.

“하나 더.”

순간이동으로 반대편에서 나타난 룬.

이번에는 다른 쪽 굵은 가지 다섯을 단번에 낫으로 잘라냈다.

터덩! 텅!

공중으로 날았던 굵은 가지.

곧, 누가 집어 던진 것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아아아! 아아아!

꽤나 시끄럽게 비명을 지른 나무가 몸에서 새까만 파동을 연속으로 퍼트렸다.

꽃들 중 일부는, 그 충격에 흰 눈이 벗겨지고.

파사삭.

이내 꽃잎이 바싹 말라 가루가 되었다.

[!]

나무 정령이 들어간 아만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내, 소복소복 쌓인 눈이 빈자리를 채웠다.

“저주파까지 쓸 정도라니, 정말 묵을 만큼 묵었네.”

감탄 아닌 감탄이었다.

마법으로 보호하고 있음에도 염을 담아 터트리는 귀곡성에 귀가 따가웠다.

룬은 난동을 부리는 나무를 눈으로 보다, 등 뒤에 이동하여 등허리를 가로로 그어버렸다.

촤아악!

몸을 돌리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등 거죽을 찢긴 나무.

‘한 번 더.’

완전히 내리 그으려던 순간.

낫으로 그어낸 곳에 옹이구멍이 커다랗게 생겼다.

끔찍한 귀곡성을 울렸다.

아아아아아!

흉측하고 기괴한 나무의 저주파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룬이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자라면 진작 머리가 터져 죽었을 터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콰아악!

길게 오른쪽 끝으로 갔던 낫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각선 위로 위치를 옮긴 룬의 손에 다시 한 번 큰 낫이 들렸다.

후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무차별적으로 몸을 가르려드는 날.

허나, 동작이 컸던 만큼 시커먼 나무도 공격을 예측하고 피했다.

이어 옹이구멍이 룬이 있는 방향으로 입을 벌렸다.

“그렇지.”

빙긋

저주파가 쏘아진 자리에 이미 룬은 없었다.

“여기다.”

그가 선 곳은 나무 위, 공중이었다.

룬은 낫을 휘릭 돌리며 그대로 몸을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쫘아악!

장작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오른쪽 상단에서 밑동까지 단번에 그인 나무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아아아!

그야말로 귀곡성을 방불케 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끔찍한 소리 때문에 전투로 몸이 달아올랐음에도,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룬은 침착하게 다른 조각들도 낫으로 쪼갰다.

쫘악!

쫙!

새까맣고 거대했던 나무는 장작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가차 없이 조각난 나무.

룬은 그 중심이었던, 찐득하게 뭉쳐진 수액 덩어리 같은 것을 주워 살폈다.

“나무가 아닌데, 이건.”

[그건 세계수 뿌리 조각에 담긴 염원이에요.]

아만다가 읊조렸다.

[제 일부였던.]

룬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럼, 이게 끝인거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아만다에게 룬이 가볍게 불만스러운 소리를 했다.

“백야가 아니면 여긴 발견도 못하고 묻혔을 뻔한 거잖아. 우린 밤에 떠날 예정이었다고.”

해츨링답지 않은 강함을 지닌 룬이었기에 상황 정리가 빨랐을 뿐.

돌아가는 날이 되어서야 이 장소를 찾아낸 건, 어찌 보면 운이 닿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족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내가 구한 이들을 들키면 안됐어요.]

아만다의 손이 가슴 위에 얹어졌다.

[오직 나만이 열고, 닫을 수 있는 이 공간에서 기다렸죠. 때가 오길. 하지만.]

시선은 달과 별이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도 모른 채 봐온, 늘 똑같은 하늘을.

[원래의 몸은 아이들 혼에 조금씩 묻은 마기를 거둬들이는 동안, 까맣게 물들어가기 시작했어요.]

룬의 손에 썰린 나무가, 본래는 정령의 신체였을 터.

아만다의 시선이 룬의 손에 들린 진액뭉치를 바라보았다.

[이 공간을 조절할 몸을 잃고 계속 갇혀 있어야 했어요. 그러다, 그 새가.]

“삐약!”

아만다의 시선이 옷깃 속에서 고개만 내민 백야에게 옮겨졌다.

“백야가 뭔가 했다는 소리야?”

고개를 끄덕인 아만다가 입을 열었다.

[그 새가 부리로 쪼아 작은 틈을 냈죠. 아주 작은 빈틈을 통해, 나는 이 엘프 아이를 불러낼 수 있었어요.]

룬은 새삼스럽게 백야를 내려다보았다.

“삐약?”

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룬과 시선을 마주쳤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명확한 상황이군.’

분명, 백야는 숨겨진 공간을 볼 수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만다가 평온한 어조로 끝을 알렸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만다의 눈에 눈물이 고여들었다.

슬프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참아내며, 정령이 말을 이었다.

[모순이네요. 내 몸이 마족화가 되고 난 후에야 염원을 이루게 된 건.]

“…….”

안 됐다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안타까이 여긴 룬이 입을 열었다.

“네 남은 나무조각이나마 세계수 밑에 묻히는 게 전통적인 장례겠지만…….”

울고 있는 정령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그러기엔, 마기에 너무 더럽혀졌다는 것쯤.]

심지어 아만다가 잠시 몸을 빌려주었을 뿐.

몸을 잃은 나무 정령도 더 이상 세상에 머물 수 없을 터였다.

[제 신체였던 것은 가져가주세요.]

이대로 엘프 지역에 두기엔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럴게. 더 원하는 건 없고?”

그 물음에 아만다의 모습을 한 정령이 말했다.

[그냥…… 이 아이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만 볼 수 있으면 돼요.]

룬은 그녀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만다의 모습을 한 나무정령이 마지막 힘을 짜냈다.

토독.

공중에 백야가 만든 실금이 더 길게 깨져갔다.

[이제 가렴. 너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긴 세월, 세계수가 지켜낸 어린 혼들.

색색의 꽃들, 혼이 빛을 내며 벌어진 공간의 틈으로 빠져나갔다.

처음으로 본 세상은 축제의 불빛으로 반짝였다.

아쉬움도 배우지 못한 꽃들.

어린 혼들은 잠시 그 풍경 위에 머물다 제가 가야할 곳으로 떠나갔다.

그날 밤.

한창 축제를 즐기던 엘프들은 세계수 꼭대기에서 날아온 삼색의 꽃들이 하늘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중 일부는 마을 곳곳에 하나, 혹은 두세 송이씩 날아들기도 했다.

꽃들은 하룻밤 꿈인 양, 그날 밤이 지나면 이내 사라질 터였다.

***

“끄응.”

결계 밖으로 나온 룬은 아만다의 발끝을 질질 끌며 세계수 아래에 다시 나타났다.

“삐삐삐!”

“너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삐이약!”

투덜거리는 듯했던 룬은 삐약 거리며 우는 새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심을 말했다.

“그냥 한 말이고…… 잘했어.”

“삐이, 삐잇.”

저를 바라봐오는 새에게 룬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찾았을 땐 겨우 금이 간 것만 보이던데. 제대로 된 출입구도 없는 걸 용케 부리로 금을 냈겠더라.”

“뺙뺘악!”

하앗! 하는 눈으로 백야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노란 눈을 반짝였다.

룬은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어이없고 대견하네.’

아무도 모르는 곳을 용케 찾아낸 점도 그렇지만, 그걸 부리로 얼마나 열심히 깼을지.

상상하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론, 이 새의 부리가 대체 뭘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다들 연락부터 해 줘야겠지.’

룬은 아만다를 대충 나무에 기대 앉히고 모코지석을 발동시켰다.

<백야 찾았어.>

룬이 보낸 문자에 페르디키온의 붉은색 글자와 흑미의 분홍색 글자가 동시에 올라왔다.

<뭐? 바로 가도록 하마.>

<흑미도 금방 갈게요!>

<아이쿠야! 고 녀석 오래도 숨어있었네요. 곧 갑니다!>

갈색 글자가 올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듀라한의 발소리가 들렸다.

절그럭! 철컥!

-엥?! 아니 룬 님. 여긴 저희가 좀 전에 보고 간 곳인데. 언제 와 계셨답니까?

근처에 있던 듀라한과 제드가 가장 먼저 룬을 만났다.

“걷다보니 여기였어.”

-이야, 발이 엄청 빠르셨던 모양이네요 룬님!

문득, 제드는 나무에 기대 쓰러져있는 아만다를 확인했다.

-어라? 혼혈족 엘프 아가씨네요. ……응? 응? 설마?

호들갑스럽게 뭔가 깨달은 제드에게 룬이 대꾸했다.

“그 생각 맞을걸.”

-호오오오! 그럼 이분이 그 세계수를 읽는……!

“쉿.”

룬이 손가락을 입가에 대었다.

근처에 기척은 없지만, 혹시라도 말이 퍼져나가는 건 조심해야했다.

제드가 냉큼 침묵하더니, 소리를 죽여 소곤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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