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42)

-아아니, 귀하신 분이 이 누추한 장소엔 어쩌다가 와 계셨대요? 게다가 이 모습은 뭐랍니까. 이 좋은 날 설마 강도라도 당한 겐가요!?

엘프의 무덤이 있는 바닥에 쓰러져있었으니 그가 보기엔 황당할 만도 했다.

그러나 룬이 무어라 말하기 전, 연락을 받은 흑미와 페르디키온이 도착했다.

페르디키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행히 백야는 찾은 모양이군. 한데, 이 녀석은 왜 여기 쓰러져있지?”

흑미는 눈을 깜빡이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룬을 올려다보았다.

“잠이 든 거예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하기야, 아만다는 기절한 것 마냥 너무 축 늘어져 있긴 했다.

룬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기력이 없어서 그렇지.”

‘죽어가던 세계수의 일부라지만, 그것도 엄연히 강림의 일종이니.’

이어, 룬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백야가 부리로 결계를 깼다고? 이 새가?”

페르디키온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묻자, 백야가 의기양양하게 제 부리를 날개로 슥슥 문질렀다.

“삐약!”

심지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자랑스럽게 울기까지 했다.

생각한 게 있는데

“고작 이런 새 따위가 깨는 결계라니.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삐약!?”

페르디키온의 ‘고작 새 따위’라는 말에 백야가 눈초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삐약 뺙뺙뺙!”

하얀 새는 명백히 화를 내고 있었다.

부리 위에 있는 작은 콧구멍으로 숨을 한번 내쉰 새는 항의하듯 시끄럽게 울어대었다.

“응, 응! 정말?”

여우 귀를 쫑긋거린 흑미가 백야의 말을 들어주었다.

이어 눈을 깜빡이더니 룬을 돌아보았다.

“룬 님, 백야 진짜 대단해요! 성을 오가면서 여기에 너무너무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시간 날 때마다 와서 쪼아봤대요!”

“삐이약. 삐약삐약!”

새 주제에 할 말이 무척 많았는지, 백야는 룬의 품에서 벗어나 날갯짓까지 해 가며 삐약거렸다.

“안에서 누가 깨어나는 기척이 들렸대요. 으으음, 앗! 아냐 백야야. 말이 너무 빨라. 좀만 천천히 해 줘.”

“삐이이.”

순식간에 힘이 빠진 백야.

추욱 하고 날개를 늘어뜨린 채, 룬의 머리위에 퐁, 하고 앉았다.

“삐이이이…… 삐잇.”

“안에 이 언니랑, 꽃이 있었구나. 엄청 큰 나무도?”

“삐이얏!”

열심히 백야와 대화중인 흑미 덕분에 일행들은 대략적인 사정을 눈치챘다.

그리고, 페르디키온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룬. 너 또 혼자 갔냐?”

“……음, 어쩌다보니까.”

룬은 페르디키온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저 놈의 말썽쟁이가!’라고 외치다시피하는 눈이었다.

“……이거 비밀로 해주면 안 될까, 형.”

“될 것 같으냐?”

속으로 혀를 찬 룬.

하지만 그는 페르디키온이 생각보다 인정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좀 치사하긴 하다만.’

슬그머니 눈치를 본 룬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긴…… 형 말이 맞아. 그럼 난 오늘도 혼나는 날이네.”

안 그래도 어젯밤 아멜리아 건으로 혼이 났던 둘이다.

두 번 연속으로 혼날 일을 만들었다간 꽤나 곤란해질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룡족 소년은 내심 찔렸는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고민되겠지. 어제 아멜리아와 맞붙고 가장 신나게 떠들던 건 저 녀석이었으니까.’

심지어 룬이 남긴 메모를 들고 오는 바람이 일이 커졌던 어젯밤.

그 실수를 떠올린 페르디키온의 주저함을 감지한 룬은 시무룩한 모습으로 잠시 기다렸다.

“큼, 흠.”

헛기침을 한 페르디키온은 지그시 룬을 보다가 한풀 꺾인 표정을 지었다.

“이틀 연속으로 혼날 필요는…… 없겠지. 대신 앞으로는 잘 해라.”

”어, 정말?”

순한 얼굴로 웃는 룬의 얼굴.

그 너머에 새끼 해츨링의 본 모습이 겹쳐보였다.

페르디키온은 하나뿐인 동생을 보며 더욱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크리스티나 님께서 물어보신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말할 거다.”

적어도 먼저 말하지는 않겠다는 소리였다.

“알겠어. 고마워, 형.”

룬은 안도하는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명심해라. 다음은 없다.”

“응.”

엄포를 놓긴 했지만 잘 넘어간 룬은 잠시 뒤 백야에게 손짓했다.

“너도 생각보다 근성 있네. 고생했다.”

“삐이얏.”

룬은 칭찬과 함께 주머니에서 제법 큼직한 감자칩을 꺼냈다.

“이건 상.”

“삣!”

백야에게 건네주자, 새는 잘 보라는 듯 룬을 향해 한 차례 울더니 냉큼 과자를 부리로 물었다.

휙!

고개를 푹 숙였다가 꺾어 올린 백야.

부메랑처럼 공중에 던져진 감자칩이 쪼개졌다.

빠작!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모양이 칼로 자른 듯 정확했다.

‘부리를 틀어 미리 감자칩에 금을 냈군.’

새의 기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삐이이이……!”

백야는 떨어지는 타이밍을 노려 몸을 솟구쳤다.

“……약!”

탑!

쪼개진 두 조각 중 하나를 두 번에 걸쳐 입안에 넣더니, 나머지 한 조각도 솜씨 좋게 부리로 물었다.

어이없지만, 룬은 새삼 감탄스러웠다.

‘이 자식, 부리를 틀어내는 각도가 아주 노련한데?’

부리가 무기였다면 훌륭한 소드마스터의 재능을 가졌다고 칭했을지도 모르지만.

‘왜 그런 재능을 저 놈이 가지고 있어?’

이건 진정한 재능낭비였다.

새가 부리짓을 수련해서 공간을 가른다 한들, 부리 휘두르기밖에 더 되겠는가.

‘소드 마스터는 있어도 부리 마스터는 없다고.’

하지만 그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흑미가 눈을 반짝였다.

“백야, 너무너무 멋있다아!”

“삐!”

아직 꿀 바른 감자칩을 다 삼키지 않은 볼을 부풀린 백야.

녀석은 흑미의 환호가 무척 좋았는지, 듀라한의 투구 위에 가는 다리를 벌리고 서서 부리를 척 들어 올렸다.

“저게 뭐라고 저러는 것이냐?”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하는 페르디키온에게 룬도 비슷한 감상을 덧붙였다.

“짐승의 관점에서는 꽤 훌륭한 일인가 봐.”

“으응? 왜요, 백야 진짜 멋있었는데.”

생기 있게 웃는 흑미가 백야에게 손짓했다.

파다닥

새는 멋이 그득한 우아한 날갯짓을 선보이며 흑미에게 날아갔다.

두 손을 모아 내민 흑미는 백야가 손 안에 담기자 생글 웃으며 볼에 하얀 새을 부볐다.

“있지, 백야. 룬 님도 페르디키온 님도 백야가 무척 기특하다고 그러는 거야. 난 알아.”

“삐삐삐삐이.”

보드라운 흰 털 감촉이 내심 좋았는지, 흑미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뭔.”

눈썹을 갈지자로 구긴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며 반박하려 들었다.

하지만 룬이 먼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덕분에 큰 일 하나 잘 풀렸고, 나는 묘한 재료도 얻었으니.’

마족의 힘과 호응하기 딱 좋은 마기에 물든 세계수 뿌리.

물론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백야는 기분이 금세 좋아졌는지, 흑미의 머리 위에 앉아 삐약거렸다.

“뺙!”

“응응, 이제 돌아가야 한다구?”

흑미의 해석을 들은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갑자기 우리가 다 사라져서 크리스티나도 걱정할라.”

그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내가 연락 해 뒀다. 겸사겸사 축제도 보고 오겠다고 말했지.”

“현명했네, 형.”

룬의 칭찬에 화룡족 소년이 의기양양하게 등을 곧추세웠다.

“당연하다. 휘하에 들어온 자들을 챙기는 것도 군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중요하게 일러둬야 할 일이라 여겼는지 룬에게 재차 강조했다.

“누구 하나만 사라졌으면 모를까, 아예 우리 모두가 나갔으니 오히려 괜찮을 거다.”

백야 혼자 탈주한 일을 두고 주의를 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긴. 맞는 말이군.’

그리 생각한 룬은 여유롭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러게, 형 말이 맞아.”

은근슬쩍 룬의 안면을 살핀 페르디키온.

그는 순순한 아우의 대답이 기특했던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넌 걱정 안 해도 된다.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으니.”

잘 키운 동생을 향한 칭찬에 룬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그건 너도 그렇지만.’

성체가 될 때 까지 페르디키온이 과거의 성정 그대로 지금에 이르렀다면 어땠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레드 드래곤은 마족이나 별반 다를 거 없다는 평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모난 부분을 바꾸기로 마음먹는 것도, 행동에 옮기는 것도 자신의 역량이지.’

보통의 생명체는 살아온 관성대로 살아가게 마련.

속에 담긴 검붉고 지독한 증오의 불을 품어온 그에게는, 그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함께 했으니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터다.

“새삼 기특하네.”

룬은 속마음을 말로 툭 던져보았다.

“? 저 건방진 새를 말하는 것이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페르디키온은 그 말이 자신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하긴, 저 새도 네 휘하의 부하였으니. 잘 하고 있군.”

굳이 거짓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기에, 룬은 긍정도 부정으로도 해석하기 어려운 미미한 웃음을 띠었다.

“그래서, 이 기절한 엘프를 어떻게 할지 정해보지.”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이 말문을 열었다.

“아, 그거라면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흑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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