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42)

분홍 장밋빛 눈을 깜빡인 흑미에게 룬이 말했다.

“널 가르친 선생님들 중, 나한테 발도장 제일 많이 받아간 분 있지?”

“우웅, 네.”

고개를 끄덕인 소녀는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 분 성격 어땠어?”

으음, 하고 생각해본 흑미가 입을 열었다.

“쪼금 엄하지만, 흑미를 많이 생각해 주신 분이었어요.”

“좋아.”

흑미는 엘프족도 아닌, 작은 수인족 소녀.

혼혈인 아만다 역시 차별 없이 가르쳐 줄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비록 대가를 확실히 받아가긴 했지만, 며칠 되지 않아 흑미의 정령이 진화할 만큼 실력도 확실했고.’

그랬다.

룬은 아만다를 흑미의 정령 스승에게 소개해 줄 셈이었다.

“네 스승에게 맡겨볼까 해. 우린 곧 떠나야 하니까.”

“앗, 그럼 흑미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정령 가르쳐 준 선생님이 축제 안전요원으로 투입됐다고 그랬거든요!”

“그래?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크리스티나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곤란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안전요원으로 임시 근무 중인 흑미의 선생을 바로 만난다면?

쓰러진 하프 엘프를 안전요원에게 데려다 주었다는 설명으로 끝날 수 있을 터다.

그리 생각한 룬은 듀라한에게 아만다를 부탁했다.

“듀라한, 아만다를 업어 줘.”

철컥!

듬직한 듀라한이 제드를 허리춤에 차고 아만다를 등에 업었다.

이어, 룬은 흑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흑미는 안내 부탁해.”

“네!

대답한 흑미가 백야와 함께 앞장 섰다.

가는 내내, 축 늘어진 아만다는 도무지 깨어날 줄을 몰랐다.

‘강림은 결국 몸의 주도권을 내어주는 일. 이번에는 선의로 좋은 결과를 냈지만…….’

맥은 룬이 직접 집어본 바,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나무정령도 아만다가 직접 허락했다 말했으니 강제로 몸을 뺏긴 것도 아닐 터.

다만 오래도록 다른 혼을 품은 몸이 영적으로 크게 무리한 탓일 확률이 컸다.

‘정령처럼 다른 무형의 존재를 다루는 연습을 하면 혼을 담는 그릇도 커질 테지.’

본래는 엘프의 상층부에 이용당할까 싶어 평범하게 어른이 될 때까지 두어야 한다 여겼다.

하지만 세계수의 일부를 깃들게 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수련이 필요할 터였다.

‘제 몸을 다른 존재에게 내어주더라도, 주도권을 능숙하게 가져올 필요가 있지.’

혹시 모를 일이었다.

아만다가 훌륭한 인재가 되어 룬에게 도움이 될지도.

거기에, 넓게 보면 죽은 전대 엘프왕처럼 마족에게 홀릴 일도 방지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룬의 상념을 파고든 건 제드의 엄살 아닌 엄살이었다.

-어허허! 이 친구 허리춤 탑승감이 영 구리구만!

철…컥!

절그…럭!

그 말을 의식한 건지 듀라한이 나름 조신하게 걷기 시작했다.

-크흐흑. 룬 님, 빨리 커주십쇼. 아니, 몸이라도 얼른 만들어주십쇼. 듀라한 이 친구가 참 멋지긴 한데, 허벅지가 탄탄하다 못해 딱딱합니다요!

가는 내내 제드의 고통에 대한 어이구 소리와 주절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

아만다를 맡긴 룬과 일행들은 본래 있던 저택에 돌아왔다.

미리 연락을 받은 크리스티나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다들, 축제는 잘 즐겼니?”

“네에!”

“삐약!”

흑미가 한 손을 들어보였고, 그걸 본 백야가 한 쪽 날개를 펼쳐올리며 따라했다.

“정말이지, 축제를 경험해 보라했는데 엘프를 구하고 오다니. 어린 너희들이 기특하구나.”

기절한 혼혈 엘프를 발견해 안전요원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는, 이미 페르디키온과 룬이 수정구를 통해 전달해 둔 뒤였다.

‘양심이 살짝 찔리긴 하는군.’

룬과 페르디키온이 멋쩍게 눈을 굴렸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나는 두 해츨링이 쑥스러워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다녀왔어

“이거 받아줘, 크리스티나.”

룬은 푸른색 리본이 묶인 금색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고급스러웠고, 마법적 처리가 된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크리스티나의 하얀 손이 상자를 받아들며 말했다.

“이게 무얼까? 향이 참 좋구나.”

우아한 꽃과 과실 향.

가볍게 숨을 들이켠 크리스티나가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었다.

룬이 대답했다.

“아로마 오일과 향초 세트야. 마침 축제 특전이라고 팔길래. 취향은 란드에게 물어봤었어.”

천연의 재료를 정순하게 블랜딩 해 완성한 향의 조합은, 어지간한 향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향기를 풍겼다.

크리스티나가 상자와 룬을 번갈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어쩜, 내 취향의 향기들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엘프가 만든 오일과 향초라 하면 대륙에서도 귀품 취급을 받았다.

황금을 수레째로 가져와도 구할 수 없건만.

“이걸 어디서 구한 거니, 룬?”

“운이 좋았어.”

그렇게 말 했지만, 사실 엘프들은 자신의 작품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기로 유명했다.

‘다행히 날 은인이라 여긴 엘프들이라 다행이었지.’

무려 비밀 레시피로 직접 키운 꽃과 향 허브를 이용해 만든 향초와 오일 세트!

부르는 게 값인 상품이었다.

기특해하는 크리스티나의 반응을 본 페르디키온이 슬그머니 선물을 꺼냈다.

“실은, 저도 준비한 게 있습니다.”

“저도요, 크리스티나 님!”

페르디키온과 흑미도 각자 준비한 선물을 크리스티나에게 건넸다.

화룡족인 페르디키온은 마법석으로 만든 향초용 성냥을.

흑미는 작은 액세서리 상자를 건넸다.

안에는 디자인을 직접 골라 만든 수제 귀걸이가 담겨있었다.

제드가 빠질 수 없다는 듯 한소리 했다.

-엣헴! 이 제드도 은혜를 아는 드워프로서, 제작에 한 손 거들었습죠!

그 말에 흑미가 생글 웃으며 덧붙였다.

“맞아요! 제드 아저씨가 보석 추천도 도와주고, 어떤 모양이 어울릴지 같이 고민 해줬어요!”

문득 룬은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아멜리아에게 준 스노우볼인가, 하는 것도 제드의 작품이었지.’

감이 좋다더니, 확실히 안목만큼은 제법 쓸 만했다.

오일과 향초, 마법성냥, 액세서리.

선물들은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도, 크리스티나를 생각하는 각자의 고민의 결과임이 드러났다.

크리스티나는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을 하나씩 받으며 생각했다.

‘벌써 이렇게 많이 컸구나.’

페르디키온까지 축제거리에서 선물을 산다니.

이는 평소 화룡족 소년의 방식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룬에게 옮겨갔다.

“룬, 네가 제안한 일이니?”

그 말에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렇지만 선물은 각자 생각해서 준비한 거야.”

역시나.

티 나지 않지만, 알아보면 금세 보이는 법이다.

룬은 아이들이 움직여야 할 방향을 잘 잡아주고 있었다.

그때, 흑미가 입을 열었다.

“룬 님이 그랬어요. 평소에 감사할 줄 모르면 나중에 엄청 후회할 수도 있다구요!”

“삐약!”

백야까지 맞장구를 쳤다.

룬은 둘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였을 뿐이지만.’

시작은 돌아오는 길.

가판대에서 파는 물건들을 보면서였다.

먹고 죽자며 날뛰는 엘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축제거리를 다니며 물건을 사고팔곤 했다.

풀, 꽃을 굳힌 장식물.

나무도 만들어진 조각상.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나 가면.

부케가르니 같은 식용 허브다발.

목욕용품, 혹은 일상에서 쓰는 오일이나 화장품.

혹은 약으로 쓰는 환 등.

주로 자연에서 나는 재료를 가공한 상점과 가판대가 인기였다.

룬이 입을 열었다.

“이런 저런 상점을 구경하다보니까 떠올랐거든.”

룬이 담담히 그 당시 했던 생각을 이어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우리처럼 축제를 즐기러 나오지 못했다는 게.”

어린 해츨링의 말에 크리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찡한 기분을 느꼈다.

세상 무엇도 쉬이 마음 흔들 수 없는 그녀였건만.

이 작은 해츨링의 생각은 이렇게 그녀를 종종 놀라게 했다.

‘이 아이는 참……. 어디서 이런 생각을 배웠을까.’

벨리아누스의 대관식을 돕고, 그 후에도 큼직한 안건에 도움을 주던 크리스티나.

이미 너무 유명한 골드 드래곤 장로이기에, 굳이 엘프들의 축제에 끼지 않기로 정한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축제의 일부라도 느끼게 해 주고 싶어 한 어린 해츨링의 마음이 무척 따뜻했다.

물론 룬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어제만 해도 우리 때문에 꽤나 속상해 했지. 평소에 이래저래 신경 써주기도 하고. 그러니 이 정도쯤은 해야지.’

굳이 따지자면, 어른스러운 눈치를 조금 챙긴 셈일 뿐.

그리고 선물을 살 때 이유를 묻는 흑미에게 이야기 해 주었을 뿐이었다.

‘설마 다 같이 선물을 사야겠다 말 할 줄은 몰랐다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저렇게 감동 받은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으니.

푸른 눈 가득 고마움을 담아,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다들 정말 고맙구나.”

포근한 말에 속이 근질근질해진 룬은 조금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대꾸했다.

“이 정도야 뭐. 크리스티나는 늘 뭔가를 해주잖아.”

‘인과응보랄까.’

인과응보.

과거의 선악과 인연이 뒷날 길흉화복으로 갚아지는 법.

받은 은혜는 반드시 돌려주고, 악을 행한 놈에게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게 이치에 맞는 법이다.

적어도 룬은 그렇게 여기며 산 이무기 전생을 가진 자였다.

‘어린 생명체에게는 조건 없이 애정을 주는 게 맞지만, 본래 마음이라는 건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니까.’

아마 크리스티나 역시 룬이 좀 더 크면, 보답하는 법을 가르쳐줬을 것이다.

룬이 이미 그 사실을 깨치고 있었을 뿐.

‘꼭 그게 아니어도, 저렇게 기뻐하니 준비하길 잘했지.’

룬은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달밤에 핀 백합처럼 우아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눈을 한 차례 깜빡인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럴 때는, 종종 어린 너희가 어지간한 성체들보다도 영특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웃음지은 크리스티나가 선물들을 고이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역시 이런저런 사고를 쳐도, 다양한 경험을 한 덕일까?’

타 종족의 문화를 경험하는 일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게 해준다.

룬이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경험하게 된 건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왠지 괜찮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모든 선물을 챙긴 크리스티나가 룬과 다른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아냈다.

“앞으로 너희가 페르디키온의 과업을 함께 하며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원해줄게.”

“!”

그 말을 들은 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생각보다 더 잘됐군. 그저 허락해주는 수준이 아니라, 믿고 지지해 준다니.’

역시 선의를 베풀면 복이 오는 것인지.

룬은 뿌듯하게 차오르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잘 생각해 냈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고 있으니,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이동 마법진을 그려두었으니 따라오렴.”

룬은 일행들과 함께 크리스티나를 따랐다.

뒤뜰로 가자, 란드와 벨리아누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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