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42)

“알……겠습니다.”

“?”

무척이나 심사숙고하더니 큰 결심을 한 눈으로 수락한 화룡족 소년.

룬은 다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싫으면 확실히 싫다고 할 녀석인데. 이까지 악물고 수락할 일인가?’

그렇게 생각한 룬이 고개를 기울였다.

‘애들은 금방 변한다는…… 뭐 그런 건가.’

영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진 룬과 달리, 흑미는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룬 님 방에 가면요, 담요도 엄청 따뜻하고 포근해요!”

“삐약!”

흑미와 백야가 신이 나 설명하자, 제드도 말을 거들었다.

-이햐! 거, 그 방이라면 룬 님답지 않게 장미꽃도 아주 만발을 하고 있습죠!

제드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물끄러미 룬을 바라보았다.

“그래. 본 적 있다. 의외긴 했지. 아우님의 취향이 설마 장미…….”

“아니야.”

룬은 페르디키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라 내며 생각했다.

‘이 자식이. 내 취향이라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흑미의 본체가 마계 장미였기 때문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저런 말을 하는 저의는 뻔했다.

‘놀리고 싶었냐.’

마음에 여유가 생겨 적당히 농담을 던지는 모습은 종종 봐 왔다.

한데, 그 덕분에 이상한 재미를 깨달은 듯했다.

그 와중에 흑미가 눈치를 보며 말해 왔다.

“룬 님, 장미 싫어요……?”

“…….”

질끈.

룬은 눈을 꾹 감으려다 이를 꾹 무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리고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해 주었다.

“아니, 싫어하지 않아. 장미…… 예쁘지.”

“…….”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어린 여우 수인은 귀를 접고 시무룩한 얼굴로 변했다.

‘설마 또?’

순간, 룬은 많이 먹는다며 미움받는 줄 알고 잎을 떨구던 장미 시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안 되는데.’

식은땀 나는 기분이 된 룬.

그는 페르디키온에게 전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형, 좀 도와줘.]

부탁이라기보단 압박에 가까웠다.

페르디키온은 흠, 하고 큰 숨을 쉬더니 나름대로 도움의 손길을 내주었다.

“큼, 그럴 리 없다. 전에 나도 아우의 초대를 받아 가 본 바. 그 장소는 검은 장미와 잘 어울렸으니.”

“네에…….”

흑미의 여우귀가 솔깃한 말이라는 듯 쫑긋거렸다.

하지만 꼬리는 솔직했다.

‘꼬리들이 축 늘어져 있는데?’

낭패였다.

꼬리 끝이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신나서 흔들리는 때와 사뭇 달랐다.

‘안 되겠어.’

아무래도 흑미와 대화가 필요해 보였다.

룬은 상황을 정리했다.

“형, 일단 우리 다 같이 자러 가자.”

페르디키온도 낌새를 눈치채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는 게 좋겠군.”

크리스티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내심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차였으니까.

하지만 저들끼리 해결하도록 두는 편이 훨씬 좋으리라 여긴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룬, 전에 선물한 담요는 잘 가지고 있니?”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빛의 축복이 담긴 담요를 말하는 거지? 내 방에 있어.”

룬이 두 번째 수면기에 들어갈 때 크리스티나가 직접 짜준 담요.

크기가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데다, 빛의 마력을 흡수시킨 털로 만들어 숙면과 낮잠에 탁월한 회복력을 보였다.

“더 필요한 거나, 부탁할 게 있다면 이야기하렴.”

크리스티나의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룬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참, 내 방이니까 데려가는 것도 내가 할게.”

크리스티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며 당부를 남겼다.

“그래. 라이도 함께 데려가렴. 혹시 내게 요청할 게 생기면 라이에게 말하면 되니까.”

“응.”

룬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우르르 검은 방으로 향했다.

***

달빛이 은은하게 스며드는 검은 방.

룬은 변신용 팔찌를 빼고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폴리모프를 풀고 어깨를 돌리는 페르디키온.

그리고 흑미와 듀라한 모두 잘 준비를 시작했다.

“뀨뀨.”

[이 정도 크기면 되겠지?]

담요를 쭉 당기며 룬이 물었다.

“캬악.”

[더 크게 만드는 게 좋을 듯하다.]

페르디키온의 말을 들은 룬이 뒤뚱거리며 뒤쪽으로 몸을 물렸다.

“삐삐이약.”

당기는 대로 쭉쭉 늘어나는 담요 위에서 백야가 쫑쫑 걸어 다녔다.

[✧◟(*´∇`*)◞✧]

작은 빛을 끌며 라이도 응원하듯 공중을 맴돌았다.

자리가 완성되자, 다들 담요 가운데에 배게나 이불을 가지고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흑미는 이 자리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잡는 흑미는 좀 전보다 기분은 나아 보였다.

그러나, 애써 밝게 웃는 티가 나는 게 영 눈에 걸렸다.

룬은 페르디키온과 눈치를 슥 교환했다.

그리고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크리스티나가 자기 전에 뭐 안 먹게 하긴 했는데.’

먼저 말문을 연 건 룬이었다.

“뀨뀨우.”

[우리끼리 다 함께 자는 건 처음인데, 조금만 이야기하다 자자.]

모두가 듣도록 전음을 사용한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간식거리들을 꺼냈다.

어지간한 포션보다 효과가 좋아 룬이 꽤 쟁여둔 과자와 간식 빵이 가득했다.

“삐이약!”

신이 난 백야가 먼저 날개를 파닥거리며 냉큼 딸기잼이 발린 과자를 부리로 챙겼다.

“뀨우.”

[흑미도 먹어 봐.]

룬은 간식을 멍하니 보고 있던 흑미에게 권했다.

“앗, 네에.”

퍼뜩 정신이 든 흑미도 초코 과자를 집어 들었다.

“뀨뀩.”

[너희들은 이거.]

룬은 향기 상자를 꺼내 듀라한과 제드가 있는 자리에 두었다.

포도맛 사탕이 들어간 상자가 작동하자, 듀라한은 느긋하게 숨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드는.

-오우, 이거언. 이건! 향이 미치겠네요!

흥을 타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몸이 있었다면 또 배틀 액스를 휘두르며 불놀이를 해 대었을지도 몰랐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지금인가.’

룬은 푸딩을 오물거리는 흑미 곁으로 은근슬쩍 자리를 옮겼다.

“뀨우우. 뀨뀨.”

[어째 평소보다 잘 못 먹는 거 같은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먹는 속도가 느려진 흑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으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환장할 노릇이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이게 혹시 사춘기인가?’

룬은 애들 마음이 제일 어려운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함봔만!

‘편하게 여기도록 일부러 본체화까지 했는데.’

평소에는 거침없이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흑미가 갑자기 이러니 룬 역시 꽤나 난감했다.

답답해진 룬은 꼬리로 담요 위를 탁탁 쳤다.

그 순간, 페르디키온이 룬의 꼬리를 잡아 눌렀다.

“……?”

뭔가 싶어 돌아본 룬과 마주친 건 불의 색을 고스란히 가진 해츨링.

의아한 시선을 담은 까만 해츨링에게 페르디키온이 까만 꼬리 쪽을 코끝으로 가리켰다.

“……!”

금방이라도 들썩일 듯한 뭉툭한 검은 꼬리.

그제야 룬은 깨달았다.

그의 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제 답답함을 대변하고 있음을.

룬은 제 불찰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렸다.

‘마음을 다스려야겠군.’

룬은 천천히 뱃속 깊이 숨을 들이켰다.

긴 숨을 들이킬 때마다 통통한 배가 살짝 불렀다가 내쉴 때 천천히 꺼졌다.

‘좋아.’

한층 차분해진 기분으로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눈짓했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그리고 안 보는 척하면서 이쪽을 신경 쓰고 있는 흑미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뀨우? 뀨.”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한 뒤, 룬은 모른 척 흑미의 반응을 살폈다.

‘정말 별일 없다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터. 그게 아니라면 분명 티가 나겠지.’

흑미는 어미인 백미와 성향이 비슷했다.

룬은 이무기 시절부터 친화력이라곤 영 없는 편이었지만, 백미는 꽤 오래 본 친우.

행동 패턴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룬의 예상대로.

여우수인의 까만 꼬리 두 개가 살짝 흔들리나 싶더니, 완전히 풀이 죽어 담요 위에 힘없이 늘어졌다.

확인은 그걸로 충분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어려운데. 차라리 원하는 걸 대 놓고 말해주면 좋았으련만.’

겉으로야 태연해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런 고민을 하며 난감해 하던 룬.

문득, 그는 이런 문제에 가장 뛰어난 해결사를 떠올렸다.

‘그래, 크리스티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보면 돼.’

흠칫.

분명 이게 정답일 터였다.

한데, 떠올리자마다 룬은 몸을 굳혔다.

‘내가……크리스티나처럼……?’

룬은 상상으로나마 크리스티나의 분위기를 스스로에게 대입해 보았다.

-아가야, 괜찮니?

-예쁜 얼굴이 속상해 보이는구나. 괜찮다면, 내게 이야기해 보지 않으련?

“…….”

와, 정말 끔찍한데.

순간 정색을 할 뻔한 룬은 이를 꽉 물었다.

포근한 햇살 같은 상냥함과 다정함이 몸에 배인 룬이라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