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떠올려봤을 뿐인데, 소름으로 비늘이 차르르 돋는 기분이 느껴졌을 정도였으니.
‘틀렸어. 그건 역시 무리야.’
저 대사를 하느니, 차라리 크리스티나의 격투 수업 1년간 매일 받는 게 나았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 해보자.’
고민을 끝낸 룬은 나름대로 단어를 골라 말했다.
“뀨뀨뀻. 뀨.”
[난 그냥, 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거라면…… 그건 좀 아쉽겠다 싶었을 뿐이야.]
흑미의 검은 머리가 룬이 있는 방향으로 살짝 돌려졌다.
시무룩한 분홍빛 시선.
그를 본 룬이 말을 이었다.
“뀨우우, 뀨.”
[흑미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거든.]
그 말에 한참 룬을 바라보던 흑미는, 이내 시선을 담요 위에 던졌다.
그래도 좀 전처럼, 완전히 얼굴을 돌리지는 않고 있었다.
룬은 기회임을 직감했다.
“뀨우. 뀻.”
[흑미 너도 내가 다치거나, 속상해 하면 걱정해 줄 거잖아. 왜 속상한지 들어주고 싶을 거고. 나도 그런 것뿐이야.]
“…….”
흑미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입을 우물거리더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룬 님, 그게요…….”
“뀨.”
[응.]
룬이 추임새를 넣으며 기다리자, 흑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흑미는요…… 사실 마족이기도 하잖아요.”
눈을 한 차례 깜빡인 룬이 긍정했다.
“뀨우.”
[네 본체인 <마계장미>는 굳이 따지면 그랬지만…….]
서큐버스의 혼이 깃든 <마계장미>.
하지만 그건 껍질일 뿐, 중심이 되는 혼은 룬이 소생시킨 일미호, 흑미의 혼이었다.
‘그게 왜?’
룬으로서는 영문 모를 일이었다.
이제까지 별 말 없다가, 갑자기 의식한 이유가 뭔지.
‘애초에 크리스티나가 레어에 있도록 허락할 때, 마족이 아닌지 확인까지 해줬잖아.’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마족이라기 보단 수인족에 가깝다고 확실히 판별해 주었다.
흑미는 영 자신 없는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실은요…… 얼마 전 엘프 왕국에서 룬 님이 엄청 곤란해 했다고 들었어요. 마족 때문에요.”
“!”
룬은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떠올린 생각을 입에 올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 본체가 <마계 장미>라서 내가 싫어할 거라 느꼈다는 거지?”
“네에…….”
여우수인은 다시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
“룬 님이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왠지 여기가 왠지 따끔 했어요.”
자그마한 손으로 가슴께를 살짝 누른 흑미가 분홍빛 눈을 깜빡였다.
룬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마족을 싫어할테니, 마계 출신인 <마계 장미>도 싫어할 거라 여긴 거군.’
당연히 룬은 그런 적이 없었다.
꽃향기 가득 머금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만발한 룬의 방.
그걸 보고 있자면, 어째 마음 한쪽이 간질간질 할 때가 있었다.
그 속내를 드러내기엔 다소 민망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걸 말했다간 왜 민망한지 의문이 또 생길지도 모를 일이지.’
룬은 가장 명확한 것부터 말 해주었다.
“뀨뀨우.”
[흑미는 흑미일 뿐이야. 그리고 엄밀히 말해 난 마족이 싫은 게 아니야.]
‘마족이 싫은 건 아니다.’는 말에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분명 마족에 대한 경계심이 옅은 걸 마음에 걸려하는 것일 터.
하지만 분위기상 바로 짚어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흑미는 기대어린 시선을 룬에게 던져왔다.
“정말요?”
“뀨뀨!”
[당연하지. 사실 내가 산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도 마족한테 산거야.]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지고 있었다.
일갈을 터트릴 듯 표정이 영 안 좋은 그를 무시하며 룬이 말을 이었다.
“뀨뀩.”
[게다가, 엄밀히 말해 넌 마족이랄 수가 없어. 그건 크리스티나가 보증했고.]
룬은 흑미가 처음 깨어난 날, 크리스티나가 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뀨우, 꾸꾸.”
[널 처음 보는 존재라면서, 따지자면 여우수인족에 더 가깝다고 했잖아. 기억나지?]
축 접혀있던 여우귀를 조금씩 펴며 흑미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나요. 그때는 크리스티나 님이 무서웠었지만…….”
말끝을 흐리는 흑미를 보며 룬이 말했다.
“뀨뀨.”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네에.”
다행히 수긍하는 눈치였다.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끼었다.
“뀨우. 뀨우.”
[생각해 봐. 마족이라면 나보다 치를 떠는 크리스티나지.]
“으, 맞아요.”
그렇게 말한 분홍빛 여우수인의 눈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룬은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네가 고마움의 표시로 크리스티나에게 선물 줬을 때를 떠올려 봐. 무척 좋아해주지 않았어?]
“!”
골드 드래곤 레어로 돌아오기 전, 흑미가 준비한 액세서리 상자.
흑미는 크리스티나가 무척 감동한 눈으로 선물을 고마워했던 때를 떠올렸다.
까만 여우꼬리가 살랑이며 흔들렸다.
“맞아요. 고맙다고, 감동 받았다고 그랬어요.”
흑미의 조그마한 손은 천 안쪽에 있는 작은 오색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크리스티나 님이 주머니도 만들어 주고, 늘 맛있는 걸 줘요. 흑미가 좋아하는 사과랑 딸기, 초코 간식은 꼭 하나씩 만들어 주구요.”
점차 미소를 되찾은 흑미가 몸을 편하게 눕히며 행복한 듯 말했다.
“흑미는 사랑받고 있어요.”
흑미의 눈과 목소리에 반짝임이 돌아오고 있었다.
“뀨우 뀨.”
[그래. 여기 있는 이들 다 널 좋아하고 있잖아.]
동시에 룬이 페르디키온의 옆구리를 몰래 툭 찔렀다.
“캬악. 캭.”
[그, 그렇다. 나도 좋…… 아니, 싫어하진 않는다.]
중간에 혀를 깨무는 느낌으로 대답한 페르디키온.
그대로 끝났다면 어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백야가 날개를 파닥이며 흑미에게 다가왔다.
“삐약!”
근처에 착지한 백야.
다리를 쫑쫑 거리며 다가온 새는 담요 위에 누운 흑미의 볼에 몸을 대고 부비적거렸다.
그리고, 제드 역시 눈치 빠르게 말을 얹었다.
-에헴! 사실 말이죠, 제가 드워프 마을에 있을 때 흑미 님은 저희 드워들 모두의 유명인사였습죠.
그때를 회상하는 듯 제드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어찌나 귀엽고 이쁘셨는지 꼭 흑미 님 같은 딸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드워프 형님들이 아주 줄을 섰었다구요!
“히- 그랬어요?”
대답한 흑미의 여우 꼬리가 점점 더 크게 흔들렸다.
흥을 탄 제드가 더욱 목청을 돋우었다.
-아무렴요! 흑미 님은 말이죠, 제가 살면서 본 가장 이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구요!
라이도 무언가 말하고 싶었는지, 공중에 그림을 그려대었다.
[ (╹◡╹)♡ ]
발랄하게 그려진 빛의 그림들을 보던 흑미가 입을 열었다.
“다들 고마워어.”
눈물이 살짝 괴인 얼굴로 흑미가 밝게 웃어보였다.
-아이구! 별 말씀을요. 이 제드가 다 고맙지요!
철커덕!
말없이 이야기를 듣다 어깨를 펴며 긴장을 놓은 듀라한과 너털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한 제드.
[ (*≧∇≦*)-♡]
“삐약!”
거기에 빛을 뿌리는 라이와 머리를 뺨에 부비적거려 오는 백야까지.
“캭.”
[이 정도면 잘 해결된 거 아니냐.]
페르디키온은 룬에게만 들리도록 전음을 보냈다.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뀨.”
[그렇네.]
룬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뀨우.”
[자. 이것들도 먹어 봐.]
내심 혼자 말도 못하고 속상해 했을 흑미를 위해 룬은 가지고 있던 간식 중 자신작을 꺼냈다.
흑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와! 초콜릿 사탕이다!”
엄청나게 달고 맛있는 초콜릿으로 만든 사탕.
룬은 착실하게 <어둠에 물든 향기상자>에도 넣어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드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아뉘이~ 룬 님, 이 제드르을 함봔만! 뙇! 만져 보시라니까요! 예!?
“삐야악?”
[(゚Д゚;)]
백야와 라이까지.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황당한 눈으로 제드, 배틀엑스 파라리엄을 주시했다.
제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댔다.
-저를 딱! 쥐어보며언, 이 제드으가 훌! 륭한 에고 웨폰인 걸 아쓀텐데! 이걸 몰라주시니 아주 써운하다구요!
“…….”
가늘게 눈을 뜬 룬은 제드의 상태를 속으로 가늠했다.
‘저 녀석 설마, 향기 상자에 취한거?’
어처구니가 없었다.
룬은 할 말을 잃고 주둥이를 살짝 벌린 채 제드를 보았다.
화룡족 해츨링은 제 아우가 경악하여 굳은 줄 알고 벌떡 일어났다.
“캬악! 캬아아악!”
[이 드워프 놈이 무슨 추태를 부리는거냐! 룬이 놀란 거 안 보이는거냐!]
페르디키온의 모습은 마치 고양이가 성을 내며 털을 세우는 것 같았다.
이에 영문 모를 눈이 된 룬이 생각했다.
‘넌 또 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지 짐작도 못한 룬.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제드가 대성통곡을 했다.
-또! 또 이 제드만 미움 받죠! 아이구우 서러워라. 아이구 서러워!
흑미의 말은 이 정신없는 상황을 더 키웠다.
“제드 아저씨, 운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