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했다.
룬은 이마를 탁 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뀨우우우…….”
‘한시름 놓았다 싶었더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모인 일행들은 또 한 차례 수다스러워 졌다.
승부란 냉혹한 법
결국, 룬은 한숨 섞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뀨.”
[그만 울고 정신 차려. 때가 되면 싫어도 활약하게 될 테니까.]
일전에 페르디키온에게도 ‘정신 차려’라는 말이 잘 통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여긴 룬 옆에서 흑미도 말을 거들었다.
“울지 마요, 제드 아저씨! 뚜욱!”
-뚜욱! 하겠습니다요.
역시나.
검은 방 떠나가라 통곡을 하던 제드는 금세 정신을 차린 눈치였다.
한데, 은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게 영 포기를 몰랐다.
-그런데 말입니다요 룬님? 어차피 크리스티나 님이 보시는 것도 아니고. 룬 님 능력이라면 이 웨폰의 성능을 끌어내는 것도 기대되지 않으세요?
룬은 고개를 저었다.
“뀨웃.”
[굳이 지금일 필요 없으니까. 다음에 해.]
이만하면 좋게 거절했다 여겼건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제드.
그는 또 한번 룬에게 속삭였다.
-에이, 지금 아니면 또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어차피 룬 님 무기인데 한번만 잡아보시지. 캬, 마침 기분도 묘~하게 좋은 게 성능 잘 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동안 괜찮다 싶더니, 취한 척하며 선을 슬금슬금 넘나들었다.
‘제드 이 자식이.’
정말이지 모습이 바뀌어도 제 버릇 남 못주는 녀석이었다.
룬은 제드에게 은근한 드래곤 피어(fear)를 날렸다.
“뀨우.”
[안 한다고 했다. 취한 척 자꾸 말 걸래?]
-앗, 들켰나요?
“뀨.”
[당연하지.]
에고 웨폰이자 SS급 무기인 파라리엄, 제드.
등급도 높아지고, 전보다 강해졌다지만 드래곤 앞에 선 드워프마냥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쿠, 이거 실례했습니다요.
냉큼 저자세로 바뀐 제드는 그제야 휘파람까지 휘휘 불며 딴청을 피웠다.
속으로는 입맛을 다셨지만.
제드는 진정한 어둠 일족 후계인 룬의 힘이 깃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 집요한 기색을 눈치챈 룬은 제드 쪽을 보지 않고, 대신 시선을 돌릴 만한 물건을 가져왔다.
“뀨우, 뀨.”
[너희 이거나 한번 해 볼래?]
척!
룬이 내민 건 일종의 게임판이었다.
-오? 이거 어둠의 기운이 풀풀 풍기긴 하는데, 빛의 봉인이 걸려있기도 하네요.
제드의 관심을 돌리는데 성공한 룬이 말했다.
“뀨뀨.”
[블랙 드래곤이 유희용으로 만들었다긴 하는데…… 원래는 꽤 위험한 물건이거든.]
“캬악.”
[위험한 물건이라고?]
위험하다는 말에 눈초리에 날이 선 페르디키온.
“뀨우 뀨.”
[그랬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룬은 가볍게 앞발을 흔들며 알고 있는 썰을 풀어주었다.
[이 게임에서 일어나는 이벤트가 현실에 영향을 줬대. 예를 들어 몬스터 습격 이벤트 카드를 뽑으면 진짜 몬스터가 소환된다든가.]
-호오우. 무시무시하기도 하고, 꽤 흥미로운데요?
전생 드워프답게 제작 기술에 관심을 보인 제드.
룬은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이 게임 때문에 마을 단위 몰살 사건, 실종, 헛것을 봤다는 취급에 정신적으로 미쳐버렸다는 자도 나오고……. 온갖 끔찍한 일이 다 생겼었어.]
-허어. 아니 그런 끔찍한 물건이 어쩌다 인간계에 갔답니까?
깜짝 놀란 제드를 두고 룬이 말을 이었다.
[간 큰 용사파티가 드래곤 레어를 털어갈 때 인간 세상에 흘러들어갔었거든.]
성체 드래곤에겐 현실감 높은 놀이감이었지만, 인간에겐 재앙이었을 터였다.
룬이 게임을 열며 말을 맺었다.
[지금은 크리스티나의 봉인이 걸린, 그냥 게임도구가 됐지만.]
룬의 이야기 덕분일까.
게임을 다시 보니, 아기자기함 보다는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흑미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흑미가 만져 봐도 돼요?”
“뀨.”
[응.]
룬의 허락을 받은 흑미가 게임 카드를 먼저 살폈다.
“괴물이 많이 그려져 있어요. 이건 멘티코어!”
흑미의 작은 손이 다양한 카드들을 바닥에 놓았다.
살인 청부업자와 기사, 번개와 폭풍 같은 자연현상을 상징한 카드 등.
다양한 이미지가 신비롭게 그려져있었다.
카드 확인이 끝나고, 룬이 게임을 작동시켰다.
“뀨.”
[잘 봐.]
룬이 마력을 주입하자, 허공에 반짝이는 네모난 창이 생겼다.
몬스터 카드와, 기사 카드, 살인 청부업자인 조커.
그리고 다양한 효과를 받을 수 있는 날씨 카드들이 저절로 뒤집어져 촤르륵 깔렸다.
새삼 룬은 아련한 감상에 젖었다.
‘몬스터가 나와서 수련에 도움이 되는 건가 하고 살펴봤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벌써 백 여 년 전이라니.
시간 참 빨리 간다 생각하며, 룬은 카드를 섞었다.
진행법을 읽은 제드가 호탕하게 말했다.
-룰이 어렵진 않군요! 주사위를 굴러 골인지점에 가면 되네요.
제드의 말대로, 기본적인 룰은 쉬웠다.
말판 중간중간 추가카드 뒤집는 칸이 있고, 여기서 행동 카드나 이벤트 카드대로 진행하다보면 골인 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뀨.”
[각자 주인공 카드부터 고르자.]
제드는 듀라한과 함께 진행하기로 했고, 흑미도 백야와 함께 앉았다.
페르디키온과 룬은 각자 따로 주인공 카드를 집어들었다.
“그럼, 라이가 심판 봐줘!”
[₍ఠ ͜ఠ₎✧]
즉시 라이가 공중에서 일행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룬은 적당한 카드를 골라가며 말했다.
“뀨뀨.”
[부정행위를 감지하면 말판에서도 벌칙이 부여된다고 적혀있어. 조심들 해.]
룬은 적당히 진행하다가 마무리 할 셈이었다.
‘꼴지만 적당히 면하는 선이면 되겠지.’
그러나 룬이 간과한 게 있었다.
그저 시선도 돌릴 겸 제안한 게임.
하지만 흑미와 페르디키온, 제드.
이들은 모두 승부욕이 있으며, 게임 앞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들이었다.
***
“뀨.”
[안타깝게 됐네, 형.]
주인공 카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마왕’ 카드가 룬의 앞발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뀨뀨뀨뀨.”
“캬우욱!”
[네가 마왕이었던거냐, 룬!]
까만 해츨링의 웃음에 붉은 해츨링이 분한 듯 표정을 구겼다.
룬은 여유 있게 말을 이었다.
[‘황금의 성검’을 뽑은 기사가 아니라면, 제물카드를 내놓거나 도망쳐야할걸?]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비장한 얼굴로 송곳니를 드러냈다.
화룡족 소년의 난감해 하던 표정은 이내 함정을 파둔 사냥꾼의 웃음처럼 변해갔다.
“캬아아…….”
[룬. 마지막까지 방심은 금물인 법이다.]
“?”
‘마왕’ 카드는 3턴에 한 번씩 공격력이 강해지는 카드.
이번에 그 3턴째였기에 룬은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한데 붉은 색 해츨링이 사악…… 아니,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인물카드를 뒤집었다.
타악!
“캬악!”
[봐라! 나는 공주 카드다!]
“……!”
남사스럽게 생긴 핑크 드레스를 입은 여성 카드를 본 룬이 낭패한 얼굴을 해보였다.
공주 카드는 자신을 공격한 자를 동료로 만드는 카드.
심지어 룬은 ‘마왕’ 카드였기에 ‘납치’ 이벤트까지 발동했다.
“꾸우우…….”
[하필 형이 공주 카드라고……?]
난색을 드러낸 룬을 보며 페르디키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캬악!”
[그래. ‘마왕의 공주 납치’ 이벤트다. 네가 날 업고 가라.]
끙, 하고 볼을 긁적인 룬은 미간을 좁혔다.
‘페르디키온이 공주였다니. 생각도 못했네.’
그렇다면 기사는 흑미와 듀라한 중 하나.
둘에게 시선을 던지자, 흑미가 호오오. 하더니 백야에게 말했다.
“히- 사실 흑미가 ‘기사’인데! 백야야, 우리 룬 님, 아니 마왕 얼른 잡자!”
“삐이약!”
졸지에 2:1을 하게 된 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뀨후우우…….”
‘기사가 정체를 밝혔으니, 우선적으로 공주를 구하러 오겠지.’
보석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공주 카드를 든 주제에 용케 표정에 드러내지 않은 페르디키온.
룬은 내심 감탄했다.
‘의외로 게임에서 표정을 잘 감추는 녀석이었군.’
솔직한 성격이라 공주 카드 같은 걸 쥐었다면 티가 나리라 예상했던 룬.
그는 자신의 패착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게임은 아직 한창이니 상황은 또 뒤집을 수 있을 터였다.
“뀨뀨우.”
[좋아. 하지만 형은 마왕에게 납치되었으니 ‘왕성’ 카드를 못 뽑으면 같이 골인해도 내가 승자가 된다는 거 잊지 마.]
룬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콧숨을 한 차례 내쉬었다.
“캬우욱!”
[하! 레어의 주인인 이 몸이 왕성을 못 뽑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페르디키온은 주사위의 턴을 넘겼다.
마왕에게 납치 이벤트가 발생한 덕분에, 룬이 주사위를 굴릴 때 같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룬과 페르디키온, 흑미의 삼파전이 되나 싶었던 게임은 듀라한의 역할이 ‘성스러운 사제’라는 게 밝혀진 후, 한 번 더 요란하게 뒤집어졌다.
-움하하하! 제가 바로 성스러운 사제입니다! 제가 대사제가 되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죠!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마.왕.님?
“뀨후.”
[배신자의 말로는 비참한 법이야, 제드.]
결국 제드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룬이 ‘성스러운 사제’인 듀라한과 제드에게 ‘타락의 손길’까지 써 가며 포섭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룬이 승자는 또 아니었다.
“이겼다아!”
의외로 최종 승자는 흑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