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카드를 가진 흑미가 ‘황금의 성검’ 장비 카드를 뽑은 데다, 주사위까지 연속으로 6을 세 번을 뽑는 운빨 기염을 토한 덕분이었다.
“보세요! 흑미랑 백야가 이겼어요!”
“삐이약! 삐약삐약!”
신이 난 흑미가 백야와 함께 폴짝 거리며 뛰었다.
“뀨.”
[축하해.]
룬은 덤덤히 축하를 건네었다.
그 역시 꼴지만 아니면 괜찮았고, 실제로 순위는 2위였다.
페르디키온이 ‘왕성’ 카드를 뽑긴 했지만, 룬과 페르디키온 모두 골인을 하지 못했으므로 공동 2위를 달성한 덕이다.
-세상에, 어떻게 그 타이밍에 제 손에 ‘대사제의 부름’ 카드가 뽑히냐고요?!
듀라한과 함께 꼴지가 된 제드는 무척 억울한 목소리로 토로했다.
-진짜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네!
‘타락의 손길’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면, 이 판 최고의 주인공 카드가 되었을 제드와 듀라한.
하필 마왕인 룬이 ‘타락의 손길’을 성공시킨 직후 터진 이벤트만 아니라면 그랬을 것이다.
“뀨.”
[뭐, 승부란 냉혹한 법이니까.]
룬은 그렇게 말했지만, 제드가 아쉬워하는 건 이해가 갔다.
어찌 보면 룬이 타락시킨 덕분에, ‘사제’에게 가장 강력한 이벤트였던 ‘대사제의 부름’은 신전 구금 이벤트로 바뀌었으니까.
-크흐흑! 심지어 ‘신전 구금’에서 주사위 6이 나오다니! 이건 너무하다고요!
6턴이 지나는 동안 손가락만 빨며 안달 나있던 제드는,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게임 종료를 맞이해 버렸다.
페르디키온도 나름대로 애도를 표현했다.
“캬우.”
[안타깝더군. 6턴이나 묶이다니.]
구금이 끝나면 백화되어 ‘타락의 손길’ 효과가 사라지고, 잘만하면 대사제가 될 이벤트도 챙길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긴 ‘구금 생활’이었다.
최강의 주사위 숫자와 최강의 이벤트 카드 모두를 뽑은 녀석이 꼴지를 했으니, 무척 억울해 할 만도 했다.
-안되겠습니다! 이 제드, 이대로는 못 끝난다구요! 한 판 더 해요!
“흑미는 좋아요!”
“캬앗!”
[걸어오는 승부는 받아주지.]
내일 하려던 일이 있어 슬슬 자려던 룬.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긴 재미있기도 했고…… 딱 한판만 더 해볼까.’
결국 룬도 고개를 끄덕였다.
“뀨뀩.”
[그럼 한판만 더 할게.]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었다.
“캬악!”
[좋아. 카드를 돌려라, 제드, 듀라한.]
철컥!
화룡족 해츨링의 말에 꼴찌였던 듀라한이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사실, 룬 역시 알고 있다.
어디 윷놀이라도 하게 되면 한 판으로 끝나던가?
게임이란 원래 한 판만! 이라는 말이 가장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두 번째 판.
분위기는 점점 열기를 띠고 있었다.
아직 인물카드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룬은 페르디키온의 꼬리가 저도 모르게 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흔들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불안함과 초조함이라. 어지간히 망한 카드를 뽑은 모양이지.’
이어, 흑미를 슬쩍 살피니 머리위에 백야를 둔 채 이거 어때? 하며 행복한 듯 헤실 거리고 있었다.
승부도 승부지만, 게임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정말 재미있나보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다 모여 논 적은 없긴 했지만.’
파악이 끝난 룬이 주사위를 던졌다.
그리고 이벤트 존에 있는 카드를 한 장 뽑았다.
‘시선들 무섭네.’
룬의 비늘위로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라고 다들 긴장해있담.’
룬은 이벤트 카드를 조용히 챙겨넣었다.
‘아멜리아가 오면 한번쯤 판을 벌여보는 게 좋겠어.’
룬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사제’카드와 ‘황금의 성검’ 카드를 나란히 쥔 채 ‘이단 심판관’으로 전직할 준비를 마쳤다.
다음으로 주사위를 던진 제드.
마침 그도 이벤트 카드 존에 도달했다.
-이보시게, 듀라한. 요번 이벤트 카드만 터지면 한방에 압승할 수 있네! 갑세!
절그럭.
듀라한은 제드의 말에 따라 이벤트 카드를 뒤집었다.
그리고 제드가 환호성을 질렀다.
-키이야! 이거지요! ‘대소집’ 카드입니다!
일족을 모을 수 있는 ‘대소집’ 카드.
이어, 제드의 정체가 드러났다.
-여러분! 바로 제가! 마왕입니다! 으하하하하! 마왕의 대소집인 ‘마족 대강림’ 이벤트란 말입니다!
캬캬 거리며 웃는 광기 어린 목소리는 다소 천박했지만, 진짜 마왕 같은 포스를 풍기는 제드…… 아니, 듀라한 덕에 의외로 어울렸다.
손패를 살핀 페르디키온이 분한 듯 이를 꽉 물었다.
“캬윽!”
[젠장!]
짜증스럽다는 듯 제드를 노려본 페르디키온이 들고 있는 카드를 내리며 투덜거렸다.
“캬욱.”
[난 도박쟁이 정보상 카드다. 거래 가능한 상황도 아니고, 승부를 걸 만한 게 없군.]
후, 하고 패배의 분함을 삭히는 페르디키온에게 룬이 제안했다.
“뀨뀨.”
[나랑 거래하자 형.]
패배 선언을 하려던 페르디키온이 동작을 멈췄다.
“캬악”
[어떻게 말이냐. 네 차례도 아니면서.]
룬은 미미하게 웃어보였다.
“뀨뀨우.”
[아무튼, 할래?]
잠시 룬을 물끄러미 본 화룡족 해츨링.
크릉, 하고 울음소리를 낸 그가 말했다.
[하겠다. 방법이 있다면 해봐라.]
“뀨뀨뀩.”
[잘 생각했어.]
룬이 주사위를 굴리자 눈금 3이 드러났다.
거래를 위해 페르디키온의 손패를 확인한 룬이 버릴 카드 세 장과 페르디키온의 카드 세 장을 바꿔갔다.
‘오, 좋은 카드가 들어왔네.’
손패가 빵빵해진 룬은 즉시 앞발로 ‘속공’카드를 꺼냈다.
“뀨우.”
[제드의 턴이 끝나기 전에, ‘속공’을 사용할게.]
즉시 발동 가능한 카드이기에 신중히 써야하는 카드.
그야말로 손 빠른 마왕 제드가 게임을 끝내려는 지금이 적기였다.
이어, 룬은 앞발로 카드를 착착 추가로 내려놓았다.
“뀨우. 뀨우. 뀨우우.”
[거기에 ‘성스러운 사제’ 카드와 ‘황금의 성검’카드로 ‘이단 심판관’ 전직.]
-예? 설마요?
불길함을 감지한 제드.
룬은 무심히 앞발을 움직였다.
[아까 페르디키온 형한테 거래로 받은 아이템카드 ‘복사 거울’로 테이블 위에 있는 제드의 ‘대소집’ 카드를 복사할게.]
도박쟁이 정보상이 써봐야 소용없을, 복사 거울. 그리고 대소집 카드.
룬의 손에 들어오니 최고의 대적자가 완성되었다.
흑미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와! 제드 아저씨랑 룬 님 뒤에 뭐가 일렁거려요!”
룬은 마지막 퍼즐을 맞추었다.
“뀨뀨.”
[‘이단 심판관’의 ‘대소집’ 발동.]
쿠웅!
둥둥둥둥!
드래곤이 만든 게임답게, 룬과 제드의 뒤에 환상마법이 발동되었다.
제드의 등 뒤는 온갖 괴물과 마수. 마족의 대군이.
룬의 뒤에는 성자와 성녀, 팔라딘. 성스러운 수호자들이.
흑미가 실감나는 대군들의 모임에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대었다.
“와, 제드 아저씨도 룬 님도 엄청 멋지다아!”
듀라한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제드는 파라리엄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승부사의 기질을 드러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같은 ‘대소집’ 카드잖아요! 결정은 주사위가 하는 거라구요!
“뀨.”
[그렇지.]
‘이단 심판관’과 ‘마왕’ 모두 2차 전직군.
아직 승패는 모를 일.
둘은 각자 주사위를 쥐었다.
그리고, 주사위가 던져졌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제드의 주사위는 6.
룬의 주사위는 2.
결과는 룬의 패배였다.
-으하하하하! 감히 마왕에게 덤비시다니, 이 제드야말로 세계 최강입니다아!
제드가 승리 선언을 했다.
하지만 룬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는 표정을 읽기 어려워 속을 알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룬은 조용히 앞발을 움직였다.
“……뀨.”
[……발동.]
룬은 태연하게 다른 카드를 꺼냈다.
“뀨뀨.”
[운명의 수레바퀴.]
운명을 바꾸는 수레바퀴.
흑미가 가상의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 쪽으로 고개를 쏙 빼었다.
“으음, 흑미가 설명을 읽어볼게요. 카드 효과, 상대와 자신의 주사위를 바꾼다.”
“!”
상황을 이해한 페르디키온이 룬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흑미는 손가락으로 제 턱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그으러니까…… 제드 아저씨랑 룬 님이랑 주사위 눈금이 바뀌어요! 룬 님이 6이고, 제드 아저씨가 2! 맞죠?”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뀨 뀨아.”
[응, 그거 맞아.]
쌍방 주사위 대결 시 쓸 수 있는 보조카드.
페르디키온과 흑미의 눈이 커졌다.
듀라한조차 룬에게 녹안을 빛냈다.
그리고 경악한 제드.
- 저, 저게 왜 여기서 나옵니까아아!
그에게 몸이 있었다면 머리털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회심의 이벤트가 와장창 부서진 제드의 대소집이 처참하게 해체되었다.
결국 이 판의 승자는 룬. 꼴지는 제드였다.
이어, 다음 판은 ‘정령술사’를 뽑은 흑미가 ‘가호’ 카드로 정령들의 가호를 받아 모두의 공격을 막고 승리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
다음 날 점심 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