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42)

“캬우우……. 캬악.”

잠꼬대를 하며 미간을 구기고 자는 페르디키온.

“삐로로로…….”

“흐냠냠…….”

날개를 펼치고 데굴거리며 자는 백야와 입맛을 다시며 자는 흑미.

덜그럭…….

팔짱을 낀 채 아버지가 할 법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졸고 있는 듀라한.

-크허헉! 크허어어…….

조용하나 했더니, 중간중간 코고는 소리까지 요란한 제드까지.

다들 늦게까지 떠들다 겨우 두어 시간 전에야 잠에 든 상태였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일어난 건 룬이었다.

“뀨으으.”

몸이 영 뻐근했다.

주변을 슥 둘러본 까만 해츨링은 절로 하품이 나오는 걸 참지 않았다.

“뀨하아암.”

간밤에 너무 달렸다.

잠시 멍하니 있던 룬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기척을 최대한 죽이며 발을 움직였다.

마침 푹신하고 질 좋은 담요가 더더욱 소리를 잘 흡수했다.

푸르륵!

룬은 멀리 떨어져서야 몸 전체를 털었다.

이어, 날갯죽지에도 힘을 주었다.

촤악!

날개를 몇 번 파닥이자, 영 뻑적지근했던 게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룬은 슥, 하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광란의 밤이었네.’

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널려진 과자 부스러기.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음료수병.

한쪽에 대충 정리해 밀어둔 게임.

간밤에 그들이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다들 오랜만에 돌아온데다 워낙 재미있게 놀았으니.’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마지막엔 흑미와 라이가 백야와 우다다다 놀이까지 하며 즐거워했다.

그래도 다들 신체 능력이 좋아서, 실수로 액체를 뒤엎거나 과자 부스러기를 과하게 밟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야단법석이긴 했지만, 즐겼으면 됐다.’

작정하고 난동을 부린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꽤 양호했다.

룬은 목을 가볍게 돌렸다.

‘이쪽은 나중에 청결 마법으로 정리하면 되겠고, 먼저 나가봐야겠군.’

마음 같아서는 룬도 그들과 함께 푹 쉬고 싶긴 했다.

하지만 그는 간밤에 떠올린 계획을 상기했다.

‘아멜리아 부모의 첫 방문이라.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지금 시간이면 크리스티나는 룬과 다른 이들의 식사를 준비할 터.

아멜리아 일가에 대한 조언 또한 기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페르디키온 녀석은 특히나 마력에 민감하니 조심스럽게.’

룬은 최대한 조용히 마력을 움직였다.

“캬악! 캬우우우…….”

잠꼬대와 함께 붉은 해츨링의 귀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뿌득! 까드드득!

“…….”

대체 뭐가 저리도 분한 걸까.

드래곤 이빨이라 상할 리는 없겠지만, 험한 꿈을 꾸는지 이를 갈았다.

‘요란하게도 자는군.’

하지만 그건 잠시였는지, 페르디키온은 이내 몸은 둥글게 잘 말고 조용해졌다.

완전히 조용해지자 룬은 최대한 천천히 이동식을 완성시켰다.

슉!

자리에서 사라진 룬이 다시 나타난 장소는, 바로 크리스티나의 요리실.

골드 드래곤의 부엌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구나, 룬.”

“뀨뀨.”

[좋은 아침. 크리스티나.]

물방울을 공기 중에 여럿 띄웠던 금발의 여성이 웃어보였다.

“오늘은 수업도 없는데, 뭔가 먹고 싶은 거라도 있니?”

[아니.]

룬이 고개를 저었다.

인사를 건넨 크리스티나는 마악 삶은 물에서 야채를 건져올렸다.

“뀨우.”

룬의 시선이 야채들을 향했다.

야채를 삶아낸 물에서 정화의 기운이 느껴졌다.

시선을 눈치 챈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역시 뭔가 느낀 거니? 이건 세계수 근처에서 길어낸 우물물이거든.”

“뀨우.”

그럼 그렇지.

한 눈에 봐도 물이며 야채 때깔이 남다르다 싶었다.

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금빛 머리카락을 묶어 올린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요리 해 보면 더 좋을 것 같았단다. 아멜리아의 부모들은 입맛이 독특한 편이거든.”

“뀨.”

가볍게 울음소릴 낸 룬.

그는 냄비를 앞발로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도는 명백했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의문을 입에 담았다.

“날 도와서 요리를 만들겠다는 걸까?”

고개를 저은 룬이 재차 손을 움직였다.

슥.

제 아공간 주머니에서 세계수의 열매를 꺼내든 룬.

뭔가 깨달은 크리스티나가 가볍게 탄성을 터트렸다.

“! 그렇구나.”

이어, 푸른 눈에 미소를 담은 그녀가 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리하기도 하지. 네가 직접 요리를 대접해 보겠다는 말이었니?”

“뀨우뀨.”

[응.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룬이 냄비를 화로 위에 올렸다.

페르디키온이 준성년이라 하나, 결국 해츨링들끼리 가는 일이다.

심지어 아멜리아는 인간계에 가본 적이 없으니 그를 대비할 교육을 받으러 오는 것이 주 목적.

룬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의 일족은 교육을 어떻게 받을지 궁금할 테지. 함께 갈 어린 해츨링인 내가 인간세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도.’

인간세상은 드래곤에게 가장 선호도 높은 유희장소였다.

당연히 아멜리아의 부모 역시 유희를 다니며 음식을 맛보았을 터.

‘내가 인간계에 대해 잘 알수록 나를 신뢰할 확률이 높을테지.’

그랬다.

룬이 요리를 하는 이유.

바로 인간세상에 나갈 준비가 충분히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취향 파악

본래 대놓고 말로 설명하는 것 보다, 은연중에 보여주는 편이 훨씬 설득력을 가지는 법.

“뀨!”

[시작해볼까.]

의욕이 생긴 룬은 빠르게 크리스티나가 준비한 재료를 눈으로 훑었다.

‘돼지고기와 생선이 없군.’

드워프 때도 크리스티나는 그들의 취향을 어느 정도 맞춰주었다.

마찬가지로 이 재료들도 아멜리아 일가의 입맛에 맞췄을 터.

‘좋아. 취향 파악은 끝났다.’

룬은 크리스티나가 골라 둔 재료 중 토마토를 쥐었다.

제법 진지한 눈을 한 까만 해츨링을 보며 크리스티나가 작게 웃었다.

“어떤 요리를 할 생각이니? 무척 기대되는구나.”

머릿속으로 요리 목록을 정리한 룬이 입을 열었다.

“뀨뀨우.”

[이런 걸 할까 하는데…… 어때?]

크리스티나가 준 지식과 그간의 소생 언령 훈련을 해 온 룬.

그는 각 종족과 나라별 식사와 조리법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뀨.”

[아멜리아의 부모님들 식성이 조금 독특하다고 그랬지? 혹시 그거 살아있는 동물은 못 드시는 거 아니야?]

그 말을 들은 크리스티나의 눈에 이체가 떠올랐다.

“똑똑하구나. 이 재료들만 보고 그걸 알아낸 거니?”

“뀨우우.”

[왠지 그럴 것 같았어.]

해산물과 육류가 없는 부엌.

알고 있었다면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고기나 생선을 먹는 게 당연했던 해츨링이 보자마자 떠올릴 만한 발상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크리스티나는 무척 놀라워했지만 룬은 이 건강하다 못해 극단적 채식 위주의 식단을 본 적 있었다.

‘그야, 딱 봐도 절 밥 재료가 저런 느낌이니까.’

엘프들 조차도 우유와 꿀, 빈도가 적을 뿐 고기를 먹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준비한 이 재료.

콩, 샐러리, 당근, 허브, 토마토 등.

우유와 달걀, 고기가 없는 야채와 향신료들을 보자니, 오이나 당근 따위를 간식이라며 시원하게 씹어 먹던 스님들이 저절로 연상되었다.

룬은 잠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허허 웃으며 합장하다가도, 전투에 들어가면 웃으면서 사특한 놈들 잡아 찢던 놈들이었지.’

스님들은 퇴치를 위해 이무기를 찾아오기도 하고, 다른 요망한 악수들을 잡기 위해 조언을 구하러들기도 했다.

룬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무기 님, 보소. 이 무 장아찌는 아닥아닥 씹히는 맛이 아주 좋소이다.

-안 먹어. 좀 나가라.

-허허. 이 좋은 구름과 바다를 보기만 하여도 배가 부르신 모양이오.

맨 밥에 김치와 무 장아찌를 올려먹는 모습을 보자면, 뭔가를 초월한 듯 보이기도 했다.

룬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뀨우.”

[아무튼, 그 식성을 감안해서 토마토 야채스프를 하려고.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데…….]

이야기를 모두 들은 크리스티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웃음을 띠었다.

“그래. 아멜리아 일가를 대접할 요리로 충분하겠구나. 아니, 그 요리를 본 그들이 놀랄지도 모르겠는걸.”

만약을 위해 그가 만들 메뉴 확인까지 마친 룬.

그는 왼쪽 앞발로 국자를 잡았다.

요리는 곧 그 곳의 문화.

음식 문화에 능숙한 모습은 룬이 대륙에 나가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물론 이 치밀한 계산은 룬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것일 뿐.

크리스티나의 시선에서 보면, 맛있는 걸 먹고 좋아서 요리에 푹 빠진 까만 해츨링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흐뭇한 시선을 하고 요리를 시작한 룬을 보았다.

‘정말 신기해. 재료들을 보고 아멜리아 일가의 취향을 파악한 것도 대단하고.’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한 룬을 보며, 그녀는 남몰래 생각했다.

‘항상 열심히 요리를 하더라니 혹시,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간밤에 신나게 놀았다는 라이의 말을 전해들은 크리스티나는, 피곤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의욕적인 룬을 바라보았다.

요리는 룬에게 있어 소생 언령 연습 겸, 마력이 담긴 재료를 다루는 수련.

세상에 나가기에 부족함 없는 해츨링이라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기회.

그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유난히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동글동글한 까만 해츨링의 머리에 시선을 던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은 건 인상 깊었어.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심이 없었다면 눈치채기 어려웠을 거야.’

그녀는 양념을 만들고, 국자로 냄비 안을 젓기 시작한 룬을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몇 시간 뒤.

인간 형태로 모습을 바꾼 룬은 만들어진 음식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역 샐러드와 다시마 쌈. 토마토 스튜에, 메시 포테이토와 코울슬로 샐러드. 통밀빵과 과일 샌드위치에 당근과 사과 쥬스…… 완벽하네.”

그렇게 말한 룬은 그가 한 것들 중, 시간이 조금 지나도 괜찮은 요리들을 식탁으로 옮겼다.

마침 룬에게 연락 받고 식탁에 모인 이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페르디키온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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