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 살면서 이런 풀떼기 가득한 식탁은 처음이다.”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오늘은 고기나 달걀, 우유가 없을 거라서. 통밀빵도 버터랑 우유 없이 만들었거든.”
그나마 엘프들이 직접 키워 수확한 거라 다행이었다.
일반적인 통밀가루였다면 평범한 식성을 가진 이들이 맛있어하기 무척 힘들었을 터다.
그야말로 건강함이 가득하다 못해 풀과 야채뿐인 식탁.
모인 일행 중 룬을 제외하고는 다들 아쉬운 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흑미는 고기 한 점 없는 식단에 무척 암울해했다.
“히잉. 그럼 오늘은 야채만 먹는 거예요?”
“꼭 그렇진 않아. 스테이크가 있으니까.”
룬이 고개를 젓자 그제야 안도하는 눈치로 흑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정말 다행이다 백야야. 그치?”
“삐!”
사실 만든 룬도 아멜리아 부모들의 해츨링 시절, 식사를 어떻게 했을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해츨링 시절 식사량은 만만치 않은 양이었을 테니까.
‘육류를 먹을 수 없었으니 먹을게 무척 한정적이었을 텐데.’
물의 영역에 주로 거할 테니, 가장 쉽게 손이 가는 먹거리는 해조류.
아마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해초들이 사라졌을 것이다.
듀라한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제드는 식탁을 보자마자 진저리를 쳤다.
-어휴! 이런 식사는 대체 어디서 알아오셨답니까? 드워프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식탁입니다요.
그의 식탁에 대한 감평은 혹독했다.
하기사, 술과 고기로만 채우는 드워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식탁이었다.
“그러니까 더 좋은 거지만.”
‘고기를 좋아하는 녀석들도,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만족할 식사가 되 테니.’
그렇게 생각한 룬이 미미한 웃음을 띠었다.
물론 그 생각을 모를 제드야, 어이가 없어했지만.
-세상에, 이게 좋다고요?
어휴휴, 하며 보이지 않는 고갯짓까지 하는 제드를 보며, 룬은 어깨를 으쓱였다.
“응. 두고 보면 알 거야.”
그때, 크리스티나가 응접실에 들어왔다.
“아멜리아 일가가 곧 올 거란다. 마중을 함께 해주겠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들 얼굴을 한번 씩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모인 건 룬이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응, 좋아.”
그렇게 향한 곳은, 거대한 호수크기의 크라켄을 키우는 장소였다.
촤악!
크라켄이 수영장에서 신나게 바닷물을 철퍽거리더니, 크리스티나와 다른 일행들이 오자 스르륵 바닷속으로 잠겨들었다.
이내, 워프홀 너머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본 룬이 생각했다.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 사나 했더니, 워프홀이 연결 된 장소가 아멜리아 일가 영역이었던 모양이군.’
덕분에 룬이 선물한 크라켄도 자유롭게 잘 살고 있었던 셈이다.
잠시 기다리자 워프홀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물쌀이 소용돌이치며 워프홀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파도가 일어나더니 마치 터널 모양으로 휘었다.
거대한 물이 소용돌이치며 만든 통로.
거기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물 덩어리를 타고 이국적인 복식을 입은 아멜리아 일가가 다가왔다.
얼핏 인간처럼 생겼지만 아가미처럼 생긴 귀와 얇은 물갈퀴가 달린 손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세 명은 바닷물을 타고 레어의 땅을 밟았다.
“오랜만이로군. 크리스티나.”
먼저 입을 연 푸른 긴 머리와 남색 눈을 한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볼가. 나탈리아. 그리고 아멜리아.”
크리스티나가 인사를 받았다.
이어, 아멜리아도 최대한 의젓하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크리스티나 님.”
아멜리아의 엄마로 보이는 연하늘 빛 머리를 가진 여성체가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였다.
물의 일족은 푸른빛이 밝기를 달리하며 하늘과, 바다, 그리고 호수.
세 가지 분위기로 표현 된 듯 했다.
성격은 다소 예민해 보이지만, 섬세한 얼굴을 지닌 자들이었다.
부모님과 나들이 온 것이 좋았던지, 긴장했으면서도 설레는 표정이던 아멜리아가 룬과 눈을 마주쳤다.
“……!”
물빛 머리 소녀는, 입모양으로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인사를 받은 룬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볼가와 나탈리아에게 고개를 들어보였다.
“어, 엄마. 아빠. 이쪽이 룬……이에요. 블랙 드래곤의 후예이자, 어둠 이, 일족의 예비 장로예요.”
이어 아멜리아가 페르디키온과 흑미, 듀라한과 제드, 백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룬 입니다.”
“페르디키온입니다. 물의 일족 장로, 볼가 님과 나탈리아 님을 뵙습니다.”
이어서 여우귀를 쫑긋거린 흑미도 밝게 인사했다.
“저는 흑미예요! 반갑숩니다!”
절그럭!
듀라한도 자신의 방식대로 인사를 했다.
그 중, 볼가의 호기심어린 짙은 남색 시선이 룬을 향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군. 그래, 내 입안에 사탕이며 과자를 쏟아부어대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말이다.”
말만 들으면 농담 같겠지만, 그 일은 버거워하던 어둠 일족의 저주 능력에서 해방된 때를 말했다.
그 뒤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당시 곪았던 성체 드래곤의 표피는 룬도 기억하고 있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쾌차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직 다 낫지 않은 피부가 긴 옷 안에 숨겨져 있겠지만,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건 틀림없을 터였다.
남성체인 아멜리아의 아버지, 볼가가 팔짱을 꼈다.
“흠, 아멜리아에게 종종 말은 들었다. 난 물의 일족 장로, 볼가라 한다. 이쪽은 내 반려 나탈리아지.”
비록 겉모습은 인간형에 가깝지만 위압감은 드래곤 성체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심해를 연상케 하는 남색 시선은 유난히 룬을 주시하며 묘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본체였던 이들이 광증에 빠진 상태는 무시무시했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자, 이럴게 아니라 오랜만에 식사라도 하며 이야기 나눠 볼까요? 마침, 여기 있는 룬이 당신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볼가와 나탈리아가 잠시 침묵했다.
심지어 회의적인 시선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마음에 들 거예요. 이 아이가 만든 음식은 물의 일족들의 입맛을 충분히 고려해서 만들었으니까요.”
“어린 해츨링이 우리의 입맛을 고려해 인간의 음식을 만들었다니. 꽤 어려웠을 텐데, 대단하군.”
이체를 띤 볼가가 말하며 룬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좋은 걸
안내를 위해 몸을 돌린 크리스티나가 칭찬을 덧붙였다.
“따로 일러주지 않았는데, 부엌에 있는 재료만 보고 물의 일족들의 입맛을 바로 파악하더군요.”
손을 저어 일족들 몸에 묻은 물기를 말린 볼가가 입을 열었다.
“무척 똑똑하군. 이제 100년 겨우 넘은 해츨링임에도.”
이어, 크리스티나가 가볍게 주변 마력을 흔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력을 다루는 존재.
인위적인 마력의 조종은 이동을 알리는 신호였다.
우웅!
곧, 은은한 빛과 함께 일행들은 즉시 응접실로 이동 되었다.
‘이런 장소였나?’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본 룬.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응접실은 평소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듀라한도 녹빛 안광에 묘한 이체를 품고 주변을 둘러보았고, 제드 역시 입이 근질거리는 기분을 참기 힘들어했다.
“핫! 너무 이뻐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 흑미는 감탄을 터트렸다.
황금빛 샹들리에 위에서 빛의 정령 라이가 작은 빛 알갱이를 은은하게 뿌렸다.
평소 레어에서 뿜어 나오는 빛과 햇살로 밝혔던 응접실.
지금은 아름다운 마력석과 보석.
그윽한 향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생화들이 장식된 연회장으로 바뀌어있었다.
“여기가 아까 그 응접실이란 말이냐……?”
의아하게 중얼거린 페르디키온에게 룬이 답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빛의 레어는 크리스티나의 의지에 따라 변하는 게 가능하댔어.”
물론, 이렇게 대답하는 룬 역시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은 처음이었다.
“자, 앉도록 해요. 이쪽부터 자리를 채우면 된답니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크리스티나가 손을 움직였다.
“앗!”
흑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식탁 위에 룬과 크리스티나가 만든 음식들.
식기들이 저절로 깔렸다.
이 퍼포먼스에 분위기가 절로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마워요. 룬과 제가 정성껏 준비했으니 부디 즐겨주시길.”
크리스티나의 말이 끝나자 음식이 차례로 식탁 위에 올랐다.
한입크기 과일을 새콤하게 절인 전채 요리.
이어 토마토 스프와 시원한 음료.
버터와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통밀빵 바게트.
꽃 모양으로 쫀득하게 떠낸 젤리가 장식된 아이스 셔벗까지.
순서대로 나온 요리 모두 각각의 맛을 뽐냈다.
“맛있다! 그죠, 페르디키온 님.”
“그렇군. 아우님이 솜씨를 발휘한 게 느껴진다.”
그 말대로 맛있고 눈이 즐거워지는 코스요리였다.
문제는 이 뒤인 육류나 생선이 나와야 하는 타이밍.
본래라면 고기나 생선으로 된 요리가 나와야 하지만, 물의 일족은 그 두 가지를 먹지 않는다.
이 순서를 생략할 지도 모른다 여긴 아멜리아의 부모룡들.
하지만 그 예상과 달리, 고급스러운 접시에 스테이크가 담겨 그들 앞에 대접 되었다.
“……!”
갈빛 소스에 선명한 그릴자국이 돋보이는 햄버그 스테이크.
아무리 봐도 육류를 사용한 요리였다.
“아, 앗.”
저도 모르게 당황스러운 소리를 낸 아멜리아.
육류를 먹지 않는 다른 걸 아는 크리스티나와 룬이 대놓고 고기 요리를 내놓자, 물빛 소녀가 부모룡들을 돌아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아멜리아는 그녀의 부모용들이 곤란해 한다는 걸 눈치챘다.
‘아, 역시 난처해 하셔. 어떻게 해?’
초조한 생각을 하며 아멜리아가 다시 스테이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육류는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무척 낯선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녀뿐이라면 먹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아멜리아의 부모룡이 함께 하는 자리.
그리고, 아멜리아의 부모들은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큼, 이건 먹기 어렵겠군.”
결국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볼가.
“그러게요…….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지…….”
거기에, 차분히 눈썹을 내리깐 나탈리아까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동의했다.
그때 룬이 입을 열었다.
“이건 콩으로 만든 고기라서, 드셔도 돼요.”
룬의 말에 물의 일족들이 모두 룬을 바라보았다.
“코, 콩으로…… 고기를 만든 거야?”
아멜리아의 물음에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육류를 섞지 않고 버섯이나 현미가루, 견과류 같은 걸 넣어 만든 거야.”
눈을 깜빡이며 놀란 아멜리아가 다시 스테이크를 바라보았다.
“이게 그럼…… 콩이란 말이냐?”
제 아우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페르디키온이 새삼스럽게 스테이크를 노려보았다.
“어머…… 저 말이 사실인가요? 크리스티나.”
차가운 물색의 머리카락을 흔들며 나탈리아가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크리스티나가 빙긋 웃어보였다.
“물론이랍니다. 저도 옆에서 이 아이가 만드는 과정을 보았어요. 믿고 드셔도 괜찮습니다.”
이어, 충분히 신뢰하고 먹을 수 있도록 크리스티나가 제조 과정까지 자세히 일러주었다.
한편 흑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락없이 고기 질감인 스테이크를 포크로 눌러보았다.
“와, 이게 콩이에요? 그럼 여기 작은 고기도요?”
흑미는 스테이크 앞에 추가로 쌓인 불고기와 소시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바비큐용으로 만든 콩고기랑 콩소시지야.”
룬의 말에 흑미가 입을 벌리더니 웃었다.
“신기해요! 흑미 먹어봐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