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242)

마침 샐러드와 과일이 올려진 디저트가 나왔다.

룬은 여유롭게 빛깔 좋은 딸기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긴장한 기색이 보이는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뭐라 하려고 물은 거 아니야. 그냥, 궁금했어. 인어족을 골랐을 이유가.”

“으응? 그, 그거라면 말야.”

왠지 머쓱한 눈치로 아멜리아가 시선을 대각선으로 내렸다.

“내, 내가…… 가장 처음 생각, 해낸…… 거였어. 호, 혹시 지나가던 인어족이 우, 우릴 발견하지…… 않을까. 알아보려면 그들과 같…… 은 모습인 편이, 훨씬 좋겠지? 라고.”

인어족 모습이 된 건 결국 구조신호였다는 말이었다.

그걸 스스로 생각해 내었다고 웃고 있다니.

흑미가 껍질이 잘 까진 오렌지를 먹다가, 그 말을 듣고 눈매를 울적하게 바꾸었다.

“힝! 언니, 그 말은 뭔가 슬퍼요.”

“그, 그래? 난…… 자, 잘했던 일 같아서…… 슬퍼하지 말아, 흑미야…….”

듣고 있던 페르디키온조차 쳇, 하고 사과음료를 쭉 마셨다.

컵을 내려놓은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그럴수록 더욱 다부지게 마음먹어야 하는 법이다. 나약하게 부러져 버린다면 제 뜻 한번 펼치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니.”

“저건 칭찬이야, 형 나름의.”

룬은 작은 목소리로 화룡족 소년의 말을 해석해 주었다.

필시 다 들렸을 텐데도, 페르디키온은 모른 척 커피 맛이 입혀진 땅콩을 하나 더 집어먹었다.

“으, 응.”

살짝 미소 지은 아멜리아도 땅콩을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왁자지껄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애들끼리라 가능한 일인지도.’

충분히 잠을 자고, 스스로 물의 레어를 다독여 보여 조금씩이나마 자리를 찾아간 아멜리아.

분명 어려운 일도 많았을 터인데, 대화하는 내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를 느낀 건지, 페르디키온 역시 드물게 칭찬의 말을 이었다.

“자만하지 마라. 이제 겨우 남들과 같은 위치에 선 것뿐.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려 노력해야만 하니.”

분위기가 워낙 괜찮았던 덕인지, 이제까지 입을 봉인하고 있던 제드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페르디키온 님두 참. 이럴 땐 잘했다구 하시면 될 걸 말입죠. 맨날 노력 노오력만 하라 그러시니. 거, 매번 힘만 내다간 지친다구요?

그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콧방귀를 뀌었다.

“룬, 저 건방진 녀석에게 몸이 생기면 내게 보내라. 아주 말 잘 듣는 녀석으로 만들어주지.”

-어이쿠! 무셔라. 설마 룬님, 저를 또 버리시는 건 아니시겠쥬?

제드의 깐족거림에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고약해졌다.

룬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 내가 진짜 보내버리면 어쩌려고.’

아무리 에고웨폰이 되었다지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 틀림없었다.

“안 해. 안 줘. 둘 다 진정해.”

제드와 페르디키온의 신경전 사이에 낀 룬이 제지했다.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가 작게 키득거렸다.

“쿠후후.”

“삐약?”

부리로 과일을 쪼아먹던 새가 아멜리아를 보며 작게 울었다.

묘하게 간지러운 분위기에 룬이 눈 앞에 보인 접시를 내밀었다.

“그만하고 이거나 먹어 봐.”

마침 다음으로 식탁위에 오른 간식을 본 페르디키온이 알은체를 해왔다.

“그거 아니냐. 꿀과 버터를 바른 감자칩.”

“응. 우리끼리 먹으려고 따로 만들어뒀어.”

감자를 슬라이스 해서 만든 구운 과자.

다른 요리들과 겉보기로는 크게 위화감은 없으면서도, 아이들끼리 먹을 간식으로 딱 좋았다.

그때 제드가 반가운 듯 말했다.

-이야! 이 감자칩 정말 간만이네요. 한때 이걸 먹고 맛있어서 눈 튀어나올 뻔한 적이 있었는데. 저희 드워프들 사이에서 유행 좀 탔죠.

맛이 상상되는지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는 제드.

-요 감자칩이, 입에 와앙 쌓아넣고 와작와작 씹어먹으면 다들 부러운 듯 쳐다봤거든요! 캬, 당시에 제가 정말 잘 나가긴 했죠.

어쩌다보니 룬과 합류하게 되어 감자칩을 제공받았던 제드.

당시에 유난히 감자칩을 잘 털어가더니, 저런 짓을 했던 모양이다.

‘나야 감자로 소생 수련을 했으니 상관 없다만, 저런 식으로 써먹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저렇게 삶을 재밌게 살던 녀석이 몸이 없으니 힘들만도 했다.

룬은 얼른 제드의 몸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야겠다 생각했다.

‘재료는 다 모았으니, 만들기만 하면 되고.’

흠, 하고 머릿속으로 제작 설계도를 그려본 룬.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가능했다.

‘다만 제드 녀석이 좀 아플 텐데, 이건 뭐…… 어쩔 수 없다만.’

룬은 측은한 눈으로 여전히 드래곤들에게 깐족거리고 있는 배틀 액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즐기게 냅두자.’

지금 실컷 즐기고 웃어둬야 고문 같은 시간을 견뎌낼 터.

룬은 조용히 감자칩을 입에 밀어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포도주향을 풍기며 돌아간 아멜리아 일가.

페르디키온은 흑미가 불의 정령들 훈련시키는 걸 감독하러 가기로 했다.

백야는 흑미를 따라나갔고, 듀라한은 다시 검은 방으로 가서 대기했다.

룬은 결심했던 계획에 대해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크리스티나. 오늘 제드의 몸을 만들어줄까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물론이란다. 하지만 정말 괜찮겠니? 어둠 일족의 힘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네가 너무 어려 걱정이구나.”

단순히 어둠을 휘두르는 일이라면 상관 없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아주 정교한 감각이 필요한 일.

그녀의 걱정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룬은 담담히 대답해주었다.

“그냥 의지대로 움직일 걸 붙여주는 거니까. 괜찮아.”

크리스티나의 축복마법을 깔고 가는데다, 시험적으로 만든 걸 시착해보는 느낌으로 진행될 터.

‘그래도 쉽다고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어렵다는 거지 불가능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

크리스티나가 직접 짜 준 마법진에 천천히 마력을 넣은 룬.

그의 옆에는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단상이 있고, 위에 불사조의 깃털과 힘, 필요한 시료가 차곡차곡 나열되어있었다.

이를 위해 백야의 털이 홀랑홀랑 털렸지만, 다행히 전보다는 수월하게 깃을 내놓은 백야.

만약을 위해 근처에서 구경하기로 한 페르디키온과 흑미와 함께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척척!

룬이 신호하자, 듀라한이 배틀 액스, 파라리엄을 들고 단상으로 향했다.

철컥!

철컥!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듀라한은 수평으로 든 배틀액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제드가 들뜬 어조로 듀라한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라고, 친구! 잘될 거라니까? 내 감이 꽤 좋은 편이거든!

그 말을 들은 듀라한이 녹빛 안광을 빛냈다.

그간 정이라도 들었는지, 검은 갑옷기사는 한 차례 꾸욱, 무기 손잡이를 힘주어 쥐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단상에 내려놓고 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얼핏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자신이 평생 함께 해 온 검을 맡기는 기사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뀨.”

[제드. 준비됐지?]

해츨링 모습으로 돌아간 룬이 말했다.

-옙!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제드에게 눈이 있다면 초롱초롱 빛이 났을 것이다.

제드 부활!

꿈에 한껏 부푼 제드.

그는 곧 이어질 고통을 전혀 모른 채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몸이 생기면 해 볼 게 많다구요! 술과 맛있는 음식들도 먹어보고, 세계수도 살피고, 실험해보고 싶은 것도 한 가득이죠. 이런 제 마음, 룬 님은 다 아시죠?!

“뀨우.”

[모르기도 힘들겠더라.]

룬은 적당히 대답해 주며 점검을 마쳤다.

-그뿐인가요? 마음껏 다니며 대화도 실컷 해야지요! 크흑, 말은 안 했지만 이 제드, 그간 신경도 안 썼던 오감이 살아있는 기분이 감사할 지경이었달까요? 뭐 잡히는 거 없이 살려니 이게 진짜 죽겠더라고요.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은 먼발치에 있어 들리지 않았다.

제드의 인생수업은 룬만 앞에 둔 채 진행 중이었다.

평소라면 끝없는 제드의 수다에 지쳐 한 마디 했을 룬.

하지만 룬은 ‘그래그래’ 하고 대꾸까지 하며 묘하게 친절한 배려를 해 주었다.

“뀨뀨.”

[준비 다 됐다. 이 뒤 이야기는 일단 무사히 잘 버티고 보자.]

쭈욱!

-꺄우우우우!

곧이어, 제드의 비명이 터졌다.

-크하하하학! 끄억! 아이고, 아이고 제드 죽는다!

한데, 그 비명이 촐싹 맞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정말 괴로운지 제드는 날것의 감상을 그대로 떠들었다.

-으히히학학! 끄어어어억! 아프든지 간지럽든지 하나만 해달라구요오!

처절한 제드의 애원과 달리 검은 어둠과 밝은 황금빛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불의 기운이 활력을 더했다.

-아 뜨겅! 제드 탄다아아!! 끄우와아아!

입이 있다면 침을 튀겨대지 않았을까.

룬은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리고 마르지 않는 물의 기운이 흐르도록 했다.

-커커컥! 으억 차구워!! 제련할 때 망치질 당하는 금속들이 딱 이렇겠네요오!

엄살도 있겠지만, 구워지고 삶아지는 느낌은 진짜일 터였다.

“뀨.”

[거의 다 왔어.]

이쯤 되면 제드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으나, 룬은 가차 없었다.

제드는 혼미해지기 시작했는지 아무 말을 해대고 있었다.

-끄아으아으아으어! 아니 룬 님, 혹시 아까 페르디키온 님하고 쬐끔 수다 떨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아아!

그럴 리가 있겠냐.

정작 듣고 있는 룬은 그야말로 귀청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룬은 침착하게 숲의 생장의 기운을 밀어넣었다.

“뀨욱.”

[마지막이야. 버텨.]

-끄, 끄오오오오오오옵!

제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버텨냈다.

그리고.

번쩍!

뒤에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이들조차 눈을 감을 만치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꿈틀!

거대한 그림자가 구름너머에서 움직였다.

“끄아아!”

팔과 다리가 끼익 거리며 몸을 일으킨 우람한 그림자.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숨을 삼켰을 만치 위용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검은 그림자가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내가 부활했다!”

두둥!

검은 방을 울린 제드의 야망이 담긴 선언!

그리고 구름이 걷혔다.

……놀랍게도 그림자의 정체는, 작은 드워프 난쟁이 인형이었다.

“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제드가 눈을 끔뻑였다.

“오잉?”

자신의 손과 팔, 다리, 몸을 돌려본 제드가 나무 입을 크게 벌렸다.

“이게 뭐시당까요!?”

다가가각!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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