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과 다른 수업을 듣게 되어도 흑미가 침울해질 일은 없을 터.
목적을 달성한 룬은 남은 캐비지롤을 비웠다.
페르디키온은 여전히 조금씩 놀려댔지만, 흑미는 귀나 꼬리를 뾰족하게 세우곤 하며 메롱, 하고 혀를 쏙 내밀었다.
룬이야 흑미에게 적당히 수업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다가왔다.
“얘들아! 식사는 잘 했니?”
“삐약!”
설탕 공예로 만들어진 꽃을 쪼던 백야가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이 대답하는 사이, 또 다른 설탕공예 꽃을 쪼아먹기 시작했다.
‘그 동안 자라서 그런가. 점점 더 잘 먹네.’
당최 먹을 걸 가리지 않고 잘도 먹는 새였다.
어찌나 잘 먹는지 위장이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불사조 새끼여서 마력이 담긴 음식은 좋은 양분이 되는 모양이다만.’
이걸 알지 못했던 때는 새고기를 줘도 되는가에 대해 흑미와 이야기도 해봤다.
당시를 떠올린 룬은 저도 모르게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알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모르면 의외로 당황스럽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던 룬은 식기를 정리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자, 그럼 간단히 설명해 줄게.”
딱!
크리스티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식탁위의 음식과 접시 따위가 모두 사라졌다.
대신 새 접시에 가벼운 과자와 디저트용 케이크, 레몬 마들렌이 담겨 나왔다.
음료는 우유병, 다양한 과일주스 병, 시원한 각 얼음이 담긴 상자가 2명에 한 세트 꼴로 자리했다.
“수업은 각자의 재량에 맞도록 분배했단다. 다만, 나 혼자 수업을 하려다보니 고민스러운 부분도 있더구나.”
“뭔데? 크리스티나.”
룬의 물음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흔든 그녀가 허공에 빛의 마력으로 문자를 띄웠다.
-인간 사회와 문화 이해
-대륙 정세와 귀족 예법
-인간의 마법
-종족별 역사
-체력 단련
-수학과 음악
-신학과 고대언어
.
.
.
이 외에도 다양한 수업이 주르르 나열되었다.
“오잉. 인간 사회와 문화라면 이 제드가 좀 빠삭하죠. 이래뵈도 대륙을 주름 잡는 ‘머스킷 상회’ 주인이었다구요? 저는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그 순간, 룬은 크리스티나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인다고 느꼈다.
“어머나, 그럼 제드. 조금 후에 나와 상담 좀 해볼까?”
“으억?”
위험한 느낌을 받은 제드가 몸을 흠칫 굳혔다.
룬이야 가끔 무섭긴 해도 아직 해츨링이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주시는 그 자체로 살떨리는 구석이 있었다.
단순한 성체의 위압감에, 삶의 밀도에서 나오는 묵직함이 있었다.
“제드, 가르침을 주거나 받는 일에 귀천이 없는법이야.”
다른 이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룬은 직감했다.
그녀가 제드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 하나 뿐 이라고.
그리고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걸 지금 눈 앞에서 확인하게 된 셈이다.
***
회상을 끝낸 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제 실실 웃으면서 눈을 수상쩍게 뜨고 힐끔거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을지도.’
어째 들어오기 전에 크리스티나가 ‘선생님께는 존댓말을 써야해요.’라는 기본적인 이야기를 할 때 느낌이 오더라니.
그때, 아멜리아가 머뭇거리더니 살짝 손을 들었다.
“음…… 저, 제드…… 선생님. 무,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예이! 아멜리아 님. 질문하십시오!”
의장처럼 손을 흔드는 제드에게, 물빛 소녀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왜…… 그, 그렇게 작으신가요?”
한 방 먹었네
아직 사정을 모르는 아멜리아의 물음에 흑미가 눈을 반짝였다.
설명해주고 싶은 눈치였으나, 꼬리가 신나게 흔들리는 것과 달리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룬은 수업 전에 흑미에게 따로 당부했던 일을 떠올렸다.
-흑미, 수업 들어가면 우다다다, 라던가 수다를 떨면 안 돼.
흑미는 이해하기 힘든 눈치였다.
-진짜요? 다들 심심하지 않아요?
-그런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룬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짧은 고민 후, 말을 덧붙였다.
-함께 뛰거나 수다를 떠는 것 보다, 배우는 걸 더 원하는 이들이 모인 자리니까. 너도 배우려고 여기 온 거잖아?
-앗, 맞아요. 흑미도 많이 배우고 싶어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준 룬이 흐름을 이었다.
-그럼 배워야 할 내용을 잘 들어야 너도 잘 알 수 있겠지. 그래서야.
수긍한 눈치로, 흑미가 분홍빛 눈을 반짝였다.
-아항! 그럼 흑미, 엄청엄청 조용히 할게요!
-그래.
회상을 마친 룬이 다시 흑미를 바라보았다.
그 당부를 기억하고 용케 잘도 참고 있는 흑미.
눈이 마주치자, ‘흑미 잘하구 있어요!’ 라며 입 모양으로 빠끔거린다.
‘잘 참고있네.’
가만히 있는 게 어색할 테지만 뛰어 노는 학습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노릇.
나중에 칭찬해 주어야겠다 생각하며, 룬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크흐흡!”
그때, 갑자기 입을 틀어막은 제드가 거짓으로 눈물 쏟는 시늉을 했다.
룬이 불길함을 감지했다.
‘안 좋은데.’
직감이었다.
가만히 두면 일장연설과 눈물 콧물을 쏟으며 난쟁이 나무 인형이 된 썰을 푸느라 시간 다 가리라는.
무어라 하려던 제드보다 빠르게, 룬이 먼저 선수를 쳤다.
“진도 나가, 요. 제드 선생님.”
“어, 험험. 알겠습니다.”
지그시 노려본 룬과 시선이 마주친 제드가 냉큼 헛기침을 했다.
룬 옆자리에 앉은 페르디키온은 별 말 하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에게 뭔가 듣고 온 건지 꽤 조용했다.
제드가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옙! 다시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드 머스킷. 현재 대륙에서 잘 나가는 머스킷 상회 창업주이자, 타 종족인 드워프를 인간계에 정착시켜온 드워프였던 자입죠.”
해츨링들과 흑미의 시선이 모이자, 난쟁이 인형 제드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작은 큽! 아, 압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주세요 룬 님. 아무튼.”
숨을 다시 들이켠 제드가 단숨에 말을 뱉어냈다.
“저는 인간 외 종족인 드워프로서, 인간 문화에 섞이기 위해. 그리고 드워프 종족과 인간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늘 고민했더랬지요.”
‘호오.’
룬은 제드의 말을 경청했다.
생각보다 더 제대로 된 이유가 나왔기 때문이다.
제드는 탐욕스러웠기에 대성한 드워프.
성공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 중, 인간을 파악하는 데엔 도가 틀 수 밖에 없는 자였다.
제드가 말을 이었다.
“해서, 크리스티나 님께서 특별히! 이 제드에게 인간, 엘프 등 다른 종족에게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한 처세술 수업을 맡기신 거랍니다!”
말을 마친 제드는 오른손을 입가에 세우고 아멜리아는 보며 속삭였다.
“작아진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아멜리아 님.”
……소곤거린다고 안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룬은 제드가 말한 이유들이 꽤 타당하다 여겼다.
‘하긴, 저 녀석이라면 서적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도 알려줄 수는 있겠지.’
룬이 도움을 주긴 했으나, 제드가 머스킷 상회 창업자로서 업적을 세운 건 드워프들과 제드의 실력.
심지어 상행으로 사회적인 활동은 꽤 많았다.
현실적인 이야기.
그리고, 이론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애매한 것들을 가르쳐주기엔 제법 괜찮았다.
사정을 파악한 룬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래도, 크리스티나가 이걸 용케 허락해 주었네. 신수가 그러기 쉽지 않은 법인데.’
아무리 타당하다 해도, 가르치는 자의 본질은 드워프.
심지어 어린 해츨링의 권속이었다.
어제 저녁식사 자리에서야 상담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 본질은 자질 심사였을 터.
그 결과 교육에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기까지 무척 신중했을 것이다.
‘드워프에게 해츨링의 교육을 맡기겠다고 결단을 내릴 수 있다니.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룬 역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룬이 손을 들었다.
“제드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넵! 룬 님. 질문 해주세요.”
손을 내린 룬이 태연히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가 뭐라고 하면서 이 일을 맡겼는지가 궁금한데, 요.”
그러자 제드가 흐흐,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룬 님, 지금 저에게 존대를 쓰는 게 참 어렵지요?”
“…….”
사실이었으므로, 룬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미 아시겠지만, 대륙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종족은 ‘인간’이랍니다. 그들은 대개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어 룬 님이 보기에 참 하찮아 보일 수 있지요.”
나무인형에게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일까.
룬은 제드가 어떤 종족에 국한되지 않는 시선으로 이야기 한다고 느꼈다.
난쟁이 인형이 척! 하고 왼쪽 손을 펴 자신을 향했다.
“마치, 이 ‘제드’처럼요.”
“!”
룬은 이어질 말을 짐작하고 묘한 미소를 흘렸다.
‘한 방 먹었네.’
그런 룬을 본 제드가 마주 웃었다.
“짐작하신 듯하네요. 맞습니다. 저는 그런 ‘인간’ 대신입죠. 물론 영 안 맞는다면 반말을 쓰셔도 상관없답니다. 대륙의 문화 중 ‘계급’이란 걸 이용하면 되거든요.”
인간이 갑을 관계로 태도가 달라지는 건 룬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집중하기 시작한 아멜리아를 위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귀족 행세죠. 그게 아니어도 방법은 여럿 있긴 합니다만.”
평소 흥 넘치는 드워프 제드.
하지만 아멜리아가 집중하자 덩달아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구석을 갖추었다.
“페르디키온 님께서 과업을 수행하시는 길에 가장 많이 만나는 건 인간일 겁니다. 그들은 겉모습을 속이며 살아가기 어렵죠.”
손을 마주 잡은 제드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상대 인간보다 나이 든 모습이면 모를까, 반대의 상황에서는 외모 따라, 계급 따라, 때론 세력이나 상황에 따라 ‘존대’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죠.”
찡긋.
윙크를 날린 제드가 사족을 추가했다.
“이 제드가 고걸 잘해서 비즈니스를 매번 성사시켰지요!”
그 말에 흑미가 엄지를 척 치켜올렸다.
“멋지다, 제드 아저, 아니 선생님!”
“엣헴!”
흑미의 칭찬에 의기양양해진 제드는 수업을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양피지 위에 글씨를 적어내려갔다.
흑미는 제 글씨가 삐뚤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흑미야. 이, 이렇……게 하는 거야. 힘을 너무 주, 주면…… 오히려 글씨 망가져.”
옆에 앉아있던 아멜리아가 흑미의 손을 잡고 글씨 쓰는 걸 도와주었다.
“이렇게요?”
페르디키온은 필기는 거의 하지 않고 설명만 듣고 있었다.
“형은 안 써?”
“이미 아는 내용을 굳이 쓸 필요 없다.”
“그렇구나.”
룬은 잠시 고민하다, 깃펜을 집어들었다.
‘생각해보니, 글자를 제대로 써 본 적은 없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