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242)

마음의 정진을 위해 정갈한 자세로 붓글씨를 써보는 것도 수련의 하나.

도구는 다르지만, 룬은 깃펫에 전달되는 힘을 가늠하며 사각사각 글씨를 적어내려갔다.

틈틈이 페르디키온이 툭툭 던지듯 조언을 했다.

“좀 더 부드럽게 그리듯이 움직이면 훨씬 좋아질 거다.”

“해볼게.”

확실히 그 말대로 글자를 써보니 훨씬 나았다.

이날은 첫 수업이기에, 수업의 진도 보다는 전반적인 개괄 설명으로 시간을 보냈다.

“수업 끝났습니다! 다음 수업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요!”

활기찬 나무인형의 인사에 흑미가 한 손을 흔들었다.

“제드 선생님 안녀엉!”

“고, 고마웠어……요.”

아멜리아는 첫 수업이 너무 긴장되었던지, 후아. 하고 숨을 몰아쉬며 다음 시간 일정을 확인했다.

룬 역시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참, 룬 님은 잠시만 남아주세요.”

“?”

그 말에 룬은 의아한 시선을 제드에게 던졌다.

수업 내내 필기구 한번 꺼내지 않았던 페르디키온도 제드를 돌아보았다.

“잠깐이면 됩니다, 진짜. 요오만큼만.”

눈을 찡그리며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작게 모은 제드.

응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기에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 형. 금방 따라갈게.”

“알겠다. 크리스티나 님께 네가 조금 늦게 온다고 말 해두지.”

다음 수업은 격투수업으로, 크리스티나가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무, 무슨 일인지 몰……라도, 괜찮을 거……야.”

“그럼요! 룬 님은 다 잘하는걸요!”

듀라한에게 격투 수업을 받는 아멜리아와 흑미.

둘은 응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인데, 요?”

혼자 남은 룬이 말했다.

그러자, 제드가 쾌활하게 웃었다.

“아이구! 수업 끝났을 때는 평소처럼 해 주시면 됩니다. 어색해서 힘드셨죠?”

“조금은.”

룬은 자기도 모르게 얕게 한숨을 쉬었다.

시작은 참 좋았는데, 중간중간 묘한 깐족거림 섞인 수업을 진행하는 걸 몇 번 노려보기만 하려니, 꽤나 답답했던 탓이다.

“용건이 뭐야, 제드?”

“별건 아니고요, 룬 님.”

유쾌한 얼굴이던 제드의 눈이 제법 진지해졌다.

“흠, 그러니까, 왜 이렇게 느껴지는 건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

제드는 뭔가 아리까리한 느낌인지 엄지와 검지로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 꺼내기를 망설였다.

결국 룬이 은근히 재촉했다.

“나 다음 수업 가야 해.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말하든가.”

“아, 아니! 아닙니다요. 그냥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렇죠.”

황급히 양 손을 젓던 제드가 어, 하고 운을 떼었다.

“이게 제 감이라 정확히 말하기 뭐한데, 혹시 제가 진행한 것과 비슷한 수업을 많이 받아보셨어요?”

“……그건 왜.”

룬은 내심 걸리는 게 있었으나, 침착하게 질문을 되돌렸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제드는 고개를 좌우로 한 차례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몸이 바뀌어서 그런가? 당최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무슨 느낌인데?”

제드에게 이상한 점이 보였다면, 이는 크리스티나에게도 그럴 확률이 있었다.

“제가 아는 룬 님은 크리스티나 님의 레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해츨링이시거든요. 그렇죠?”

“그렇지.”

룬이 긍정하자, 제드가 생각을 줄줄이 나열했다.

“페르디키온 님이야 이미 인간들 문화를 아실 만도 하죠. 한데 인간 한번 본 적 없는 룬 님의 눈을 보는데, 비슷한 게 느껴졌달까요?”

제드가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리키더니 눈을 치떴다.

“마치 ‘난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하고 들어볼까.’ 하는 눈이었습죠. 계속 그런 건 아니셨지만요.”

“내가?”

룬의 되물음에, 제드가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물론 이렇게까지 눈을 뜨셨단 건 아니지만요. 그냥 묘했다는 겁니다. 아 이게 참, 설명하려니 어렵네요.”

오른손 검지만 치켜든 제드가 손가락을 흔들며 재차 입을 열었다.

“룬 님 나이는 저랑 비슷하시죠. 그런데 까마득히 오래된 인생 선배 같은 눈이라니? 와우. 이 제드가 이제 감을 다 잃었나 싶었지 뭡니까요.”

“…….”

예리했다.

좋은 걸 줄게

짧은 순간.

룬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사실 크리스티나에게 따로 교육을 받은 건 있어.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라.”

제드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아하! 과연, 그런 거라면 이 제드가 착각할 만도 했네요!”

손을 비비던 제드가 하하,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상행을 하다 보니, 상대를 잘 모르면 엉뚱한 말을 꺼내게 된다는 걸 많이 경험했거든요. 그래서 괜한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요.”

룬은 시치미를 뚝 떼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헛기침을 한 제드가 호들갑을 떨며 손을 흔들었다.

“그으으으, 룬 님. 혹시라도 이 제드가 엄한 소릴 한다고 불쾌하셨던 건 아니시죠?”

룬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겉보기에 룬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차분한 부정에 제드는 안심한 듯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됐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제가 아는 꿀 정보 많이 전해드릴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주십쇼!”

고개를 끄덕인 룬도 부탁을 남겼다.

“그래. 너도 내가 크리스티나에게 선행 수업을 들은 건 티가 나지 않게 해줘.”

“여부 있겠습니까요? 제가 한 번 다짐하면 입 참 무겁습니다. 장사는 신용이니까요! 그럼, 다음 수업도 힘 내시구요. 아자아자잣!”

호들갑스럽게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제드.

손을 흔들어 적당히 인사를 받은 룬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며 생각했다.

‘역시 가까이 마주치니 완전히 숨기지 못할 때도 있군.’

크리스티나의 수업을 들으러 가는 동안, 룬은 남몰래 긴장했던 마음을 풀었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아무래도 수업이 면대면 방식인 탓이 크겠지.’

심지어 제드 입장에서는 권속인 그가 룬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

당연히 눈치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말을 해두었으니 앞으로는 괜찮겠지.’

나중에 의심받느니, 따로 만나 설명해 두는 편이 나았다.

룬은 쭈욱 기지개를 펴고는 크리스티나의 격투 수업 장소에 가는 이동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화악!

빛이 사라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늦었구나, 룬.”

상큼한 레몬 같은 미소를 지은 크리스티나가 룬을 맞이해주었다.

레더 아머를 입고 있는 그녀에게서는 싱싱하고 맑은 풀과 이슬 향이 풍겼다.

그리고, 흙바닥에 처박히다 시피 뒹구는 화룡족 소년이 하나.

“……형?”

“큭.”

룬은 쓰러져있는 페르디키온을 보고 어깨를 굳혔다.

‘설마.’

날 좋은 야외에서 진행되는 격투 수업.

크리스티나의 회복 마법이 화룡족 소년에게 발현되고 있었다.

“오랜만이라지만 느슨해졌구나, 펠.”

그렇게 말한 크리스티나가 가볍게 금발을 쓸어 넘기자, 몇 가닥 풀잎이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크윽!”

몸이 회복 된 페르디키온이 상체를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룬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자마자 바닥 굴렀냐.’

첫 수업부터 바닥에 처박힌 저 모습.

룬은 그 현실이 자신의 미래가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룬이 왔으니, 진짜 수업을 시작해보자꾸나. 너희가 알차게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해 줄게.”

움찔!

화룡속 소년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룬은 페르디키온이 저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크리스티나가 말을 덧붙였다.

“마법에 모든 걸 의존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데에 제약이 있단다. 대륙에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의외로 많거든.”

룬은 예전 레드 드래곤 레어의 <폐광 던전>일을 떠올렸다.

‘그렇군. 저 녀석에겐 예상한 적 없는 특수 상황이었지만, 즉시 검을 사용했지.’

불 관련 능력은 거의 봉인된 상태로 선전했던 페르디키온.

그 후로도 편의상 더 유리하다 여기면 서슴없이 검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룬은 크리스티나의 행보를 추측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무기를 알려주려나.’

전생에서 검과 활 정도는 취미로 해 보았던 그.

여러모로 기대가 됐다.

한편, 크리스티나는 주먹을 쥐어 허리에 두고, 다른 손을 뻗으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자, 가볍게 해보자꾸나.”

크리스티나의 손에서 적당한 크기의 공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 공만으로 너희를 상대할 거란다. 내게서 이 공을 가져갈 수 있다면 합격이야.”

손과 발로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볼로 상대하겠다니.

‘은근 자존심 상하네.’

그렇게 생각한 룬은 숨을 가볍게 다듬었다.

그 사이, 크리스티나가 공을 몇 번 튕기며 말했다.

“자, 한 명이 먼저해도 되고, 둘 다 덤벼봐도 좋아.”

그녀의 검지 손 끝에서 볼이 휘리릭 돌았다.

페르디키온과 룬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슉!

먼저 정면으로 뛰어들어간 페르디키온.

그리고 어둠 속에 기척을 숨긴 룬이 그녀의 시야를 혼란시키며 움직였다.

빡!

“컥!”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정확하게 볼을 던져 페르디키온의 얼굴을 가격하고, 튕겨나온 볼을 발로 차 룬이 숨어있던 그림자를 향해 날렸다.

쐐애액!

쾅!

땅이 파였다.

자욱한 흙먼지가 옅어지자 드러난 땅은, 대포알이 떨어졌나 싶을 정도였다.

만약 룬이 그대로 있었다면.

혹은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가차 없네.’

아슬아슬하게 피한 룬이 옷깃을 들어보았다.

‘옷깃도 상했고.’

공의 빠른 속도와 마찰 때문에 스친 옷이 찢기기 직전이었다.

“크리스티나. 가볍게 한다더니 너무 센 거 아냐?”

룬의 투덜거림 같은 말에 크리스티나의 말이 들려왔다.

“당연히 피하리라 생각했단다. 이 작전은 너무 뻔했어. 한 명은 시야를 잡아두고, 다른 하나는 기습이라니.”

탁!

한 손으로 드리블 하던 크리스티나가 볼을 손으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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