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뻔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정석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단다.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는 거지.”
그 순간, 흙먼지가 완전히 빠지기 전 페르디키온의 손이 쑥 튀어나왔다.
볼에 손이 닿기 직전.
“그래, 이런 시도도 꽤 좋아.”
크리스티나가 볼을 등 뒤로 돌리고 몸을 물렸다.
기습에 실패한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구겼다.
“쳇! 미안하다, 룬.”
“괜찮아 형.”
불평스레 약한 소리를 하며 크리스티나를 잡아뒀었건만, 이번에도 간파당했다.
“자, 어떻게 할까? 형.”
무릎을 굽히고 허벅지에 양 손을 얹은 룬이 물었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룬에게 다가와 옆에 섰다.
“손도 발도 쓰지 않는 상대에게서 겨우 볼 하나 뺏는 것뿐이다. 설마 우리가 이것도 못 하겠나.”
둘 모두 전투 경험이 있는 해츨링.
특히, 페르디키온이 강맹한 기세를 풍겼다.
빙긋.
크리스티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이 타이밍을 기다린 듯 입을 열었다.
“만약 이 볼을 뺏으면 좋은 걸 줄게. 이 수업 졸업 선물이라 생각해도 좋아.”
“!”
“!”
무려 골드 드래곤 장로의 선언.
이는 거짓이나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럼 오늘 졸업할지도 모르는 건데.”
룬이 담담히 말하며 손목을 돌렸다.
“모르는 게 아니다. 당연히 졸업하는 거지.”
턱을 훔친 페르디키온이 말을 받으며 눈매를 사납게 빛냈다.
***
다음날 아침.
수업에 대한 설레임을 안고 헤엄치던 물빛 소녀는 작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크라켄에게 인사했다.
[안녕.]
부우우우!
거대한 다리를 흔들며 인사한 크라켄을 보며 귀엽다 여긴 인어.
빛이 흔들리는 수면이 보이자, 그녀는 꼬리짓에 박차를 가했다.
촤악!
“후와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인어는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잔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헤엄쳐 땅 위로 올라왔다.
‘어제 수업…… 재미있었지.’
어느 새 하얀 다리로 바꾼 채, 아멜리아는 잠시 천장에서 쏟아지는 볕을 쬐었다.
그녀의 피부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흑미와 함께 한 수업들도 그랬다.
하나같이 그녀의 시간을 반짝반짝하게 만들어주어서, 첫 수업이었음에도 무척 재미있었다.
몸을 일으킨 아멜리아는 걸어가며 어제를 회상했다.
“으음…… 어제 저녁에 함께 모…… 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룬과 페르디키온의 격투 수업은 원래 정해진 식사 시간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혼자 저녁을 먹고 돌아가야할지 고민하던 차, 함께 수업을 들은 흑미가 식사를 같이 해 주었다.
‘오늘은, 다 같이 식사 하면 좋겠는데.’
응접실에 도착하니, 먼저 식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흑미와 백야가 보였다.
아멜리아가 반갑게 인사했다.
“흐, 흑미야. 좋은 아침. 백야도 안녕.”
“아멜리아 언니! 어서 오세요!”
“삐약!”
흑미와 백야에게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은 아멜리아.
그녀는 염려가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어제 둘은 어, 어떻게…… 됐어?”
“룬 님이랑 페르디키온 님이요?”
흑미가 양 손 검지를 세워 눈가에 대고는 쭉 늘였다.
“엄청 피곤해 보였어요. 눈도 이렇게 늘어지구, 힘도 없었구요.”
“저런…….”
아멜리아가 안타까워 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흑미가 말을 덧붙였다.
“흑미가 걱정했더니, 룬 님이 처음 듣는 단어를 알려줬는데…… ‘초주검 상태’ 라고 했어요!”
“!”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뜬 아멜리아.
그리고 아침 식사 시간에 본 둘의 몰골은.
“아……앗! 다들 괘, 괜찮아?”
“뀨우.”
지친 울음소리를 내며 울음소리를 내는 검은 해츨링, 룬.
“캬, 캬악.”
[괘, 괜찮다.]
누가 봐도 퀭한 얼굴로 괜찮다는 소리를 하는 붉은 해츨링, 페르디키온까지.
겉보기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하루를 쉬었음에도 지쳐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 아멜리아가 나란히 앉는 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엄청 힘들었나 봐. 오죽하면 본체화 한 채로 급하게 온 걸까…….’
다들 나란히 자리에 앉자, 식탁에는 저절로 식사가 차려졌다.
맛있는 새 빵의 냄새와 신선한 버터 향.
그리고 부드러운 맛의 감자 수프와 달콤한 호박 수프가 식탁위에 올랐다.
룬은 우유병부터 들고 벌컥 들이켰다.
꿀꺽! 꿀꺽!
탁!
1리터는 되던 우유병이 텅 빈 채 식탁 위에 놓였다.
영양이 풍부했던 우유를 덕분에, 룬은 정신이 든 눈을 하고 아멜리아를 보았다.
“뀨우.”
[이제 살겠다. 어제는 미트볼 하나도 못 먹겠던데.]
후, 하고 숨을 몰아쉰 룬이 루비색 진한 눈을 뜨고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너희 쪽은 수업 괜찮았어?]
“으, 응…… 룬, 너도?”
“뀨뀨.”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룬은 빵을 쥐어 한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나 페르디키온 모두 반나절 이상 크리스티나를 상대했더니, 정신적인 허기가 상당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 어제…… 수업 연장 되었다고 드, 들었어.”
“뀨.”
[……수업.]
그렇게 중얼거린 룬이 페르디키온과 시선을 교환했다.
“뀨뀨뀨뀨.”
“쿠쿠쿠쿠.”
분위기가 다소 이상했다.
두 해츨링은 분명 지쳐 보이지만, 꿍꿍이라도 있는 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뀨우.”
[만족스러웠지.]
“쿠악.”
[그래. 피곤했지만, 성취감이 있어 좋더군.]
그랬다.
둘은 결국 크리스티나의 볼을 건드리는 데에 성공했다.
집념과 승부욕의 결과였다.
“으음, 뭔진 몰라도…… 잘 된 거지?”
“뀨우.”
[그런 셈이야.]
덕분에 원한다면 언제든 졸업해도 된다는 말을 들은 둘.
하지만 누구도 그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모처럼이니 얻을 건 다 얻어야지.’
둘의 협공으로 손과 발을 쓰지 않은 자를 제압도 아닌, 그저 가진 물건을 건드려 본 게 다라니.
적어도 한 명씩 상대했을 때 건드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왠지 크리스티나에게 넘어간 느낌이긴……한데.’
그들이 받은 졸업 선물은, 크리스티나와의 대련 이용권이었다.
비밀입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이용권이 아니었다.
룬은 크리스티나에게 작은 공깃돌을 받은 어제를 떠올렸다.
***
룬은 제 발바닥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불투명한 돌 안에 빛으로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뀨우?”
[이게 뭐야? 크리스티나.]
룬의 물음에 크리스티나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거뒀다.
“아까 말한 상이란다.”
언듯 예쁜 장식물 같은 돌.
참 예뻤지만, 반나절을 바닥에 구르고 승부욕을 태우며 받은 보상이라기엔 다소 김이 식게 만들었다.
그런 룬의 마음도 모르고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인간 모습으로 발차기 한 후, 즉시 본체 모습으로 꼬리치기를 해서 볼을 쳐내다니. 훌륭하더구나.”
분명 칭찬이긴 한데.
까만 해츨링의 얼굴이 갸웃, 기울어졌다.
‘진짜 이거라고?’
황당했다.
졸업 선물이라기엔, 약하지 않은가?
마음만 먹으면 크리스티나와 대련이야 쉬이 할 수 있는 게 바로 룬이었다.
‘이게 낚였다는 건가.’
기대를 하면 실망을 하는 법이라더니.
그런 룬의 마음은 알 바 없다는 듯 돌은 별 같은 반짝임을 흘렸다.
페르디키온도 마찬가지.
그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재차 물었다.
“캬욱.”
[…… 크리스티나 님, 이게 상이라는 겁니까?]
“그렇단다. 볼을 건드린 정도에 잘 어울리는 상이지.”
볼을 건드리는 정도에 어울리는 보상.
그 말을 들은 룬과 페르디키온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이보다 큰 보상을 바란다면 더 수준 높은 수업을 소화해야 한다는 의미군.’
뭔가 아쉬웠다.
크리스티나는 둘의 상태를 귀신같이 눈치 챘다.
“꾀에 넘어가 낭패를 봤다고 여기는 얼굴들이구나.”
“뀨우우.”
“카우우.”
두 해츨링의 볼멘 울음소리가 절로 그녀를 향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쿡쿡 웃은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보렴.”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룬이 들고 있는 돌을 가리켰다.
“사용하면 너희가 어디에 있든, 훈련을 위해서라면 내가 나서주겠다는 약속의 돌이란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니?”
“!”
룬의 눈이 살짝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