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
절로 비늘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권속의 주인인 룬이 이럴 정도면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칫.”
페르디키온은 불을 몸에 두르고 검을 들었다.
아멜리아는 손 끝이 하얗게 되어 그녀의 창인 ‘멜’을 소환했다.
흑미도 긴장된 눈치로 꼬리를 바짝 세우고, 불의 정령을 꺼냈다.
“삼식아, 사식아. 이리로 와.”
쑉!
쑉!
무기를 든 자들은 전방에, 없는 자들은 후방에.
다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룬은 손을 툭툭 털어내며 생각했다.
‘블루 드래곤 레이드 때의 경험덕인가.’
만족스러웠지만, 그걸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쿵!
발걸음을 옮겨오는 듀라한.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마족을 마주했을 때와 닮았어.’
룬의 혼을 탐욕스럽게 원했던 마족. 레파논.
그 마족을 떠올리고 보니, 마기와 어둠을 자유롭게 쓰는 듀라한은 나름대로 균형을 찾은 게 틀림없었다.
뭔가 떠올린 룬이 입을 열었다.
“수업 뭔지 알 것 같아. 듀라한에게서 눈 떼지 말고 들어 봐.”
틈을 보이면 반드시 파고들 터.
모두는 시선이 고정 된 채 룬의 말을 들었다.
“이건 마족, 혹은 그 권속 몬스터를 마주쳤을 때를 위한 훈련이야.”
그 말에 듀라한의 녹빛 안광이 일순 번뜩였다.
“룬 님 이야기가 맞대요.”
“저번 엘프들의 일 탓이군.”
흑미의 말에 호응한 페르디키온이 한층 진지하게 자세를 잡았다.
“응. 그 녀석이 관심을 보였으니, 마족의 권속과 만날 가능성이 있긴 하니까.”
던전, 혹은 특정 장소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몬스터.
그 중에는 마족과 관련된 놈들도 존재할 터였다.
“신경 쓰일 만했지.”
‘그 마족에게 내가 모코지석을 준 걸 알면 분명 뒷목을 잡겠지.’
말을 덧붙인 룬이 시선을 흑미에게 던졌다.
흑미 역시 룬의 권속이자 어둠과 불의 힘을 가졌다.
하지만 그 본체는 마계 속성을 가진 장미.
대항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나도 비장의 무기가 있고 말이지.’
룬이 생각을 마치자, 듀라한이 주먹을 쥔 자세를 풀고 한 손에 새까만 어둠을 담았다.
후욱!
일렁이던 연기가 세로로 섰다.
연기는 서서히 거대한 곤봉 형태로. 그리고 다른 손엔 메이스가 쥐어졌다.
거대한 갑옷 사내는 손잡이를 쥐고 후웅! 후웅! 소리를 내며 양 손을 휘둘렀다.
‘저기에 그냥 맞으면 몸이 으스러지겠지.’
룬은 조용히 그림자를 둘렀다.
전투에 익숙한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다양한 무기까지 대응해야하나.”
그 말에 아멜리아가 난색을 드러냈다.
마기가 주는 압박에, 다양한 무기로 공격해오는 거대한 갑옷 기사까지.
아멜리아 입장에서는 난이도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분일 터였다.
하지만 비장의 무기를 가진 룬은 여유롭게 다른 이들을 살폈다.
‘나야 걱정 없고, 페르디키온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아멜리아였다.
심해에서 아멜리아가 수련한 건 맨손의 듀라한.
심지어 인어 모습인 채였다.
“아멜리아, 할 수 있겠어?”
인어 모습으로 받은 전투 수업도 도움은 되겠지만, 저런 흉흉한 기세를 뿜는 듀라한이라니.
룬의 물음에 아멜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힘, 낼 거야.”
“좋아.”
룬은 아멜리아의 피부가 은은하게 반짝이는 걸 확인했다.
‘똑똑한데?’
그녀는 피부를 긁어오는 마기를 정화의 능력을 이용해 방어하고 있었다.
그 때.
스산한 마기와 어둠이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고 느껴진 순간.
듀라한의 양 손에 들린 둔기가 큼직한 대검으로 바뀌었다.
“?”
다들 의문스러운 눈을 했다.
그리고 듀라한의 손에 쥐인 무기가 바뀌었다.
날카로운 톱이 달린 무기.
다음은 양날 검.
머뭇거리던 아멜리아가 입을 움직였다.
“그, 음. 저 무기들로 계속 변한다는 의미……일까?”
“응. 아마, 보여주는 무기 중 하나로 변할 거라는 의미일거야.”
룬이 대답하는 순간에도 듀라한의 손에는 다양한 무기가 들렸다.
쭉 지켜본 뒤, 룬은 말을 덧붙였다.
“전부 근접 무기이고.”
“아!”
탄성을 터트리며 입가에 손을 올린 아멜리아.
챵!
직후, 듀라한이 양손검을 들고 몸을 날렸다.
너무나 거대한 몸이 빠르게 돌진 해 오자 그 자체로 위압감이 상당했다.
‘흑호랑이처럼 강맹한데, 황소처럼 덩치까지 있으니.’
정면으로 싸워선 승산이 없었다.
“다들 흩어져라!”
페르디키온의 신호에 일행들 모두 산개했다.
“아멜리아 언니!”
듀라한이 물빛 소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제지하려는 흑미의 정령이 불을 뿜었으나, 교묘하게 피한 듀라한.
그리고 한 차례, 발딛음이 울린다.
쾅!
아멜리아에게 쏘아진 검은 기사의 상체가 말도 안 되는 각도로 휘었다.
양 손으로 창을 든 소녀가 즉시 방어에 들어갔지만.
터어엉!
유연하고 과격한 돌진이 그대로 아멜리아를 덮쳤다.
콰앙!
손에 들린 메이스가 창대를 내리쳤다.
“꺅!”
물빛소녀는 이미 몸의 중심을 잃은 상태.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아멜리아가 거대한 갑옷 기사의 손에 목을 잡혔다.
실제 전투였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툭.
아멜리의 목을 한 손으로 쥐었던 듀라한이 힘을 풀었다.
털썩.
“콜록, 콜록!”
졸린 목을 손으로 만지며 잔기침을 뱉는 아멜리아.
“아…….”
고개를 들자, 녹빛 안광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검고 큼직한 듀라한의 검지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으, 응?”
눈가에 눈물이 찔끔 난 아멜리아가 자연스럽게 손끝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듀라한이 가리킨 곳에 왠 푸른 선이 그어져 있었다.
“저, 저 선 안으로……가라는?”
철컹!
검은 투구를 끄덕인 듀라한이 아멜리아를 주시했다.
물빛의 소녀는 당황스러워 하는 눈치였지만, 일어나 푸른 선이 그어진 장소로 움직였다.
지잉!
그러자, 투명한 벽이 생기고 휴식을 위한 의자가 생겼다.
“흑미 알겠어요. 이건 술래잡기에요!”
깨달았다는 눈치로 여우귀를 쫑긋거린 흑미가 소리쳤다.
“보세요, 라한이가 술래. 저희는 잡히면 꼴깍! 하구 도망 실패해서 저어기로 가는 거예요!”
맞죠? 라는 눈으로 흑미가 룬을 돌아보았다.
“그렇네.”
룬은 맞장구를 쳐 주었다.
술래잡기라는 애들 놀이에 비교하기엔 무시무시해 보였지만, 본질이 비슷했다.
한편, 숨을 진정시킨 아멜리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아…….”
소녀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니 안도와 함께, 제일 먼저 잡혔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잘 하고 싶었는데.’
시무룩하게 의자에 앉은 아멜리아를 본 룬이 입을 열었다.
“아멜리아. 땅 위에서 다리로 움직여 본 거 얼마 안 됐지?”
“아, 응…… 맞아.”
그가 굳이 이 말을 한 이유는, 풀 죽은 아멜리아를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변명이고.
어찌 보면 약간의 위안이다.
룬이 말을 덧붙였다.
“천 개의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법이랬어. 발을 사용하는 게 가장 익숙하지 않았던 거니까, 지금은 눈으로 모두 보고 기억해 둬.”
룬은 그가 아는 속담을 적당히 바꾸어 일러두었다.
육지에서 움직이는 것도 며칠 되지 않은 그녀다.
드래곤 족이라 타고난 운동 능력이 워낙 좋았을 뿐.
평범한 존재라면 이제 걸음마나 할 시기인데, 무기까지 들고 덤비는 저런 황소 같은 돌진을 즉시 대응치 못하는 건 당연했다.
다행히 룬의 의도가 먹혔다.
“으, 응!”
뭔가 더 말하고 싶었는지 머뭇거리던 아멜리아.
그녀는 하얀 주먹을 꼭 쥐었다.
“다들 히, 힘내……!”
남은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심호흡을 한 아멜리아가 눈을 홉뜨고 듀라한을 주시했다.
‘좋아. 저 녀석은 진정됐고.’
눈으로 보는 것도 분명 공부.
다리를 쓰는 게 익숙해지면 금세 성장할 그녀였다.
“이제 우리 차례네.”
그렇게 말 하며, 룬은 호흡을 정리하고 듀라한을 주시했다.
이번에는 길쭉한 봉을 쥔 듀라한이 목표를 고르는 듯 녹빛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사냥하거나, 사냥당하거나.’
둘 다 자신은 있었다.
룬은 목표를 세웠다.
‘이 전투를 최대한 지속하며 정보를 얻고, 그를 토대로 즉시 대응한다.’
마음을 정한 룬이 페르디키온과 흑미에게 눈짓했다.
“흑미. 형, 기회 오면 잡자.”
“좋다, 룬.”
“후아아, 네!”
수인의 본능이 강한 흑미가 분홍빛 눈동자에 진한 경계의 빛을 품었다.
셋은 듀라한을 가운데 두고 삼각형으로 맴 돌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타겟이 될지 알 수 없는 순간.
듀라한의 손에 들린 검은 연기가 거대한 해머로 변했다.
후우우웅!
꽈앙!
지축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땅이 훅 꺼지고, 모래와 흙, 자갈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