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42)

“와앗!”

유난히 큰 돌 조각을 피해 흑미가 한 방향으로 발을 뗀 순간.

쐐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거침없는 해머질이 흑미를 향했다.

떠엉!

뱃속까지 건드리는 울림이 공기를 흔들었다.

꼬리를 쭈뼛하게 세운 흑미가 해머에 사정권에 든 순간, 무언가 끼어들어 해머를 막은 탓이다.

“크윽!”

룬이었다.

‘칫. 흘릴 시간까진 없었어.’

그는 침음성을 삼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룬의 오른손에 들려있었다.

“룬! 괜찮은 거냐?”

타겟이 아니었던 페르디키온이 손에 불로 만들어진 검 다섯을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방패에 막힌 순간 듀라한이 피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명중시킬 수 있었으리라.

“생각보다는.”

룬이 툭 던지듯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타격이 제법 컸다.

이런걸 두 번 맞았다간 룬 역시 시합에 낙오될 게 뻔했다.

“나는 무기 덕을 봤지만, 무조건 피하는 게 낫겠어.”

“그래. 너도 무모한 짓은 자중하도록 해라.”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듀라한이 달려들며, 무기를 긴 갈고리로 바꿨다.

푸학!

갈고리로 바닥을 긁어 흙먼지는 일으킨 듀라한.

그는 흙과 자갈을 룬과 흑미에게 날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속으로 수를 세며 룬은 자잘한 자갈을 한 손으로 모두 잡았다.

동시에, 미세한 흙먼지의 흔들림을 감지했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음.

공간이 찢겼지만, 그 자리에 룬과 흑미는 없었다.

흑미 뒷덜미를 잡은 룬이 빠르게 자리를 이탈한 덕이었다.

번뜩.

룬은 듀라한의 녹안이 유난히 흥미를 담아 그를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피할 줄 몰랐다는 눈치로군.’

사소한 차이를 잡아내는 것도 능력.

원래 싸움이란 용맹하게 덤빈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지형, 적과 나의 상황, 유불리함.

다양한 것들이 영향을 끼쳤다.

‘그걸 하나하나 계산해서 움직일 수는 없고…… 타고나거나, 수 없이 많은 전장을 다니며 터득해야 하건만.’

아무래도 속성으로 가르쳐 줄 모양인지, 공격 하나하나가 버거웠다.

룬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전장을 익히기 좋은 수업이긴 하네.”

아쉬웠다.

아멜리아가 제일 먼저 탈락하지 않았다면, 드워프 장인의 손에서 빚어진 ‘부러지지 않는 창’을 활용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아멜리아부터 공격한 거겠지.’

아멜리아의 수련을 도왔던 듀라한이니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역시 써야겠어.’

룬은 그의 또 다른 무기를 떠올리며 타이밍을 가늠했다.

소금 뿌리기

하지만 전투는 더욱 빠르고 격렬하게 흘렀다.

룬은 나무를 등지고 있다 방패로 듀라한의 손목 관절 부분을 텅! 하고 쳐냈다.

비록 듀라한에게 관절은 없지만, 손목은 무기를 잡았을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이것도 소용없나.’

빠르게 판단한 룬이 자리를 피하자, 그 자리에 도끼질이 꽂혔다.

콰우웅!

이건 도끼 찍는 소리가 아니었다.

차라리 바위를 집어 던진 소리라는 게 더 설득력 있을 지경이다.

그 때, 기회를 본 흑미가 빠르게 나무들 사이를 내달렸다.

“호잇!”

날다람쥐처럼 빠르고, 매섭게.

탓! 탓!

“흐으으읍!”

숨을 삼키고 볼을 부풀린 흑미가 기어이 듀라한의 뒤를 점했다.

“에잇!”

빠악!

투구 뒤쪽에 흑미의 발차기가 꽂혔다.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타격감은 없던 모양이지만.

“…….”

서서히 몸을 돌리는 듀라한의 녹색 안광이 불길하게 빛났다.

주먹을 꽉 쥐었다 편 듀라한의 장갑 사이사이에, 그물이 달린 표창이 들려있었다.

그 순간 룬은 흑미에게 외쳤다.

“피해, 흑미!”

흑미는 룬의 말에 본능적으로 귀를 움찔하곤, 공중제비를 돌며 방향을 바꾸었다.

표푝! 콱!

하지만, 듀라한은 흑미가 피할 방향까지 계산해 그물 달린 표창을 추가로 던졌다.

촤악!

“와앗!”

철푸덕!

결국 꼼짝없이 그물에 걸린 흑미가 바닥에 쓰러졌다.

흑미는 벌떡 일어나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낑낑거렸다.

“아우! 이거 안 벗겨져요!”

철컥!

푸닥거리를 하며 바동거리는 흑미의 앞에 거대한 듀라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터억!

흑미의 머리를 잡은 거대한 갑옷기사의 장갑.

결국 흑미는 시무룩하게 얼굴을 들었다.

“히잉. 흑미 잡힌 거예요?”

철컹.

듀라한의 고개가 한 차례 끄덕여졌다.

탈락이었다.

귀가 접혀버린 흑미가 듀라한의 도움을 받으며 끙차, 하고 그물을 끌어내렸다.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룬과 페르디키온 쪽을 본 흑미가 듀라한을 보았다.

처억.

똑바로 서 있던 듀라한은 아멜리아가 있는 장소를 가리켰다.

“휴, 너무 아쉽다아.”

흑미는 물끄러미 듀라한을 보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치, 다음엔 더 잘할 거예요.”

입술이 삐쭉 나온 흑미가 메롱, 하고 혀를 내밀더니 냉큼 아멜리아가 기다리는 선 너머로 뛰어갔다.

흑미가 돌아갈 때 까지 잠시 중단된 전투상황.

룬은 듀라한이 가만히 서서 음울하게 녹빛 눈을 깜빡이는 걸 바라보았다.

너랑 안 놀아! 라는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처량해보였다.

룬은 설마 하는 얼굴로 생각했다.

‘너 설마 상처받았냐.’

그러나, 다시 수업을 재개한 듀라한에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남은 건 둘.

아마도, 시작부터 예상했던 상황.

가장 전투능력이 뛰어나고, 심지어 무기에 대한 숙련도도 제법 있는 둘이니 이는 당연했다.

미간을 구기고 검을 든 페르디키온이 물었다.

“네 수하는 약점이라곤 없는 거냐?”

“응. 뼈도 없어서 관절 꺾기도 안 돼.”

혹시나 하고 시도했던 룬이 답했다.

이에 하아, 하고 화룡족 소년이 답답한 한숨을 흘렸다.

“환장하겠군.”

분위기를 다잡기 위함인지, 듀라한이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찍었다.

콰직!

쿠웅! 쿵!

쩍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린 나무.

커다란 고목이었을 나무는 생기를 잃고 바싹 말라비틀어졌다.

무기에 어린 마기와 어둠 때문이다.

“으, 으아.”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작은 주먹을 치켜든 흑미가 응원을 보냈다.

“무찔러버려요, 룬 님. 페르디키온 님!”

룬은 듀라한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형이 틈을 만들어 주면, 시도할만한 게 있긴 해.”

“그게 정말이냐?”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룬을 확인하고, 페르디키온이 불길이 이는 검을 쥐었다.

“그럼 뭐든 해 봐라.”

페르디키온은 한쪽 입꼬리를 슥 올렸다.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사나워 보이기도 한 얼굴로, 그는 룬에게 말했다.

“이제까지, 네가 그렇게 말하고 실패한 적 없으니.”

그 믿음에 룬은 차분한 감사로 되돌렸다.

“믿어줘서 고마워.”

화룡족 소년의 손에 불길이 잡혔다.

이글거리는 화염은 빛과 그림자를 흔들며 페르디키온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냈다.

“듀라한. 힘을 무기화하는 건 네 놈뿐만이 아니다.”

화륵!

타오르는 불의 검이 공간을 태운다.

공기마저 달구는 페르디키온을 향해 듀라한이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파앗!

듀라한의 발 밑에서 마법진이 발동했다.

콰광!

쾅쾅쾅쾅!

폭발.

심플하고, 파괴적인 힘이 마력을 씹어먹고 연속으로 터져나왔다.

이미 부서지고 갈라진 바위와 나무의 잔해가 새까만 숯이 되어 타올랐다.

룬은 화려한 폭발과 비산하는 잔해들 틈에 숨어 가만히 숨을 죽였다.

‘틈을 만들어 달라했더니 화려하게도 해주는군.’

덕분에 듀라한의 시선에서 몸을 숨긴 룬이 호흡을 바꾸었다.

처음 듀라한이 폭포 아래에서 했던 호흡 그대로.

자연의 흐름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서.

“!”

듀라한은 룬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찾으려하자,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불의 검이 달려든다.

“하앗!”

카각!

대검과 불의 검이 맞부딪히고.

투구 속 녹빛 안광과 드래곤의 동공이 드러난 채 붉게 타오르는 시선이 얽혔다.

치이익!

쏟아지는 폭포는 불타는 대지를 만나 수증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습함과 건조함이 오가며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후웅!

육중한 대검이 공중을 갈라내자, 페르디키온이 불의 검을 세워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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