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강!
성체에 가까운 드래곤 족의 힘.
그에 대항하는 검은 기사의 완력.
오랜만의 호적수에 듀라한과 페르디키온은 잠시 이 전투에 완전히 몰입하고 말았다.
“하앗!”
키잉!
페르디키온이 드래곤 피어(fear)를 사용하자, 그에 대항하기 위해 듀라한의 입이 열렸다.
-그아아아아아!
뱃속에서부터 터져 나온 하울링!
아직 성체가 아닌 페르디키온으로서는 정면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커헉!”
페르디키온이 거친 기침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대로 듀라한이 봉을 내리그으려는 차.
“거기까지.”
우뚝!
룬의 목소리와 섬뜩한 기운이 듀라한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
서늘한 마기.
지독한 어둠, 그리고 강력한 빛으로 절제된 검.
그것이 듀라한의 목을 위협했다.
룬의 손에 들린 건 마족 레파논의 검 ‘지옥을 부르는 절망’이었다.
쿠우우.
듀라한은 봉을 든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봉인되어 있지만, 엄연히 마족의 무구.
베이면 몸이 없는 기사라도 반드시 손상을 입게 될 터였다.
철그럭.
듀라한의 손에서 봉이 사라졌다.
절그럭!
그리고는, 얌전히 전투 태세를 풀고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렸다.
항복 표시였다.
룬은 미미한 미소를 띠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듀라한 선생님.”
천천히 검을 회수한 룬이 페르디키온에게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고생했어, 형.”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페르디키온이 몸을 일으켰다.
“해낼 줄 알았다, 룬.”
힐끔.
페르디키온의 눈이 검이 들린 룬의 손에 머물렀다.
“하지만, 네가 말한 그 방법이 빌어먹을 마족의 검을 쓰는 거였다니.”
화룡족 소년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룬도 검을 보며 말했다.
“통할 무기가 이것뿐이었거든.”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았지만, 룬도 어쩔 수 없었다.
‘지옥을 부르는 절망’은 듀라한도 예상하지 못했을 무기. 이길 방도는 이것뿐이었으니까.’
듀라한에겐 운이 나쁘게도, 이 검과 듀라한은 상성이 최악이었다.
안 그래도 마족이 직접 사용한 지독한 마기가 어린 검.
거기에, 빛의 일족 장로인 크리스티나의 강력한 봉인마법까지 둘러져있다.
이는 듀라한에겐 더욱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흑미와 아멜리아가 곁으로 다가왔다.
“와아! 룬 님. 이건 무슨 검이에요?”
흑미의 질문에 대답한 건 룬이었다.
“전에 세계수에서 싸웠던 마족이 남긴 검이야.”
“아항! 맞아요, 들은 기억이 나요. 그치만 크리스티나 님의 힘도 엄청 강하게 느껴져요.”
상황을 잘 모르는 아멜리아가 특히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결국 룬은 간단히 사정 설명을 곁들였다.
“엘프 왕국을 멸망하게 만들 뻔한 마족이 이걸 남기고 도망쳤어. 덕분에 얻은 전리품이야.”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인 아멜리아가 검을 물끄러미 보다 제 팔을 문질렀다.
“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겼어…….”
마족을 보지 않았지만, 아멜리아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눈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세상……을 부, 부정하는 힘이야. 룬, 위험……해. 나도…… 정화로, 도와 줄……까?”
간과하고 넘길 수 없는 위험에 아멜리아가 권해왔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콧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 역시 진작 물어본 적 있다. 이 고집 센 녀석이 거절했다만.”
룬은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잘못하면 여러모로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런 거야.”
하필이면 마족이 ‘직접’ 룬을 지정해서 ‘가져가라’고 한 말.
거기에 룬이 수락 한 점.
이는 마족의 계약이 성립되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게 크리스티나의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계약파기를 했다간 이를 빌미로 마족이 드래곤 일족을 노리게 된다면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되는 거랑 비슷한 이야기지.’
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볼을 부풀린 흑미가 손을 허리에 척 얹었다.
“우우. 그 레파논이라는 마족 이상해요. 룬 님한테 집착…… 아차.”
합, 하고 입을 두 손으로 가린 흑미가 슬쩍 룬의 눈치를 보았다.
시선을 마주친 룬이 입을 열었다.
“그 놈한테는 써도 돼. 사실이니까.”
이상한 놈을 이상한 놈이라 해야지, 다른 말로 부를 것도 없었다.
‘자주 쓰지만 않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룬의 허락을 받은 흑미가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으음, 집착변태 마족이 틀림없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룬이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한동안 그 놈은 언급하지 말고. 보면 소금이라도 뿌려야 할 놈이니까.”
“소금이요? 그건 왜 뿌려요?”
아차.
이쪽 세계에는 ‘재수 없으면 소금을 뿌린다.’는 문화가 없다.
짧게 고민한 룬은 최대한 상황에 맞게 말해 주었다.
“소금은 음식도 맛있게 하고, 깨끗하고 하얀색이잖아. 뭔가 투명하고 순수한 느낌도 있고.”
“하얗고, 투명하고, 순수하고, 맛있는 소금.”
룬의 말을 따라하며 흑미의 눈이 반짝였다.
그럴듯해 보였나 보다.
잠시 생각하던 페르디키온도 의견을 덧붙였다.
“생각해보니, 내 불의 레어에서도 소금석은 꽤나 귀하다. 음식을 상하지 않고 오래가도록 하기에 드워프들 들이 애용하지.”
‘좋았어.’
룬은 속으로 페르디키온에게 외쳤다.
기세를 이어, 화룡족 소년이 말을 이어갔다.
“인간들 중에서는 소독이나 살균효과를 보기위해 소금물을 입에 머금기도 한다.”
룬은 흡족한 마음으로 말을 맺었다.
“형 말이 맞아. 심지어 깨끗한 바다에서 만들어지잖아? 그래서 부정한 것도 이로운 걸로 쫒아내는 느낌이 들지.”
순간의 말실수를 순발력 있게 넘긴 룬이 속으로 안도하는 차.
“룬, 생각보다 감성적인 면이 있군. 소금을 그렇게 느꼈었다니.”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은 속으로 이를 꽉 물었다.
‘그럴 리가 있냐.’
하지만 흑미는 힛, 하고 웃으며 해맑게 다짐했다.
”굵은 소금을 뿌리면 엄청 짜고 따가워 할 거 같아요! 다음에 그 소금 뿌려야 할 나쁜 놈이 오면, 흑미가 소금 뿌릴 거예요!
보아하니 소금은 흑미에게 최강의 퇴치 물품이 된 모양이었다.
“…….”
진실을 말해야할까, 잠시 고민하던 룬.
‘그래, 묻자. 묻고 가자.’
그는 계산 끝에 감성적이라는 오해를 받는 편이 낫다고 결론내렸다.
커야 한다
그들을 쭉 지켜보고 있던 듀라한이 팔짱을 풀었다.
절그럭!
탕!
그가 양 손을 주먹 쥐고 부딪히자, 단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녹빛 안광이 은은하게 빛을 흘리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흑미가 가장 먼저 의미를 눈치채고 손을 흔들었다.
“수고 하셨숩니다아! 듀라한 선생님!”
아멜리아도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이어 페르디키온과 룬도 각각 말을 얹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전의 수업 탓에 열기가 몸을 데우고 있었다.
룬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잠깐인데, 이런 투쟁심이라니.’
혼자 훈련할 때는 잘 느낄 수 없었던 뜨끈하게 오른 느낌.
하지만 전투 훈련이 끝난 지금은 괜한 열일뿐이다.
‘막상 끝나고 보니 뭔가 아쉬운데.’
속으로 피식 웃으며 룬은 능숙하게 제 기분을 갈무리했다.
그 때, 문득 생각난 듯 아멜리아가 물어왔다.
“이, 이 주변 있잖아…… 이대로 괜찮, 을까?”
그 말에 다른 이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관이 아름다웠던 폭포와 숲은 사라지고, 불티와 마기가 탁하게 뒤섞인 채 곳곳에 남아있었다.
중간 중간, 진한 어둠이 부유물처럼 떠 있기도 했다.
고인 계곡물은 부글부글 끓었고, 불타지 않은 풀이나 나무들은 죄 메말라 있었다.
말 그대로 자연 파괴의 현장이다.
영 마음 쓰이는 눈치인 아멜리아에게 페르디키온이 한 소리 던졌다.
“또 쓸데없는 생각이군.”
깜짝 놀란 아멜리아가 페르디키온을 노려보았다.
“쓰, 쓸데없다니…… 마, 말이 심하잖아……요.”
“뭐?”
화룡족 소년의 사나운 되물음에 룬이 고개를 저으며 중재했다.
“아멜리아, 형 생각을 대충 알 것도 같아. 저건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의미야.”
“정……말?”
“응.”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 룬이 말을 이었다.
“비록 훼손이 심하긴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조차 예상했을 거야.”
크리스티나는 마족에 대한 증오가 깊은 빛의 일족 드래곤이다.
이 모의전은 특성상 마기를 사용해야 하는 수업.
하지만 빛의 레어에서 마기를 쓰도록 허락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 해츨링들을 완전히 버려진 볼모지로 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러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
안전하면서도, 레어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는 건 기본.
다양한 속성의 공격마법과 폭발, 심지어 마기를 써도 외부의 간섭은 일체 없어야만 했다.
룬이 한 말에 정답이 있었던지, 페르디키온이 말을 덧붙였다.
“크리스티나 님이라면 이런 장소는 여럿 알고 계실 터.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다.”
아멜리아도 조금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 그런 거라면…….”
하지만 신경 쓰이는지 못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페르디키온은 그 모습이 못내 답답했는지 들리라는 듯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딴 것보다 방금 네가 패했던 이유와 그 보완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더 생산적이지 않나?”
“!”
사실이긴 했으나, 그 말이 속상했던지 아멜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 그래도 가장 먼저 탈락하게 된 게 못내 마음 쓰였던 탓이다.
‘나 참.’
잠시 고민하던 룬은 페르디키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 우리 조금만 정리하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