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호적수를 만나 전투를 치른 뒤, 간만의 고양감을 즐기고 싶었던 페르디키온.
그리고 룬은 페르디키온의 그 속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어른스러운 듯 말하지만 결국 좀 전의 격한 전투의 여운을 즐기고 싶은 거잖아.’
강렬한 몰입감.
그 뒤에 남은 기분을 좀 더 즐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룬은 페르디키온이 듣기에 꽤 솔깃한 제안을 떠올렸다.
“형도 솔직히, 아직도 몸 근질근질하지 않아?”
“……뭐, 아무래도 그렇지.”
부정을 안 하는군.
그럼 정론으로 돌파해야지.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여긴 전투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어. 끝까지 참여하지 못한 이들과 함께 쭉 둘러보면서 복기하기 좋다는거고.”
그 말을 듣고 보니, 페르디키온 역시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힘의 강약에 따라 다르게 난 발자국, 힘을 사용한 흔적 따위가.
고민하는 기색을 눈치챈 룬이 얼른 말을 이었다.
“다음번 전투를 위해, 다같이 한번 보고 가자는 거지.”
비록 탈락하긴 했으나, 흑미도 아멜리아도 마력에 민감하고 전투센스가 좋은 이들이다.
분명 스스로 관찰하고 깨닫는 일 역시 도움이 될 터였다.
결국 페르디키온은 룬의 말에 동의했다.
“흠. 그건 일리 있는 말이다. 좀 귀찮긴 하지만.”
저 정도면 넘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기분을 좀 가라앉히고 가려고. 사용한 무기까지 그 모양이다 보니, 혹시라도 마기의 흔적이 묻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크리스티나가 본다면 진흙탕에 뒹굴고 나온 강아지들처럼 보이리라.
한데, 페르디키온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너 설마 이상한 기분이라도 드는 거냐? 설마 마족의 기운이라든가.”
“?”
당연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룬은 이들의 생각보다 숙련 된 자.
마족의 무기는 위험하지만, 크리스티나의 봉인이라는 강력한 칼집이 있는 이상, 그냥 꺼내만 본 정도로 일이 생길 리 없었다.
‘잘못하면 저 놈 이상한 곳으로 생각이 튀겠는데.’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직관적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데 도가 튼 놈.
그 말은 즉,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다는 소리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페르디키온은 눈이 수상하게 번뜩였다.
“모를 일이다. 그 악마같은 놈들이 뭔 짓을 했을지는.”
룬은 이마를 탁 치고 싶어졌다.
화룡족 소년의 거침없는 면은 단순명쾌해서 빠른 해결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저런 상상도 못한 소릴 서슴없이 해대곤 했다.
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크리스티나의 봉인은 완벽해. 전혀 걱정할 거 없어.”
그리고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형, 이래봬도 나 어둠 일족이야. 마기에 대한 저항력은 내가 가장 높잖아.”
타고난 종족 특성을 언급했지만, 페르디키온의 눈초리는 영 불손했다.
“그 말을 할 거면 내 나이만큼 커서 와라. 키도 흑미만 한 놈이.”
“…….”
그놈의 어린 나이.
이건 그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인간형인 그는 흑미보다 아주, 조금은 더 컸지만.
이 이상 키 이야기를 이어 가는 건 룬에게 이로울 게 없었다.
‘더 말해봐야 뭐해. 아니, 애초에 웬 키 이야기가 튀어나와.’
끙, 하고 미간을 좁힌 룬.
무슨 원리인지, 그 얼굴을 본 페르디키온은 그제야 기분이 풀린 얼굴을 했다.
“뭐, 다음 전투에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 제안은 제법 괜찮았으니 해보도록 하마.”
룬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페르디키온을 봤다.
‘저 놈이 지금 날 놀리나?’
비록 겉모습은 어리지만 속 알맹이만큼은 다 큰 성체나 마찬가지인 룬.
‘커야 해결 된다. 어쨌든 성장부터 해야 해.’
룬은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더 잘 먹고, 잘 쉬기로.
여러모로 한창 커야 할 놈들 투성이였다.
저 보다 어린 룬을 놀리는 페르디키온도.
이제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아멜리아도.
흑미나 백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 다들 자라면 해결될 일이지.’
룬은 이무기 시절의 마음을 떠올렸다.
순리와 이치.
그를 되새기는 것이야말로 신수의 자질.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자.’
초연한 눈으로 하늘을 잠시 바라본 룬은 그 같은 결론을 내었다.
그리고 주섬주섬 파괴의 흔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본 흑미가 백야에게 소곤거렸다.
“있지이, 페르디키온 님이 왜 저러는 거야?”
“삐약! 삐삐삐!”
날개를 파닥 거린 백야가 흑미의 머리 위에서 지저귀었다.
응, 응. 하고 말을 알아들은 흑미가 이마 우와-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흑미야……. 지, 지금 백야가 뭐라고 한……거야?”
우움, 하고 단어를 고르던 흑미가 해맑게 입을 열었다.
“페르디키온 님이 룬 님이랑 대화하다가 기분이 바뀌었대요!”
그건 보면 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예쁘게 눈을 휘며 쿡…… 하고 웃었다.
“응, 알 것 같아. 룬…… 이랑 이야기 하다 보, 보면…… 나도 종종 그랬으니, 까.”
좀 전에 페르디키온의 이야기는, 분명 속상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룬이 의미를 풀어서 알려주자 조금은 그런 기분이 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멜리아는 시선을 들어, 초연한 눈으로 착착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 룬을 바라보았다.
‘룬은 참 신기해. 처음에는 수업을 받는다며 민폐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역시, 용기 내길 참 잘한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룬이 그녀를 불렀다.
“아멜리아. 여기 물 좀 적셔줘.”
대머리처럼 홀랑 가운데만 타 버린 풀밭.
한눈에 봐도 무척 황량해 보였다.
“으, 응!”
아멜리아가 물의 힘을 사용하자, 자잘한 불이 사그라들었다.
룬이 말했다.
“아멜리아. 그냥 정리만 하기보다는, 불길에 그을린 흔적을 따라서 상상해 보면 좋아. 전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어떤 부딪힘이 있었는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멜리아가 스스로 전투의 흐름을 짚어가며 입 밖으로 내었다.
“으, 음. 아까…… 본 장면이랑 가, 같이 생각하면…… 여, 여기서 힘을 작게 흘리고, 반격…… 맞아?”
“앞에는 다 맞았고, 반격이 아니라 튕겨내고 피한 거. 소강상태를 유지한 거야.”
그래도 이 정도면 꽤 훌륭했다.
룬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인데도 잘 하는데?”
“고, 고마워…….”
아멜리아는 룬의 칭찬에 기분 좋게 웃었다.
“룬 님! 흑미도요!”
얼른 손을 든 흑미가 룬을 불렀다.
그쪽으로 다가가니, 흑미가 부서진 바위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새까맣게 타서 룬 님처럼 생겼어요!”
“…….”
우연이겠지만.
탄 바위조각이 드래곤 조각처럼 생기긴 했다.
하지만 흑미가 본 건 그뿐이 아니었다.
“요기요. 마기가 쬐끔 묻어 있구, 듀라한이 대검으로 단번에 쏵! 하고 꼬리 부분 짤랐어요!”
“……정확하네. 잘 했다.”
“힛!”
웃으며 머리를 내밀기에, 룬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흑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 백야가 그을린 채 물에 젖은 나뭇가지를 열심히 물고 와 룬 앞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하얀 날개를 쫙 펴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룬을 올려다본다.
“삐이약!”
“? 넌 왜.”
“삐약삐약! 뺙뺙 뺙뺙뺙! 삐삐약 뺙뺙!”
뭔지 몰라도 굉장히 열정적인 설명이긴 했다.
흑미는 열심히 백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룬은.
‘왜 백야의 울음소리에서 자진모리 장단이 느껴지는 거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대충 대꾸해 주었다.
“그래, 열심히 했나보네.”
“삐이악!”
이어서 쫑쫑거리며 탭댄스를 추기 시작한 하얀 새.
룬은 백야가 저 나름대로 전투 때의 발재간을 흉내내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새가 그런 걸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냐.’
부리 마스터 다음은 발재간 마스터라도 될 기세다.
룬은 아련한 눈으로 백야를 바라봐 주었다.
‘이 놈은 종을 잘 못 태어난 게 아닐까. 새가 아니라 팔 다리가 있는 종족이었다면 저 재능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모르는 백야는 깡충거리며 새 발자국을 찍어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자, 성적 발표시간이란다.”
풍족한 저녁식사가 끝나갈 즈음, 크리스티나가 양피지를 하나 들고 왔다.
들켰나?
‘수업에 평가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한데.’
다만 룬이 생각한 것보다 빨랐다.
그때 흑미가 볼에 생크림을 묻히고 말했다.
“성적이면 그거죠? 누가누가 잘했나 확인하는 거요!”
간식으로 나온 딸기 콩포트를 올린 크레이프를 입에 문 아멜리아가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빛 소녀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으, 음……. 나, 나 괜찮았을까……?”
떨리는지 긴장으로 손을 만지작 거리는 아멜리아.
기대와 염려가 뒤섞인 이들을 본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다들 호들갑이 심하군. 이 정도가지고.”
화룡족 소년의 시선 끝에는 평온하게 푸딩을 비우는 룬이 있었다.
“룬을 봐라. 그런 평가에 하나하나 반응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의연한 모습이지 않나.”
갑자기 지목된 룬은 다소 의아했다.
‘왜 거기서 내가 나오는거냐.’
룬이 지그시 페르디키온을 쳐다보자, 그가 믿음 가득한 눈으로 바라봐왔다.
“역시, 내 아우다.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 없이, 최선을 다했으니 겸허하게 결과를 들으려 하는 저 모습을 보란 말이다.”
“…….”
룬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른 평가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니까.
이미 예상한 상황을 두고 굳이 야단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심지어 모든 실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었다.
‘이걸 솔직하게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도 평범한 해츨링이라기엔 너무 뛰어나다며 주목받고 있던 룬.
속 알맹이가 999년 살아본 이무기였다는 걸 밝힐 수 없는 이상, 룬은 속으로 한숨을 쉴 뿐이었다.
결국 룬은 순하게 웃어보이며 적절히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봐 줘서 고마워, 형.”
페르디키온은 뜸들이다 겨우 감사의 말을 표하는 순한 제 아우를 보았다.
“넌 좀 더 자신을 가져도 좋다. 그만한 실력이 있으면서 겸손을 떠는 건 오히려 자만으로 보일 수 있는 법. 당당해지는 것도 일족을 이끌 자에게 필요한 성정이다.”
물론…… 듀라한을 제압한 일은 대단한 일이다.
그래도 진짜로 기뻐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슬쩍 공을 나눴다.
“형이 도와줘서 그래. 형 없었으면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혼자서 듀라한을 제압하는 짓을 했다간 정체까지 의심받을 테니.’
다행히도 룬의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은 내심 싫진 않은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입가가 슬근슬근 꿈틀거리는 게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냐? 제법 기특한 소리로군.”
룬은 속으로 허허로이 웃었다.
의젓하게 말했지만, 결국 어린 동생의 칭찬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는 게 보였다.
‘녀석. 크려면 멀었군.’
룬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크리스티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