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42)

“여느 방과 비슷해. 그래도 블랙 드래곤들의 유물은 좀 위험하니까 혹시라도 너무 가까이서 만지지는 말고.”

그 말에 흑미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흑미도요, 거기에 장미 엄-청 많이 피워냈어요!”

“앗…… 흑미도 가, 같이 있어?”

아멜리아의 질문에 룬이 대답했다.

“내 권속들도 다 거기에 있어. 제드는 얼마 전에 대장간까지 생겼고.”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아멜리아.

더 묻고 싶은 눈치인 그녀를 두고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추후 레어를 만들 때 어떤 식으로 해야할지도 구상하기 쉬워지겠군. 잘 하고 있다, 룬.”

그 말에 룬 역시 수긍했다.

“그러네. 나도 아멜리아나 형처럼 레어를 가지게 될 테니까.”

아직은 이르지만, 수면기 두세 번 즈음 지나면 독립적인 레어를 고민할 시기가 올 터.

물론, 룬 입장에서야 급할 건 없었다.

‘크리스티나라는 거물의 보금자리인 이상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가장 안전하고, 강해지기 유용한 장소니.’

다만 어둠 일족이 원래 소유했던 레어는 찾아가 보긴 해야했다.

이조차, 성장해야 가능할 일이지만.

‘그러고 보니, 전생에 내 터는 꽤나 황량했지.’

새삼, 룬은 전생에 그가 살던 섬을 떠올렸다.

쏴악 하는 바닷소리가 자장가처럼 늘 존재했던, 풀 한 포기 보기 힘든 섬.

생명체라곤 지나가는 갈매기조차 보기 힘든 그곳에 종종 놀러오던 구미호, 백미는 그에게 잔소리처럼 찔러대곤 했다.

-삭막해! 너무 삭막해! 여기가 편하다는 게 말이 돼? 이빨 가져가는 까치도 여긴 못 오겠다구!

답답함에 열을 낸 하얀 백미가 아홉 개의 꼬리를 풍성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기어이 한 일이, 어디서 방울이나 장식품 같은 걸 선물이라고 가져와 달고 살라는 거였지만.

‘사는 세월이 얼만데, 그런 장신구가 오래 갈 리가 없었지.’

그래서인가.

그 뒤로는 오래 갈 수 있는 귀물을 종종 가져오곤 했다.

처음에는 순간의 변덕이리라 여겼건만.

꽤 한동안 꼬박꼬박 장신구 신상이 또 나왔다며 가져오곤 해서 그 꾸준함에 감탄했더랬다.

‘평소엔 그리도 수선스럽고 한시도 가만 있질 못하더니, 뭐 하나에 꽂히면 영 못 말릴 정도였어.’

결국 그가 살던 동굴 좀 꾸며보라고 찔러오면, 어색하게 어울려주게 되고.

백미가 인간과 만나 가족을 꾸리며 사느라 올 일이 없어졌을 시기에, 그 장신구들을 모아 넣어두었더랬다.

‘그리고…… 그걸 백미 무덤에 같이 묻어 줬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입 안에 썼다.

지금은 주변에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어리고, 밝았기 때문일까.

룬은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이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살짝 뜬 기분이 들었다.

“룬.”

툭.

그 때, 페르디키온이 그의 옆구리를 가볍게 팔꿈치로 찔렀다.

“왜?”

상념에서 빠져나온 룬이 화룡족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말없이 미간만 구기고 바라보았다.

소년의 입에서 답지않게 애매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꼭 떠날 듯…….”

그러더니 이내, 휙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다. 기분 탓이겠지.”

“?”

더 물어보려던 차에, 아멜리아와 떠들던 흑미의 말소리가 조금 크게 들려왔다.

“흑미는요, 어디서든 장미 많이 피워내고 싶어요!”

흑미는 아멜리아와 함께 자신이 검은방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미가 요즘 꽤 늘었던데.’

안 그래도 장미밭이었는데, 요즘은 장미 정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야 외관이 무슨 상관인가 싶어 뒀지만, 전생 때를 떠올린 후 장미꽃 만발한 걸 보여주려니 기분이 묘했다.

백미를 떠올린 탓일까.

그리 좋아하니, 흑미가 즐길 만한 정원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두는 해 둬야겠군.’

과연 그 때가 언제일지는, 조금은 기다려야 알 일이었다.

“삐약!”

다 왔다는 듯 백야가 가볍게 울었다.

봉인된 문을 열자, 갇혀있던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한꺼번에 흘러나왔다.

“여기야.”

흑미와 아멜리아가 탄성을 터트렸다.

“와아……! 이, 이런 건 처음……봐.”

“우와! 굉장해요!”

반짝이는 딸기쨈이 얹혀진 생크림 도넛 굴뚝.

초콜릿 판으로 된 문.

막대사탕과 알록달록한 케이크로 된 본체.

골드 드래곤 비늘로 만들어진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만 가능할, 일명 과자의 집이었다.

‘화려하긴 하지만…… 간단히 말해, 간식 창고지.’

이 과자의 집은 크리스티나와 룬이 함께 고안한 아이디어였다.

룬은 이 장소가 만들어진 때를 회상했다.

***

식사와 디저트를 만드는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던 룬.

또한, 다양한 레시피를 개발한 크리스티나.

둘이 함께 작업하니 온갖 케이크와 사탕, 푸딩 등 다양한 마법 효과가 붙은 음식들이 한가득 나왔다.

“룬, 아예 간식을 따로 모으는 장소를 두어야겠구나.”

고개를 끄덕인 룬이 긍정했다.

“뀨귝.”

[그러게. 적당히 보관해 둘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

어찌나 많은지, 이미 아공간 주머니 다섯 개 째를 채우고 있었다.

이에 둘은 본격적으로 장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모았다.

이 장소의 주인인 크리스티나의 능력이라면, 공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온갖 마법효과가 붙은 음식들을 한꺼번에 모아둘 방법에 대해 딱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류를 어떻게 해서 둘 것인가, 그게 문제인데.’

그에 대해 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뀨우아아.”

[이렇게, 커다란 단을 만들어 칸 별로 넣으면 될까?]

짧뚱한 앞 발을 최대한 벌리며 말하는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하지만 간식은 만들면 또 단을 바꿔야 할 거란다. 처음부터 크기를 아주 크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문득 룬은 최근 만들기 시작한 사탕 공예 작품들을 살폈다.

설탕으로 만들어진 화병과 꽃, 그리고 과일 바구니.

안에는 과일맛 사탕이 사과, 오렌지, 작은 우유병 모양으로 들어있었다.

심지어 이 작업은 제드도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판 초콜릿 벽화와 토명하고 노란 금사자, 아름답고 반짝이는 보석이 자갈처럼 깔린 해변 등이 만들어졌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대륙 지도까지 만들어지는 중이니 이대로 가면 간식 창고방이 마을 단위로 있어도 모자랄 터였다.

‘만들 땐 몰랐는데, 해 놓고 보니 뒤처리가 어렵네.’

룬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렀다.

‘선물? 아냐, 그것도 한계가 있지. 창고를 쓰는 것도 방법이지만, 무한히 쌓아만 놓는 건 좀 아까운데.’

생긴 건 다양했으나 전부 음식이기에 아무데나 둘 수도 없는 노릇.

고민하던 룬이 크리스티나의 말에 대답했다.

“뀨뀨. 뀨.”

[크게 단을 나눈다 해도, 설탕과 사탕 공예로 만든 분수 조각상도 있고. 그걸 하나하나 나눠 넣는 것도 일일 것 같아.]

곤혹스러운 얼굴로 크리스티나가 턱 끝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그렇겠구나. 살면서 정리 정돈은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잘 없는데…….”

룬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번이지만 크리스티나의 보물창고에 가본 룬.

엄청난 보물과 귀물들이 가득했지만, 도저히 정리 된 상태는 아니었다.

‘청결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그냥 썩지 않을 뿐 사실상 방치였지.’

하나만 가져가도 귀품이나, 물건이 워낙 많으니 그냥 황금바다 같았더랬다.

이렇게 최소한의 정리도 없이, 대충 모아져 있거나 쌓여만 있던 모양새만 보아도 그녀는 자주 정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공간을 내주는 건 좋지만, 크리스티나의 성정에 어느 정도 맞아야 유지와 관리도 쉬운 법.

“뀨우.”

[그러면 말이야.]

크리스티나가 룬에게 고개를 돌렸다.

룬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말을 이었다.

“뀨뀨뀨. 뀨우.”

[어차피 외견은 소품들을 참고해 만든 거니까, 누군가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주제에 맞춰 모으는 건 어떨까.]

‘마치 전시장처럼.’

순간, 룬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곱씹었다.

마침 크리스티나 역시 룬의 생각에 찬성했다.

“그래. 같은 창고에 모인 물건이라 해도 주제에 맞게 넣으면 무엇이 있을지 알기 쉽겠구나.”

“!”

팟.

뭔가 깨달은 눈으로 룬이 고개를 들어보였다.

“뀨우”

[크리스티나. 이런 건 어때?]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거니?”

반색하며 물어오는 그녀에게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뀨우, 뀨뀨!”

[나누거나 구분하지 말고, 아예 과자로 하나의 주제를 붙여 공간을 만들고 장식처럼 넣어두자. ‘밤’ 이라는 방에는 달과 별, 같은 장식물을 넣는다던가. 아예 마을이나 던전처럼 만드는 거지.]

과자로 된 마을, 혹은 던전.

눈을 깜빡인 크리스티나가 살풋 웃었다.

“어머나. 똑똑하구나 룬.”

이어, 크리스티나가 손으로 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정말 굉장하구나. 기특해.”

칭찬은 고마운 일이나, 아이다운 상상력이란 말에 살짝 속이 찔렸다.

‘그냥 가장 효율 좋은 쪽으로 생각한 건데. 이게 이렇게 되네.’

사탕 공예 장식품과 연회용으로 시험 삼아 만든 덕에 초콜릿 분수.

초코 강물이 흐르는 초코 퐁듀 장식품.

치즈 조각으로 만든 건물과 달 모양 등.

비록 마구잡이로 그날그날 만든 것들이지만, 이렇게 둘러보니 하나의 풍경을 만들 오브젝트로 활용되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날, 즉시 공간부터 만들고 공사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

회상을 마친 룬은 꿀물 폭포가 떨어지는 돌담 아래를 내려다보는 흑미와 아멜리아 쪽을 바라보았다.

“안에 사탕 물고기가 있어요!”

“그, 그러게……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었을까.”

아멜리아가 이어 말하며 주변을 더 둘러보고 있었다.

룬은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아직 미완성인데 나름대로 재미있나보네.’

그러나 페르디키온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구겼다.

“여기가 도움이 된다는 거냐, 룬.”

“물론이지. 봐.”

룬의 손이 풍경 전체를 가리켰다.

“이런 풍경을 본 적 없는 녀석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할지 생각해보게 하잖아.”

페르디키온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더 해주세요

“그 정도는 알지 않겠나. 전승 지식을 받은 이상, 필요한 지식은 얼추 갖추었을 테니.”

그 말을 들은 룬이 페르디키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그걸로 세상을 안다 할 수 없잖아.’

룬은 기분 나쁘지 않게 그 생각을 입에 올렸다.

“그렇지만, 직접 보고 경험한 건 다르지 않을까? 여기 있는 건 모형이겠지만, 그래도 실제로 보는 편이 말이나 지식으로만 아는 것보다 좋을 것 같았거든.”

그 말에 천천히, 화룡족 소년의 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분된 천장은 밤과 낮.

솜사탕이 구름 모양으로 느긋한 바람 마법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과자의 집과 몇 가지 풍경.

아무리 봐도 장난감처럼 생긴 장소다.

구경하며 노는 거라면 모를까,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데엔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런 페르디키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룬은 손가락으로 아멜리아 쪽을 가리켰다.

마침 아멜리아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건…… 대륙의 인간. 그, 그리고…… 음, 모험가. 거, 검사? 아. 고기를 잘라 파는 사람……이구나.”

작은 사람 모양의 초콜릿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멜리아.

칼을 들고 있어도, 그 차림이나 쓰는 다른 소품에 따라 다른 직업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보니 다,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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