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242)

룬의 물음에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여, 여기…… 이 향기였어! 늘, 룬과 흑미에게서 난…… 향기가.”

“앗! 흑미한테 장미 향 나요?”

코를 킁킁, 하고 옷소매에 대고 맡아 본 흑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살짝 나는 거 같긴 하는데. 룬 님도 나요?”

“난 사실 잘 모르겠어.”

미처 몰랐던 부분이었다.

동시에,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면 장미가 한가득했으니.

후각이 익숙해져 그간 인지하지 못한 탓이리라.

검은 방에 터를 잡고 있는 이들에게서 장미향이 풍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룬. 알고 있는 줄 알았다만?”

“우린 익숙해져서 몰랐나 봐.”

페르디키온은 아우의 대답에 긍정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긴 하다. 너뿐만이 아니고, 저기 있는 듀라한에게서도 종종 꽃 향이 나곤 했지.”

“그랬었구나.”

듀라한과 꽃향기라니, 묘한 조합이었다.

당장 암습 할 일도 없으니 상관없지만, 특정 향이 느껴진다는 게 마냥 좋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전투에서는 별로 좋지 않겠는데. 장미향 때문에 기척을 들킨다면 귀찮아질테고.’

떠올린 생각은 불길한 가정을 함께 끌어냈다.

‘너무 튀어. 누가 전투 중에 장미향을 풍기면서 싸우겠냐고.’

흑미야 원래 장미 태생이기도 하고, 타고난 체력, 정령을 활용한 싸움 방식이니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어둠을 사용하는 룬은 은신, 어둠에 스며드는 능력을 사용할 때 불리한 면모가 있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룬과 달리, 흑미는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여기 있는 거요, 다 제가 키운 장미에서 나는 향이에요! 쨔쨘!”

어느 새 흑미의 손에 푸른색 장미가 쥐여져 있었다.

“아멜리아 언니, 이거 선물!”

“고마워……흑미야.”

아멜리아가 행복한 듯 커다란 장미를 두 손에 살포시 쥐었다.

바다에서만 산 그녀에게, 꽃이라는 건 말로만 들어본 것.

푸른 장미꽃을 받아든 아멜리아가 꽃잎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나, 나도 다음에는…… 선물을 가, 가져올게…….”

“힛, 기대할게요!”

해맑게 웃은 흑미를 보며 아멜리아 역시 살풋 웃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를 본 룬은 생각을 달리했다.

‘하긴, 지금은 적을 죽여야 하는 상황은 없을 테니.’

하지만 페르디키온의 생각은 또 달라보였다.

“정체를 숨기는 데 불리할 수는 있겠군. 괜찮은 거냐?”

“이 정도는 괜찮아. 실제로 아까 듀라한과 싸울 때는 다른 흙먼지나 불 냄새에 가려지기도 했고.”

“네가 그렇다면, 알겠다.”

룬은 페르디키온을 한번 보고, 다시 아멜리아와 흑미 쪽을 보았다.

“어이쿠야! 제가 늦었죠?”

따각따각!

발걸음도 가볍게 달려오는 나무인형 제드.

대장간 방향에서 오는 걸 보니, 하던 일을 정리하고 온 듯했다.

룬이 먼저 알은 체를 했다.

“급히 왔나보네, 제드.”

“물론입죠, 이 제드가 흥겨운 자리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요? 만사 제치고 달려왔지요!”

“어서 오세요, 제드 아저씨!”

다가온 흑미가 작아진 제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인형같이 생겼다아.”

“아니 왜 눈물이 날 것 같죠? 어떤 업계에선 그 말이 포상일 텐데…….”

인형도 인형 나름이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어조로 말하는 제드.

그의 서글픈 시선이 룬을 향했다.

왜 저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을, 룬은 태연하게 마주 봐 주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계수를 재료로 얻어오겠다고 고생을 한 게 얼마 전이다.

‘난쟁이 드워프 인형은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갈색 드래곤 란드가 노린 것 같은데.’

본래 드워프 족이다보니, 난쟁이 인형이 잘 어울려서 더욱 웃긴 모양새가 된 제드.

그를 참작해서, 룬은 저 불손한 시선을 눈감아주었다.

그렇다고 계속 봐왔다면 응징이 들어갈 테지만, 눈치 빠른 제드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에헴! 그러고 보니, 이 제드가 선물을 좀 준비했습죠.”

“?”

웬 선물?

“으헤헤헤. 기대 되시쥬?”

“…….”

저 새끼 수상한데.

그 느낌은 룬만 받은 게 아니었는지, 다들 제드를 보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아니, 눈빛들이 왜 그러십니까. 순수한 마음에 드리는 선물이라구요?”

억울하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룬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그 실룩 거리는 묘한 웃음은 뭔데?’

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불신을 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제드는 얼른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내밀었다.

“그러지 마시고 한번 보시죠!”

선물 포장은 제법 신경 쓴 티가 났다.

제철 꽃을 형상화 한 보석이 고급 리본 묶음을 마감한 상자.

손 빠른 그답게, 작은 인형의 몸으로도 민첩하게 돌아다니며 모인 이들에게 선물상자를 하나씩 안겨주었다.

“자자, 어서 풀어보십쇼.”

“…….”

“…….”

서로 얼굴을 바라본 이들이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포근한 질감으로 된 상자는 소리 없이 열렸다.

흑미가 눈이 동그래져서 안에 든 옷을 꺼내들었다.

“어? 잠옷이에요? 아멜리아 언니두요?”

“으, 응. 보, 보들보들……해.”

상자 안에서 나온 건 다양한 색의 잠옷이었다.

“웬 잠옷이야?”

룬의 말에 제드가 에헴! 하고 코밑을 슥슥 문질렀다.

“모처럼 손과 발도 생긴데다, 선물로 저렇게 좋은 대장간과 재료들. 불의 정령까지 빌려주셨잖습니까요? 이 제드, 응당 은혜를 아는 드워프로서 힘 좀 써 봤죠!”

그 말을 듣고, 룬은 옷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크리스티나가 도와주었군. 수면에 도움이 되는 축복 마법이 걸려있어.’

일전에 룬에게 선물한 담요와 비슷했다.

옷에 담긴 능력은 조금 달랐다.

기본적인 방수, 온도 조절능력.

그리고 수면 시 회복효과를 더욱 상승시키고, 불면을 없애는 효과가 붙어있었다.

‘거미 몬스터 아라크네의 마법 실이라. 마력 옷감을 뽑거나 다룰 수 있는 자는 몇 안 될 텐데.’

아무래도 주문 제작을 맡긴 듯 했다.

무기나 병장기.

금속이나 보석, 마력석 같은 걸 이용한 액세서리도 곧 잘 만들어내는 제드지만, 옷을 만드는 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확실히, 품이 좀 들었겠네.’

아마도 크리스티나의 도움이 컸으리라.

제드 나름대로 고민을 한 흔적인지, 본체와 인간형태를 오가는 해츨링들을 위해 저절로 옷이 변하는 옵션까지 붙어있었다.

고개를 든 룬이 입을 열었다.

“하루 이틀 만에 준비 될 물건이 아닌데?”

그 말에, 제드가 콧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룬 님이십니다! 약소하지만, 몸까지 찾은 마당에 뭐라도 해야 도리가 아니겠나 싶었거든요.”

샤샥 샤샥.

간사한 포즈로 손을 비비는 제드.

폼만 보면, 뇌물 한 사발 드린 후의 간신배 같은 표정이었지만…….

‘한 마디로 몸을 되찾은 날부터 계속 고민하고, 만들어 왔다는 소리긴 하니까.’

어째 수업시간과 식사 시간 외에 잘 볼 수 없더라니.

“이거 만드느라 바빴겠네, 제드.”

룬의 말에 제드가 씩 웃으며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흐흐흐.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요. 안 그래도 언제 드릴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딱 맞은 타이밍이 찾아오다니. 이 제드가 행운아죠. 자자, 어서 입어 보시죠!”

난쟁이 인형 제드의 재촉에 일행들은 떠밀리듯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잠시 후.

“이거 보세요! 흑미는 여우 모양이에요!”

뾰족 귀가 솟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우발을 형상화한 발 까지.

온도 조절 기능이 적용 된 옷이라 쾌적했고, 꼬리 부분은 자연스럽게 뒤에 나와 살랑거리고 있었다.

룬과 페르디키온 앞에 나와 빙그르르 몸을 돌린 흑미를 보며, 아멜리아가 말을 받았다.

“귀, 귀여워……흑미야.”

아멜리아는 토끼잠옷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물빛 머리카락이 조금은 차가워 보였던 소녀.

복슬복슬한 연분홍 토끼잠옷 덕분에, 아멜리아 역시 한층 귀여웠다.

다만, 동물 잠옷을 입은 게 어색한지 소극적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언니도요!”

“앗!”

포옥!

작은 여우잠옷의 흑미가 큰 토끼 잠옷 품에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룬은 자연의 생태계를 엿본 기분을 느꼈다.

‘토끼 사냥이냐고.’

하필 여우와 토끼.

포식자와 먹히는 자의 모습을 형상화 한 형태였다.

‘하긴 내가 남 말할 처진 아니지.’

에휴.

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제드가 불길한 웃음을 흘릴 때부터 알아봤더랬다.

“……제드. 고슴도치가 뭐냐.”

배가 하얗고, 등은 까만, 날카롭지도 않은 보송한 솜가시를 달고 있는 고슴도치 잠옷.

그게 룬의 잠옷이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완전 잘 어울리시는데요!”

엄지 척!

철면피, 혹은 자신감이 미쳐 날뛰는 진심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소리 해 주고 싶었던 룬을 막은 건, 지옥에서 올라온 듯 분노한 페르디키온이었다.

“제드 이 자식…… 이걸 선물이라고.”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다.

아주 살짝만 삐끗하면, 드래곤 피어(fear)에 가까운 분위기가 풍겼다.

노란색 배에 화려한 붉은 색 잠옷을 입은 그는…… 아무리 봐도 불닭이었다.

이건 내심 찔렸는지 제드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그게 말이죠, 저는 분명 불을 형상화 한 장식이 들어간 멋진 새를 주문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원래 주문한 게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룬이 물었다.

“설마 피닉스?”

“예입. 안 그래도 백야 님에게 영감을 좀 얻은 차라, 그림까지 그려서 보내줬는데 이렇게 왔지 뭡니까요.”

쿠구구구!

페르디키온이 당장 여기서 싸우기라도 할 듯 살벌한 기세를 풍겼다.

식은땀이 난 제드가 얼른 거물을 언급했다.

“아니 그게, 크리스티나! 님께서도 잘 어울릴 거라고 하시면서 마법까지 다 걸어주셔가지고요! 피닉스 하면 또 불의 일족이 자랑하는 신수니 잘 어울리실 거라 생각했는뎁쇼?!”

제드의 하소연과 핑계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화룡족 소년의 입가가 실룩인다..

“그……래……서.”

꽉!

불닭……아니, 새가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감히 불의 우두머리가 될 자에게, 이런 불닭 같은 옷을 준비했다……?”

새의 다리가 힘 있게 제드에게 다가갔다.

제드의 입장에선 진짜로 거대한 보스 몬스터가 다가오는 기분이었지만.

“끄악! 제드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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