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룬은 제드와 마주친 시선을 슬쩍 돌렸다.
‘저걸 어떻게 도와주냐.’
도우려면야 할 순 있다.
하지만, 이건 좀 혼나야 한다는 게 진심이기도 했다.
디자인을 참고해도 하필 백야를 참고하다니.
백야는 귀엽게 생겼지만, 미묘하게 장닭 같은 느낌을 풍기는 녀석이었다.
‘솔직히 이 상황을 부추긴 건 크리스티나겠지만…….’
페르디키온의 성정을 진작 알고 있을 그녀야말로, 어찌 보면 이 사태를 초대한 진정한 배후.
그러나, 페르디키온은 이미 분노의 타겟을 제드로 삼은 후였다.
퍼어엉!
“끄아아아악!”
분노의 일격.
폭발이 멋지게 터지는 그 안에서, 불의 새가 창공을 날아다녔다.
이빨 요정
룬은 화염 마법을 피하며 잘도 도망치는 제드.
그리고 더더욱 열을 내며 쫒기 시작한 둘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흑미와 아멜리아, 백야를 화마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장소에서 떨어뜨렸다.
콰아앙!
뒤쪽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당장 거기서 나오지 못하겠나!!”
“아이고, 여기서 나가면 통구이 시키실 셈이잖습니까요!”
불지옥에서 소환 된 악마를 보는 눈이 된 제드가 블랙 드래곤의 유물 중 하나를 쥐고 그 뒤에 냉큼 숨었다.
페르디키온이 어둠 일족의 물건을 파괴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건 자충수였을 터.
문제는 이 괘씸한 꼼수를 모를 페르디키온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화룡족 소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자식…… 진짜 죽고 싶나!”
“히익!”
궁지에 몰린 제드의 눈이 힐끔힐끔 룬 쪽을 향했다.
어둠 일족의 물건을 방패 삼아놓고 도움을 바라다니.
한숨을 쉰 룬이 입을 열었다.
“제드, 그냥 한 번 맞고 끝내는 걸 추천해.”
“아니, 룬 님. 한 대만 맞아도 타죽을 것 같은데요!?”
안절부절 하던 제드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룬은 어깨를 으쓱였다.
“엄살이야. 한 번 맞는 걸로 어떻게 될 리 없어. 그 몸, 실용적으로 만들었다고.”
외모야 난쟁이지만, 들어간 품이 상당했던 만큼 제드의 몸은 제법 튼튼했다.
‘나무 촉감이라 너무 딱딱하거나 차지 않지만, 강도는 어지간한 금속보다 강하지. 게다가 기본적인 속성 저항도 있고.’
즉, 괘씸한 짓을 한 제드가 한 대쯤 맞아도 충분히 버틸 몸이라는 말이다.
룬은 지그시 제드를 보며 말했다.
“그 몸은 마법을 쓸 수 있는 신체야. 불의 힘을 견디는 데도 무리 없고.”
“마법이요!?”
경악하는 제드를 본 룬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안 하셨는뎁쇼!”
드워프로서는 불가능했던 마법까지 사용 가능한 신체라니!
제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제드를 보며 룬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대장간에서 일 해야 하는 데, 애초에 쉽게 불 타는 몸을 주었을 리가 없잖아.”
‘온갖 마력재료와 마력의 불꽃을 다뤄야 다양한 장비를 만들어 낼 텐데.’
룬의 말과 함께, 페르디키온이 그를 구석으로 완벽하게 몰렸다.
불닭잠옷을 입은 페르디키온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잡았다.”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한 제드.
눈동자가 떨리는 모습을 본 룬이 말을 이었다.
“이 기회에 한번 실험해 보지?”
“히익-! 하필 불인데요!?”
슈욱!
그 순간, 거침없는 불주먹이 제드의 귀 옆을 스쳤다.
“날 믿고 해봐.”
갈색 드래곤 란드가 제작해 주었다지만, 기본적인 성능에 대한 상의는 룬과 함께였다.
비록 난쟁이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는 있지만, 다양한 속성 인장을 사용해 만든 몸.
쉬이 어찌 될 신체가 아니었다.
“끄악! 역시 안 되겠습니다아!”
하지만 화끈한 불주먹에 겁을 먹고 작은 몸을 이용해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한 제드.
그 광경을 본 룬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진작 한 대 맞고 끝냈으면 깔끔하게 끝났을 텐데.’
자꾸 말대꾸를 하며 반항하고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니, 페르디키온이 더 약이 올라 살벌해지고 있잖은가.
하긴, 살기를 품은 드래곤 족에게 자발적으로 한 대 맞는 게 쉬운 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겠군.’
룬은 몸을 돌리며 아멜리아와 흑미에게 말했다.
“자, 저 쪽은 서로 잘 정리하게 그냥 두고 다들 이쪽으로 와.”
태연한 룬의 행동과 달리, 흑미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제드 아저씨, 괜찮을까요?”
“세계수 나무가 워낙 튼튼하고 성능이 좋기도 하고…… 설마 형이 제드를 죽이진 않을 테니까.”
고개를 갸웃 거린 흑미가 나름 수긍하는 눈치였지만, 아멜리아는 영 안절부절못했다.
“루, 룬…… 살기가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데……지, 진짜 그냥 두어도…… 돼?”
아멜리아의 말에 룬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제드는 불에 워낙 친숙했던 드워프였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싸우는 모습을 보니 내 물건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 한 듯싶고.’
퍼엉!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폭발이 터졌다.
아무래도 끝나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할 듯싶었다.
먼저 자리를 잡으러 움직이던 룬은, 문득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데.”
“이상해요?”
평소와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아멜리아. 혹은 제드와 듀라한, 흑미가 있는 탓인가 싶었던 룬.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토끼 잠옷을 입은 아멜리아 머리 위 백야를 보았다.
“삐이약!”
날개를 펴고 우는 새.
룬은 그를 지그시 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도 아니야.”
즉시 룬이 검은 어둠을 그림자 속에 스며들게 했다.
그 때.
-퀘엑!
“?”
거칠고 걸걸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무언가가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걸려들었다.
괘씸한 제드의 볼을 꽉 쥐고 웃음을 흘리던 페르디키온도, 식은땀 뻘뻘 흘리던 제드도.
흑미와 아멜리아, 심지어 백야까지.
모두가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크엑! 살려줘!
지익 지익
검은 어둠으로 된 리본에 다리를 잡혀 질질 끌려나온 녀석은 낡은 옷을 입고, 특이한 귀를 가진 본 적 없는 종족이었다.
-놔라, 놔!
낡은 옷만큼이나 오래되어 금방이라도 천 조각이 떨어질 것만 같은 보따리를 매고 있는, 흰 수염이 부숭부숭하게 난 손가락만 한 자가 거기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룬이었다.
“넌 뭐야?”
미간을 구긴 룬 앞까지 끌려나온 이상한 생명체.
그는 쌀알 크기만 한 검은 눈을 들어 룬을 바라보았다.
-이, 이런 거친 행동이라니…… 이 몸은 ‘이빨 요정’이니라!
“?”
의아한 눈이 된 룬 옆으로, 페르디키온이 제드의 뒷덜미를 잡고 돌아왔다.
제드의 볼이 붉어진 게 역시 한 대 시원하게 맞은 게 틀림없었다.
그걸로 깔끔하게 정산하긴 했는지, 페르디키온이 제드를 한 쪽에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둠의 리본에서 발을 빼려고 낑낑 거리는 자를 내려보았다.
“설마 그 ‘이빨 요정’ 인거냐?”
-그, 그렇다. 그러니 이것 좀 놓아주지 그러나?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은 들은 체 만체하며 룬에게 물었다.
“어떻게 잡은 거냐? 실물을 목격한 건 처음이다만.”
순수하게 눈을 깜빡인 룬이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잡을 수 없는 종류라면 어둠도 마찬가지니까. 환상체를 상대할 수 있었어.”
-그럴 리가! 단순한 어둠만으로 우릴 잡을 순 없어! 심지어 나이도 어린 해츨링이!
룬의 대답에 당황한 요정이 코를 실룩였다.
-고작해야 100년 좀 넘은 정도의 해츨링이었는데. 환상체를 어떻게 잡는 게야.
이빨 요정이 구시렁거렸으나, 룬이 그걸 알려줄 의무나 필요는 없었다.
대신, 룬은 다른 서두를 꺼냈다.
“이빨 요정이라면 나도 짐작 가는 건 있는데. 자연스럽게 유치가 빠질 때 와서 그걸 가져가는 녀석들 아니야?”
부루퉁한 눈이 된 이빨요정 대신, 아멜리아가 신기해하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 요정이 그럼, 내 이도 가져가는 거……야?”
그러자, 뭉툭한 코를 실룩인 이빨요정이 대차게 성을 내었다.
-평범한 이빨 정령이 아니다! 나는 가치 있는 이빨만 가져가는 대정령이란 말이다!
‘이 녀석 따위가 대정령?’
룬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이빨 요정이 콧숨을 한 차례 크게 내쉬었다.
-세상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블랙 드래곤 일족 해츨링의 유치라니. 이건 내가 직접 회수해 갈 만큼 귀한 일이지. 암, 암.
팔짱까지 척 끼고 의기양양해 진 요정을 보던 룬.
그는 요정이 한 말 중에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짚어냈다.
“그러니까, 내 이빨이 곧 빠진다는 소리야?”
-그래.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룬을 향했다.
이는 다소 민망할 정도의 집중이었는데, 룬은 입을 오물거리며 확인하더니 대꾸했다.
“흔들리는 이가 없는데.”
팔짱을 낀 이빨요정이 그것도 모르냐는 눈으로 대꾸했다.
-미리 점찍어 두려고 온 거다. 딴 놈들이 쓸데없이 노리기 전에, 내가 선점해 두려 했지.
코를 실룩이던 이빨요정이 갑자기 표정을 확 구겼다.
-일 전에, 마지막 블랙 드래곤의 유치를 가진 녀석이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걸 가졌다고 신나게도 자랑할 때 얼마나 꼬시던지!
“?”
어째, 참 개인적인 이유가 튀어나왔다.
이빨 요정은 음흉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그 이빨을 가져가면 놈의 꼴사나운 모습을 그만 봐도 되겠지!
“…….”
“…….”
사적인 동기였다.
더불어 쉽게 물러날 기세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빠지려면 시간이 걸릴 건 뻔한 일.
룬은 불길함을 담아 물었다.
“설마, 내 이가 빠지는 날까지 이렇게 들락거리려고?”
-물론이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빨요정.
룬은 한숨을 쉬었다.
‘귀찮아졌네.’
생니를 뜯어줄 수는 없고, 한동안 근처에서 아무렇지 않게 출몰하게 될 터다.
심지어 그 상황이 얼마나 반복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이들 몰래, 이무기로서 살았던 수준으로 행동하고 훈련하고 쉬던 그.
만약 이빨 요정에게 그가 사실 다른 세계의 이무기였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면?
룬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필이면, 안 그래도 크리스티나에게 주의를 끈 참인데.’
더 이상의 주목은 사양이었다.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장이라도 혼을 내서 쫒아보내?’
그가 지닌 어둠이라면 이빨 요정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성을 내며 쫒아내려니, 다들 실제로 보기 힘든 존재에게 관심이 많아보였다.
심지어 흑미는 눈이 반짝반짝 해져선, 무릎을 굽히고 앉아 이빨정령과 진지한 대화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