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242)

페르디키온이 그 말을 하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영 손패가 좋지 않은 탓이었다.

룬은 무표정을 유지하며 생각했다.

‘저 녀석은 전부터 묘하게 카드 운이 별로더라니. 도박 운이 영 안 좋네.’

룬이 방어할 만한 카드를 고민하고 있을 때, 제드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차차! 깜빡할 뻔했네요!”

마치 좌판에 깔린 장신구를 대충 주워보듯, 제드가 거만한 손놀림으로 바닥에 미리 놓였던 마법카드를 뒤집었다.

해당 카드는 ‘반사 거울’

아멜리아조차 이 카드 조합이 뭔지 알아챘다.

“데, 데미지 광역 반사……?”

“껄껄껄! 맞습니다. 알아채셨으면! 이제 다아 죽어라아아아!”

캬캬캬캬!

광기의 대마법사 제드가 필드위에 대 폭발 이벤트를 발생시켰다.

‘그나마 난 거북이를 뺏어 왔으니, 한 턴은 넘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드와 룬.

둘의 승부가 되리라 예측되는 상황.

그리고, 초심자의 운이 빛을 발했다.

“나, 난…… 요정의 기도로, 죽은 요정족 중 하나의 카드…… 힘을 비, 빌릴게.”

무척이나 망설이던 물빛 소녀가 기교도 없이 조심스레 카드 한 장을 내려놓았다.

“요, 요정왕의 가호…….”

파앗!

카드가 반짝이더니, 아멜리아의 잠옷이 일순 희미해지고, 카드위에 그려진 요정왕의 옷으로 바뀌었다.

“우와아! 아멜리아 언니, 예뻐요!”

햇살을 깎아 만든 보석이 빛나는 왕관과, 달빛을 제련해 만든 귀걸이가 반짝였다.

아멜리아의 패착으로 제대로 활약해 보지 못하고 간 요정왕과 기사 카드.

저승에 고이 묻혀있던 카드는 요정족 수호자인 아멜리아의 부름을 받아 깨어났다.

“그, 그게 왜 여기서……?”

더듬거리는 제드를 탓할 수는 없었다.

아멜리아가 워낙 활약을 못하다보니, 경계 대상에서 지워져 있었으니.

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죽어있던 아멜리아의 요정들이 전부 되살아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어, 아멜리아가 공중에 뜨는 이벤트 글자를 착실하게 읽었다.

“오, 오늘은…… 요정이 깨어나는 날. 원한을 품은 요정은 원한을 갚……고, 은혜를 받은 요정은 은혜를 가, 갚……을 거야.”

더 잘 할거야.

추천 대사는 다들 하나씩 있었지만, 진짜로 말 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워낙 대사가 저 모양이니까.

한데, 쑥스러워 하면서도 다 말 한 아멜리아는 얼굴이 삶은 문어처럼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저런.’

하지만 그녀의 부끄러움에 공감 해 줄 사람은 룬 외엔 없었다.

카드 운은 참 좋았는데, 결국 또 져버린 제드.

페르디키온은 패배를 예감하고 씁쓸한 눈치였고, 흑미는 감탄하고 있었다.

룬은 이 중 유일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소생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인과응보지 이건.’

그런 생각을 하며.

아멜리아의 거북이를 보내준 룬은 그와 아멜리아 외에 다 전멸한 전장을 보며, 마지막 카드를 만졌다.

솔직히, 좀 치사한 사기카드긴 하다만.

룬이 피식 웃으며 카드를 내렸다.

“이걸로 끝이겠네.”

“!”

카드를 쥔 게임 사용자를 직접 공격하는 카드.

공격력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이미 엄청나게 피해를 입었던 아멜리아에겐 치명타로 작용했다.

“아…… 져,졌어…….”

아쉬워하는 눈치인 아멜리아에게 룬이 칭찬했다.

“훌륭한데? 처음인데도 잘 하더라.”

빈말이 아니었다.

룬은 카드 패를 모으며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패배하긴 했지만, 용케 이벤트도 잘 만들고 패도 괜찮게 사용하고’

진심이 담긴 룬의 말에 아멜리아가 작게 반색을 했다.

“저, 정말……?”

카드를 정리하던 흑미가 웃으며 엄지를 척 치켜들어주었다.

“힛. 완전 멋졌어요. 아멜리아 언니두 재미있었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멜리아가 긍정했다.

“으, 응.”

즐거웠다.

늘 혼자 어둠속에 남아야 했던 그녀다.

처음으로 여럿이 모여 게임을 한다는 게.

승부를 겨뤄보고, 이기기도, 지기도 해보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서……무서워.’

두려웠다.

혹시라도 혼자가 된 과거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모르고 살던 때야 괜찮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생동감.

함께 놀며 웃는 나날.

여기 모인 이들과의 흐뭇하고, 기쁘기도 한 시간들.

그것들이 사라진다는 건 이제 상상하기 힘들었다.

‘미움……받을까봐 두렵고, 떠나갈까 봐 불안해…….’

그런 생각을 하며, 아멜리아가 모인 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룬에게 시선이 머물렀을 때.

심해에서 룬이 말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네가 나를 만난 순간부터 이미 바뀌기 시작했잖아. 안 그래?]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아있어서.

물빛 소녀는 불안할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응, 나는 이미…… 혼자 심해에 있던 아멜리아가 아닌 걸.’

한 호흡, 숨을 차분히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쉰 그녀.

두려울수록 용기를 내자고 다짐하며, 맑은 푸른 시선을 들어 웃어보였다.

“다, 다음엔…… 더 잘 할거야.”

“오.”

가벼운 탄성을 흘린 룬이 슬쩍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그거 기대되네.”

이미 카드패가 돌려지길 기다리고 있던 페르디키온이 말을 얹었다.

“당연하다. 뭐 하나? 카드 패 돌리지 않고.”

비록 이번판은 꼴지를 했지만, 마치 일 등 한 것처럼 당당한 페르디키온.

“어허어~ 맞는 말씀. 그럼 카드 돌아갑니다!”

손빠른 제드가 냉큼 신이 나서 패를 돌렸다.

***

들썩

고슴도치 잠옷을 입고 숙면한 해츨링이 몸을 일으킨다.

“뀨우우.”

졸음에 겨워 쓰러져있던 룬이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볼을 앞발로 문지른 룬이 문득 제 앞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 본체로 돌아갔지.’

생각과 동시에, 꼬리잡기 게임을 하자는 통에 황금팔찌를 빼 주머니에 넣었던 게 떠올랐다.

‘아멜리아 빼곤 다 참여했지.’

슥 둘러보니, 간식 봉지며 이불.

음료통까지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구르고 있다.

그야말로 광란의 밤이었다.

‘늦게 배운 게임에 날 새는 줄도 모르고 하더니.’

한 번 게임을 해 봤던 이들은 이미 즐거움에 맛을 알아서.

처음 게임 해보는 아멜리아 역시 후반에서는 열중하느라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차게 말아먹기도, 무척 잘 하기도 하며 극과 극을 경험하다보니 난이도는 천차만별이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이들과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이어져 파장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하루 쉬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다들 수업 때 엄청 고생했겠는데.’

임시 휴일로 결정한 크리스티나의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지금이다. 혼자 볼 일이 있었는데 잘 됐군.’

생각을 마친 룬이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고 주둥이를 벌렸다.

캬하합!

묘한 피곤함에 룬은 하품을 했다.

그리고 걸어나가려는 데.

“?!”

쭈욱!

꼬리가 뭔가 부드러운 것에 잡혀 몸이 기우뚱 흔들렸다.

‘켁.’

하마터면 입 밖으로 컥 소리를 낼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은 룬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홱 돌아보니, 흑미가 룬의 꼬리를 한 손으로 잡고 벌렁 누워 자고 있었다.

“이잉…… 흑미 꼬……예요…….”

“…….”

그러더니 냠냠 거리며 입맛을 다신다.

행동이나 말하는 걸 보니, 손으로 고기 뜯는 꿈이라도 꾸는 게 틀림없었다.

‘어제 하늘 모양 젤리랑 과자까지 잔뜩 먹었으면서.’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맛있어서 더 탐욕스럽게 원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

룬은 꼬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당겼다.

꽈악!

흑미가 끄응, 하더니 손아귀 힘을 꽉 쥐었다.

‘큭! 힘이 뭐 이리 쎄?’

수인 마족이라지만 본체가 장미인데, 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강력함이 느껴졌다.

‘역시 꼬리가 늘어서 그런가?’

잠시 생각해 본 룬은 그게 맞겠다고 확신했다.

구미호의 특성을 그대로 받았다면, 꼬리가 늘었으니 쪼그마한 아이라 할 지라도 힘이 강해지는 게 당연했다.

‘여기서 마법을 사용하기도 좀 그렇고.’

그랬다간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 종족들이니만큼, 금세 깰지도 모르는 상황.

룬은 몸을 당기며 잡힌 꼬리를 빼기 위해 애썼다.

“뀨욱.”

‘놔라.’

씨름하던 룬은 꼬리를 당기다 뒤로 벌렁 굴러자빠졌다.

발바닥이 하늘로 향한 채 있으려니, 얼얼함이 등과 꼬리에서 느껴졌다.

“뀨후.”

어쨌든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므로, 그는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느 정도 떨어진 후, 룬은 적당히 복도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군.’

밤새 왁자지껄했던 분위기와 달리 조용하고, 햇살이 가만히 들어오는 복도.

묘한 편안함을 느낀 룬이 주변을 탐지했다.

어제 확인했던 이빨 요정의 기척이 확실히 느껴졌다.

“뀨.”

‘찾았다.’

룬이 고개를 돌려 천장 한 곳을 지그시 바라보자, 카멜리온처럼 색을 바꾼 이빨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이 몸을 찾은 겐가?

은근하게 물어오는 표정이 제법 노골적이었다.

룬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팔짱을 끼었다.

“뀨뀨.”

[그래.]

고개를 끄덕인 룬을 보며, 이빨 요정이 천장에서 낙엽 떨어지듯 가볍에 내려왔다.

-그 말은, 이빨을 거래 할 준비가 된 것인가?

[거래라.]

룬의 시선이 제법 서늘했다.

외형은 분명 작은 해츨링이건만, 어지간한 성체를 대하는 듯 몸이 절로 굳게 만드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 전에 말은 바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빨 도둑 요정.]

-아니, 자네까지? 대체 이 늙은 요정에게 무슨 망발을 그리 서슴없이 해대는 게야!

벌컥 화를 내려는 이빨 요정을 보며 룬은 차분히 손을 움직였다.

스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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