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민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던 룬.
이빨 요정이 초조함을 참고 기다리자, 룬이 슬쩍 눈을 돌려 그를 보았다.
[하긴, 약속을 어길 생각만 없다면 좋은 방법이네. 좋아. 그렇게 하자.]
-!
원하는 답을 들은 요정이 코를 실룩이며 반색을 드러냈다.
-잘했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네 신체를 걸고 약속해 주면 좋겠는데.]
이건 기회다!
이빨 요정은 저도 모르게 히죽 거리려던 걸 참았다.
‘약속’ 역시 드래곤의 언령만큼은 아니어도 강한 강제성을 띠었다.
‘역시, 아무리 뛰어나보여도 아직 어린 애새끼였어!’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이빨을 가져가면, 마족은 이 어둠 일족 꼬마의 혼을 거둬갈 것이라는 말을 똑똑히 듣고 온 참이다.
이빨 요정에게 있어 해츨링 꼬마의 혼이 어떻게 되든 상관인가?
오히려 사라져주면 좋았다.
마족에게 이 어린 녀석의 혼이 넘어가든 말든.
그저 수집 욕구를 채울 이빨만 얻으면 늙은 요정으로서는 최고의 결과였으니까.
‘큭큭, 이놈이 없어지면 이제 어둠 일족 치아를 가질 놈들도 없겠지!’
수집품의 희소가치를 높일 수 있다면, 이 건방진 해츨링을 벼랑에 밀어 떨어뜨리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희열이 올라와 몸을 떨고 있자, 룬이 말을 툭 던졌다.
[너도 신체를 걸려니 안 내키는 모양이지. 하지 말까?]
아무래도 몸을 떠는 게 자신 없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라 여긴 이빨 요정이 손을 저어댔다.
-무슨 소리! 하지, 하고말고!
속내를 숨긴 룬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먼저.]
하나씩, 룬은 필요로 했던 내용을 입에 올렸다.
[리즈에와 연결 된 길뿐 아니라,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길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힘을 넘겨. 어길 시 네 몸이 사라지는 걸로.]
-아니, 어린 놈이 어딜 덤터기 씌우려고!
얼척 없는 말을 들은 이빨 요정이 벌컥 화를 냈다.
-뭐 그런 억지가 다 있느냐! 원한 건 지금 이 길 하나 뿐이라면서!
저도 모르게 일갈한 그를 지그시 보는 룬.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붉은 시선이 뭘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룬이 입을 열었다.
[기왕 하는 거, 다른 길도 사용할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대신 이빨을 주고, 너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내 신체도 걸고 약속할게.]
어이가 없어진 이빨 요정이 입을 붕어처럼 뻐끔 거렸다.
‘뭐 저런 사악한 해츨링이!’
터무니없는 조건이었다.
요정의 길을 보증해 주고, 이빨만 받는 거래로 쓰려던 ‘약속’.
이 맹랑한 해츨링이 한 술 더 떠서, 다른 길들도 내놓으라며 그 대가로 고작 이빨 요정의 안전을 걸고 있었다.
팔짱을 낀 룬이 말을 이었다.
[너도 길을 만드는 힘이 여기 처박히는 것 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아?]
-……!
이빨 요정은 입술을 깨물며 뒷목을 잡았다.
기가 막힐 만도 했다.
‘이빨만 받아내면 죽을 해츨링 녀석이.’
그렇지만 이 거래는 거짓이 없어야 했으므로 늙은 요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 왔던 길이라면 통제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만드는 힘은 준대도 못 써먹을 게다. 이건 자격 있는 요정만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설명을 듣고도 룬은 태연했다.
[줄 수는 있다는 말이네.]
그 말에 이빨 요정은 룬을 미친놈 보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룬이 어떤 조건을 걸든 이빨 요정은 상관없었다.
‘이놈, 좀 전에 내가 이빨을 가져가면 마족이 혼을 가져가 버리겠다 말한 걸 까먹었나?’
아니지, 하고 이빨 요정은 생각을 달리했다.
‘그래. 나이가 어리니 제대로 이해를 못한 게 틀림없어!’
화를 삭인 이빨 요정이 룬에게 제안했다.
-그럼, 만약 네가 요정의 길을 다룰 수 없게 되면 넘겼던 능력과 길을 돌려받는다는 조건을 추가해주게나.
[알겠어.]
됐다.
밥줄이나 다름없는 요정의 길.
그걸 가져간다 한들, 저 까만 해츨링이 마족에게 혼을 뺏기고 나면 요정의 길을 통제하진 못할 터.
그러면 되찾아 올 수 있을 터였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멍청하군!’
어린 녀석이라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파악 못했다고 생각한 이빨 요정.
그는 관대하게 어조를 바꿨다.
-커험……! 내가 좀 흥분했네. 아니 이런 조건을 내는 놈을, 아니 해츨링은 본 적이 없다보니 참.
그렇게 말하는 이빨 요정을 보며 룬은 생각했다.
‘속아 주기도 힘든 놈이네.’
그야말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이었다.
연기하느라 고생 많아 보이는 이빨 요정을 보며, 룬이 말했다.
[더 할 말 없으면 ‘약속’한다?]
-밑지는 짓을 하게 되는구먼. 그래. 하세, 하자고!
대충 선심을 쓴다는 듯 말하면서도, 늙은 요정은 조건을 재차 언급했다.
-길을 내주는 대신 나를 그냥 보내주고 자네 이빨도 전부 준다는 조건이네. 그리고 이를 어길 시, 신체를 잃는 게지!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되네.
그러자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후회 안 하는 거지?]
되물어오는 룬.
이빨 요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이 혹시 이제 와 무르려 드는 건?’
물론, 이빨 요정 역시 신체를 걸었으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괜히 쫄아 여기서 발을 빼려들었다간 의심을 살지도 모르는 일.
나이 든 요정은 되레 큰 소리를 쳤다.
-자네는 완전한 성체가 아니니 ‘언령’만으로는 강제성이 부족하잖나? 이 정도 제약은 걸어야 나도 믿을 만하지!
말만 들으면 이빨 요정의 말을 의심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룬은 순순히 그 조건에 응했다.
[좋아. ‘약속’할게.]
마력을 담아낸 말이 허공에 힘을 퍼트렸다.
잘 받을게
룬은 공을 들여 글자를 새기듯, 천천히 약속의 말을 이었다.
[내 이빨을 네게 주고 위해를 가하지 않고 보내줄 것. 이 조건을 들어주지 않게 되면 ‘이 신체’가 소멸한다.]
고슴도치 잠옷을 입은 룬이 탁, 하고 자신의 가슴을 앞발로 두드렸다.
[네 차례야.]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이빨 요정이 이어 약속했다.
-이빨 요정인 내 몸을 걸고, 여기 ‘룬’에게 요정의 길을 만드는 능력을 주고 내가 이미 만든 길도 모두 조작할 수 있도록 한다! 단, 길을 다룰 수 없게 되면 이 능력들은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이 몸 또한 소멸할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 마력이 잠시 연결되었다.
우웅.
미약한 마력의 떨림과 함께, 언령의 제약이 걸리는 느낌.
‘약속’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룬은 속으로 조용히 웃음 지었다.
‘걸렸네.’
마찬가지로 이빨 요정 또한 속으로 환호를 외쳤다.
‘되었다!’
비록 해츨링이라 해도 존속을 걸고 하는 언약인 만큼 이 멍청한 해츨링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했다!
‘내가 저 놈의 이빨을 가지고 떠나면, 그 마족이 저 건방진 어둠 일족 해츨링의 혼을 가져갈 게지.’
승리에 도취된 이빨 요정이 이어 생각했다.
‘그럼 내 길도 되찾고, 마족화 된 엘프의 이빨도 가지고!’
물론 일시적이라 해도 길의 주도권, 소유권을 넘기는 일은 다소 씁쓸하긴 했다.
하지만 한동안 불편할 뿐.
저 해츨링이 마족에게 혼을 뺏기면 돌아올 힘이었다.
‘호오, 그래그래. 힘만 되찾으면 저 괘씸한 까만 해츨링이 마족에게 혼째로 잡혀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어!’
이빨 요정은 꿈에 부풀었다.
멍청하고 평범한 다른 이빨 요정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코 앞에 이른 그 순간.
꽈아악!
갑자기 이빨 요정의 몸이 한껏 조여지기 시작했다.
-커헉, 뭐, 뭐냐!
어리둥절해진 그의 눈앞에 새까만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다시 존재가 지워지기 시작함을 감지한 이빨 요정이 외쳤다.
-날 보내주기로 했잖으냐! 야, 약속을 어길 셈인게냐……!
좀 전까지 순하고 어리숙해 보이기까지 했던 해츨링은 무감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난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서.]
그 말을 끝으로 룬의 흑진주가 이빨 요정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너, 너! 약속을 잊었느냐? 이런 짓을 했다간, 네 몸은 소멸하고 만다!
[이 ‘신체’ 말이야?]
앞발이 다시 한번 제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파삭!
룬의 모습이 깨진 도자기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어린 해츨링의 금이 간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깝기는 해. 내가 최근에 만든 ‘인형’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졌던 거니까.]
이빨 요정이 어둠에 먹혀있던 ‘5분’ 사이, 룬이 바꿔치기 한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로 만든 ‘미끼 인형’.
틈틈이 인형 제작을 수련하던 도중 흔치 않게 제작에 ‘대성공’한 인형이었다.
[하지만 이게 대가라면 어쩔 수 없지.]
파삭!
파사삭!
‘약속’에 룬이 건 인형의 몸이 완전히 금이 갔다.
그리고 천천히 조각나 흘러떨어졌다.
룬은 자신의 모습이 흩어지는 걸 잠시 응시했다.
[길, 잘 받을게. 그리고.]
이빨 요정이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흑진주 속으로 빨려 들어간 상태로는 어떤 저항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빠져나갈 수 있는 ‘요정의 길’을 만드는 능력조차 모두 룬에게 넘겼으니까.
[이거라면 그리 괴롭진 않을 거야.]
흑진주 안에서 위를 본 이빨 요정은 거대하고 가는 침이 구슬에 박혀오는 걸 보았다.
이빨 요정은 직감했다.
죽는 것 보다 더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완전히 흑진주 안에 갇힌 늙은 요정의 입이 뻐끔거렸다.
-안돼에에에에!
푸욱!
절규가 무색하리만치 작고 조용한 소리가 퍼졌다.
이빨 요정의 몸까지 검은 침이 뚫리고, 요정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했다.
룬은 구슬을 살폈다.
이빨 요정은 어떤 존재감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한 걸 보고 연습한 건데, 잘 됐군. 이 정도면 세상에 나오진 못하겠지.’
일을 마친 룬은 앞발 위에 마력 열쇠를 띄웠다.
우웅! 우웅!
열쇠는 오색빛깔을 흘리며 반짝였다.
마치, 어떤 색깔의 열쇠든 될 수 있다는 듯.
룬은 시험 삼아 탁하고 묘하게 낡은 빛으로 고정하고 열쇠를 사용해 보았다.
곰팡내가 나는 나무문이 만들어졌다.
룬은 직감적으로, 이 문 너머에 이빨 요정의 은신처가 있음을 알았다.
‘좋아. 역시 이 열쇠로는 요정의 길을 갈 수 있군.’
열쇠의 색이 다양한 건, 이미 만들어진 길들을 상징하는 것이라 직감한 룬.
마음 같아서는 열쇠마다 어떤 장소와 연결 되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으나,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그런 일까지 벌이는 건 무리였다.
‘지금은 이 힘을 쓸 수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됐어.’
룬은 어둠을 거두었다.
검은 공간이 사라지고, 자리에는 고슴도치 잠옷을 입은 해츨링의 모습이 자리했다.
“뀨후우.”
한숨을 쉰 룬이 아공간 주머니 안에 이빨 요정이 담긴 검은 구슬을 굴려 넣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