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아멜리아가 입을 오물거리다 말했다.
“고, 고마워…… 룬. 우, 우리가 밤 샌다고…… 이런 새로운 간식을…… 준비 하, 한 거지?”
“그야 그렇긴 한데.”
고영양과 마력을 보충하는 회복 재료인 꿀을 잔뜩 넣어만들 만한 걸 고민해보니 ‘타래과’가 생각났다.
‘혼자 몰래 먹는 것도 이상하니 잔뜩 만든 건데.’
하지만 페르디키온이 아멜리아의 말에 맞장구를 친 탓에, 부정할 타이밍을 놓쳤다.
“역시 그랬군. 내 아우답다. 이런 희한한 모양의 과자를 새로 내놓은 걸 보니, 신경 쓴 거로군.”
감이 좋다고 해야하나?
미묘하게 페르디키온의 말이 일부 맞았다.
‘아주 신경을 안 쓴 건 또 아니긴 하다만.’
룬이 혼자 대놓고 힘을 회복하는 음식을 골라 먹었다간, 괜한 걱정을 살 게 뻔했다.
하지만 다 함께 먹으면 그리 티 나지 않겠지 싶어 겸사겸사 만든 것도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 또 그 수업을 들어가야 하니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했지.’
결국, 룬은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적당한 대꾸를 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다 함께 먹으려고 만든 거니까.”
정직할 수 있는 부분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상당했다.
“우와! 이거 그럼, 룬 님이 우리 생각해서 만든 거예요?”
“삐약? 삐약삐이이약!”
흑미는 눈이 반짝였고, 백야는 말을 알아들은 건지 제 자리에서 빙빙 돌며 날개를 파닥였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만…….”
그러자 제드가 낄낄 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껄껄! 가만 보면 룬 님도 참 부끄러움을 타신다니까요?”
작은 인형의 몸으로 타래과를 줄창 입 안에 넣기만 하던 제드.
룬은 그를 지그시 보았다.
‘저 놈은 낄 때 안 낄 때를 구분 못하나.’
마치 얼레리 꼴레리 하며 놀리고 싶은 눈으로 제드가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남자라면 말이죠! 이 때 멋있게 말 한마디 촤압! 하고 날려야지요!”
그러더니 꿀시럽이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슥 닦은 제드가 그윽하고 찐득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오다 주웠다.”
나름대로 무심하게 행동하려는 듯, 진지한 얼굴로 타래과를 건네는 제드.
대체 어떤 생명체가 저런 걸 좋아할지, 룬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저 눈은……좀 느끼했다.
오죽하면 저 쪽에 있던 페르디키온도 미친 드워프 보는 표정일까.
“……치워.”
결국 고개를 저은 룬이 미간을 구기자, 제드가 쩝쩝 소리를 내며 타래과를 입 안에 물었다.
“이거 참. 역시 룬 님이 아직 크셔야 이 매력을 이해할 수 있으실 텐데 말입죠.”
“…….”
앞으로 천 년을 더 큰다 해도 저건 평생 몰라도 괜찮지 싶었다.
부정의 의미로 룬이 말없이 고개를 저어내자, 흑미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근데요. 룬 님은 크면 어떤 드래곤이 되는 거예요?”
그 질문에 다들 왠지 모르게 따뜻한 눈을 하고 룬을 바라보았다.
아니, 뜨거운 눈인가?
맛있는 새 간식도 있고, 영양 가득한 꿀과 얼음꽃으로 분위기가 즐거워 진 건 알겠지만, 어쩌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가 튄 건지.
그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페르디키온이었다.
“당연히 나 같은 훌륭한 지배자가 되겠지. 룬은 불의 일족의 장로인 내 의형제다. 내가 인정할 만큼 걸맞게 용감하고 행동력도 있는 녀석이지.”
암, 당연히 그렇고말고, 라며 당연하다는 듯 말을 맺자 의외로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하, 하지만…… 룬은 물의 일족의 인정……을 받았기도 해, 해요. 깊은 어둠과 어, 어울리는 심해처럼…… 차분하고 속 깊은 드래곤으로 크, 클 거 같아요.”
불과 물의 드래곤 족 아이들이 서로 한 치의 물러남 없이 시선을 마주쳤다.
파직!
룬은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목도하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살벌하네.’
이 무거운 분위기가 아무렇지 않은 듯 흑미가 한 마디 거들었다.
“흑미 생각은요! 룬 님이 잘 때 소원 들어주는 별 이야기 같은 것도 많이 해주는 상냥한 드래곤이 될 거 같아요!”
음.
저건 확실히 아니다.
물론 이야기를 해 준 적이 한 번 있긴 했지만.
수면기에 들기 전, 분명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일 빌어보자 했던 이야기를 말 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소원을 들어주는 별 이야기라면…… 엄밀히 말해 네 엄마인 백미가 알려준 거다만.’
룬은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은 다시 한번 목 안에 삼켜냈다.
이어, 부리에 과자 조각이 묻어있는 백야가 나섰다.
“삐이약! 삐이, 삐삐삐삐!”
날개를 파닥거리는 백야마저 뭔가 바라는 게 있는지 신나게 지저귀었다.
물론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 추론할 수는 있다.
‘백야 녀석이야, 같이 놀고먹고 자고겠지.’
새가 바랄 만한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찌 보면 딱히 부족할 것도, 과할 것도 없는 수준일 터였다.
흑미가 시선을 크리스티나에게 돌렸다.
“그럼요, 크리스티나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 말이니? 글쎄…….”
부드러운 황금빛 메리골드 꽃차를 마시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잠시 고민하는 듯 시선을 던져왔다.
그리곤 이내, 상냥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원하는 모든 것을 바라고 얻을 수 있는 드래곤이 되면 좋겠구나.”
그녀다운 말이었다.
축복이기도 하고, 스스로의 재량대로 얻게 되리라는 현안이 깃든 바램.
‘오래 살면서 터득한 지혜겠지.’
룬은 그녀와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싱긋.
은은한 플라워 향이 스며나올 듯한 미소를 잠시 응시한 룬이 타래과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그럼요! 룬 님은 어떤 드래곤이 되고 싶어요?”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뭐가 되고 싶냐라.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전생에선 목표가 정해져 있었지.’
천 년 동안 수련을 거듭하여 용으로 거듭나는 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만도 않아서, 쉽게 답을 주기 어려웠다.
“우선은 블랙 드래곤이 되어야겠지. 그 다음은 어둠 일족의 장로가 될 테고.”
적당한 대답에 흑미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에이. 그게 뭐예요? 그건 그냥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거 말구! 룬 님이 되고 싶은 거요!”
“그러게 말입죠. 우리 드워프들 용어로 하자면 ‘장래희망’을 말씀해 보시란 겁니다요.”
덧붙인 제드의 말에 룬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쉽게 넘어갈 수 없겠다 싶어지자, 룬은 잠깐 생각하곤 말했다.
“너희도 있고. 그냥 지금처럼 잘 살 수 있으면 된 거 같아서. 앞으로도 잘 부탁해.”
비록 모든 걸 말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진실이었다.
과거는 영 평탄하지 못했던 삶이었건만, 새로 얻은 삶에서는 그가 얻을 능력, 힘, 기연만 해도 상당했다.
‘이대로만 가면 자연스럽게 강자가 될 테고, 과거와 달리 내 우군도 만들어두었지. 적어도 전처럼 무력하게 홀로 죽진 않는다는 거고.’
그거면 됐지.
룬은 속으로 만족스러워 했다.
앞으로 얼마나 살게 될지 모르지만, 죽지 않고 잘 살기만 해도 언젠가 어둠 일족 레어까지 가지게 될 터.
예정된 강자의 길을 잘 걷고 있으니 지금으로선 더 바랄 게 없었다.
어쩐지, 입 안에 담긴 꿀이 유난히 달게 느껴졌다.
‘예전이야 다른 인간들이 나를 악명 높은 이무기로 알고 있어 괜한 초상을 치렀지만, 이번엔 다르잖아.’
비록 대놓고 적대해야 할 놈은 있을지언정, 억울한 원한이나 오해는 산 적은 아직 없다.
이전처럼 뭔지도 모를 놈에게 죽을 일은 없을 거란 소리다.
정말이지 그게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게다가 요정의 길이나 워프 같은 이동 마법이 발달한 세계다. 어쩌면, 긴 시간을 통해 원래 살던 세계로 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또 다시 떠오르는 미친놈.
백귀(白鬼) 같았던 녀석을 떠올린 룬은 내심 치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뜬금없이 튀어나온 그 지독한 놈은 뭐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인간 같지 않긴 했지만 틀림없는 인간.
지금쯤 수명은 다 했을 테니 자식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죽고 얻은 기회가 좋았다 해도, 감히 신수를 죽인 놈을 용서할 수는 없지.’
숨이 끊어지던 순간이 떠오르자 화가 올라왔다.
그리다 문득, 묘한 시선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
왠지 모르게 다들 아련한 눈이었다.
심지어 흑미조차 귀를 접어 내리고 룬을 바라보며 말했다.
“룬 님…… 흑미가 앞으로 더 많이 놀아드릴게요.”
“……?”
룬은 입안의 꿀맛을 꿀꺽 삼켰다.
아멜리아가 이어 말했다.
“루, 룬…… 우, 우릴 그렇게 소중히……여기고 있었구나…….”
“…….”
룬은 꿀맛이 끈적하게 입 안에 들러붙은 기분이었다.
이어, 뜨거운 눈으로 보는 페르디키온과 마주친 룬.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화룡족 소년은 팔짱을 끼더니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쳇. 감동했다는 게 아니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보란 듯이 어둠의 일족 장로가 되도록 해주마.”
“…….”
무슨 흐름인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뺙! 삐야악! 삐약!”
가만있으니 이젠 하얀 새까지 난리였다.
백야가 타래과 하나를 집어 룬의 접시 위에 하나를 놓더니, 눈을 반짝이며 강력한 아이컨택을 해 온다.
“삐약?”
이 광경에 쿡쿡 웃은 크리스티나마저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이러니 너를 귀여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중, 포크를 쥔 페르디키온이 숨을 훅 쉬었다.
“순하고 바보 같은 녀석 같으니. 걱정마라. 네 마음은 확실히 알겠으니.”
뭔가 이상한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실험 해 볼까
잠깐 고민해 본 룬은 나름대로 상황을 추측했다.
‘내가 저들이 생각하는 좋은 성체가 되리라 여겼지.’
아멜리아는 룬이 침착하고 속 깊은 드래곤이 되길.
페르디키온은 결단력 있고 행동에 주저함 없는 지배자가 되길.
흑미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상냥한 드래곤이.
크리스티나는 바라는 것들을 이루는 드래곤이 될 거라 말했다.
어찌 보면 그들이 가장 훌륭하다 여기는 모습들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이…….’
<너희도 있고. 그냥 지금처럼 잘 살 수 있으면 된 거 같아서. 앞으로도 잘 부탁해.>
무엇이 되겠다는 말이 아닌.
모두와 함께 하는 미래를 원한다는 의미.
‘즉, 지금처럼 다들 미래에도 내 곁에 있어달라는 소리잖아.’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이는 무척 순수한 소망으로 비추어졌다.
오죽하면 제드조차 갑자기 코를 슥슥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을까.
“제가 이래 봬도 눈물이 별로 없는 드워프인데, 크흐. 뭔가 찡하기 그지없네요, 룬 님.”
“…….”
대답 대신, 룬은 시선을 슬쩍 돌렸다.
이 모습을 보고 그가 쑥스러워한다고 여긴 제드가 흐뭇한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워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저도 아주 얼굴이 화끈하던걸요. 껄껄껄!”
룬은 ‘그거 아니야.’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저 말을 듣지 않는 편이 덜 민망했을 것을.
그렇다고 굳이 입 밖으로 부정했다간, 시선이 죄다 몰려 아주 따뜻해질 게 뻔했다.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물어보기라도 하면 딱히 대꾸할 말이 없기도 했다.
‘할 수 없지. 최대한 태연하게 넘긴다.’
얼굴에 열이 더 올라오기 전에, 룬은 보라색 팬지꽃이 든 둥근 얼음을 오렌지 에이드에 퐁당퐁당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적당한 속도로 음료를 마셨다.
탄산이라 목이 따가웠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때, 여우 꼬리를 살랑이며 흑미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흑미도요, 지금 이 순간이 계속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 분명 듀라한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참 솔직한 말이었다.
덕분에, 단어 선택은 다소 미숙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확실히 들렸다.
성정이 밝은 흑미가 말했기에 더 귀여워 보였다.
‘그리고 내가 저렇게 보였겠지.’
생각만 해도 속이 근지러웠다.
그때, 페르디키온이 꿀우유를 테이블 위에 탕! 내리며 흑미에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