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242)

“걱정 마라. 불의 힘을 가르친 이상, 내가 널 척 질 일은 없다.”

“힛! 너무 좋아요!”

환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화룡족 소년의 얼굴에 멋쩍음이 묻어났다.

아멜리아 역시 작게 미소 띤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나, 나도…… 그래, 흑미야.”

“삐이약!”

추임새처럼 소리를 낸 백야가 한쪽 날개를 흔들었다.

어쩌다 보니 따뜻한 풍경이 되긴 했지만, 룬은 양심이 조금 찔렸다.

‘이 녀석들에게 인장이 없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친해질 수 없었을지도.’

좋은 의미를 담긴 했지만, 속물적인 마음.

혹은 계산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 풍경은 마음에 든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룬 역시 지금 같은 풍경이 미래에도 존재하길 바란다고.

물론, 각자 다른 삶과 목표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흩어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하기가 쉽진 않았다.

룬은 눈을 한 차례 깜빡이고, 순한 해츨링의 얼굴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이 분위기 속에 계속 있기가 간지러워, 룬은 한쪽 바구니에 따로 챙긴 음식 쪽으로 손을 옮겼다.

“생각난 김에, 나는 듀라한에게 식사를 가져다줄게.”

어느새 툭탁이며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한 일행들이 룬에게 시선을 모았다.

“우웅, 흑미도 같이 갈까요?”

룬이 고개를 설레 저었다.

“괜찮아. 아멜리아랑 페르디키온과 있어줘.”

“알겠숩니다!”

흑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구니를 챙겼다.

‘둘이 의견이 안 맞더래도 흑미가 잘 중재해주겠지.’

싸우면서 크는 법이라지만, 그렇다고 매번 싸우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룬은 크리스티나와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듀라한.”

검은 방에 들어온 룬이 부르자,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철컥! 철컥!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홀로 이 방을 지키고 있던 검은 갑옷 기사가 룬에게 다가왔다.

철컥!

검은 기사는 능숙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앞에서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를 꺼낸 룬이 말했다.

“어제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편히 즐기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혼자니까 마음껏 즐겨.”

절그럭!

고개를 끄덕이는 듀라한의 앞에 고급스러운 상자가 놓였다.

달칵.

상자를 열고, 얼음꽃과 꿀타래 과자를 넣은 룬이 뚜껑을 닫았다.

곧, 청량감이 느껴지는 장미꽃 향기와 함께 달콤한 꿀.

고소한 튀김과자의 향이 은은하게 마력입자가 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후욱-

가슴께가 부풀며 호흡을 들이킨 듀라한.

급하지 않게, 그는 다시 느리게 호흡을 뱉었다.

차분히 흠향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혼자 있게 하길 다행이다 싶어졌다.

‘다들 눈치 있게 따라오지 않아 준 게 고맙군.’

흑미야 검은 방에 제 방이기도 하고, 워낙 듀라한과 함께 지내서 혹시 와도 괜찮았다.

하지만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는 아니었다.

온다고 불편한 건 아니지만, 편히 흠향하며 식사를 즐기도록 배려해 주는 게 더 좋았다.

‘특히 아멜리아 녀석이 페르디키온처럼 향기 상자에 취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페르디키온에게 실험 삼아 해 봤다가 취하는 바람에 민망한 꼴을 봤던 룬.

심지어 이 상자의 향기맛을 본 페르디키온은, 종종 듀라한과 함께 상자 향기를 맡으려 들곤 했다.

한 마디로 중독이 있었다.

‘그놈이야 틀렸지만, 다른 녀석들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지.’

페르디키온은 그래도 자의식이 강하기라도 하지.

아멜리아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어둠을 대신 보관하고 있다가 까맣게 물들어있기까지 했다.

물의 일족 예비 장로로 자라며 힘이 강해졌다지만, 향 잘못 맡았다간 단번에 훅 갈 수도 있었다.

‘페르디키온 녀석이 그 정도 반응이면 아멜리아는 볼 것도 없지.’

절레절레.

룬은 고개를 흔들며 향기 상자에 내용물을 보충해 넣었다.

절……그럭.

묵언수행을 실천하는 듀라한이 다시 숨을 후욱 들이켰다.

영혼에 평온을 주는 감각.

거기에 푹 빠진 듀라한은 잠시 뒤, 옅어진 향기속에서 듀라한이 녹빛 안광을 드러냈다.

‘끝났군.’

룬 역시 상자를 닫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젠 내 차례니까 실험 해 볼까.”

그렇게 말한 룬이 눈짓하자, 듀라한이 명령을 받들 기세로 차렷자세를 했다.

“좋아. 듀라한. 내가 길 건너편에 다녀올 때까지 앞을 지키고 있어. 만약 누가 오면 알려주면 돼.”

철컥!

씩씩하게 거수경례를 해 보인 검은갑옷기사를 확인하고, 룬은 손에서 마력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이빨 요정에게 받은 직후 열었던 곰팡내와 이끼가 낀 나무문이 있는 요정의 길을 열었다.

철컥.

일반적인 소리가 아닌, 허공에서 느껴지는 진동.

열쇠가 스르륵 돌아가며 투박한 힘으로 빚어진 길이 보였다.

그 너머에 있는 나무문.

‘요정마다 다른 느낌의 길이 만들어지는 모양이지.’

일전의 <깊은 밤의 요정>이 만든 길은, 신비롭고 어두운 가운데 묘한 동경심이 감춰진 흐린 빛이 어슴푸레 묻어났다.

하지만 이빨 요정의 길은 대충 만든 것 같으면서도 장식품 같은 반짝임이나 일그러진 형상들이 안개처럼 존재했다 사라지곤 했다.

아마 본인만의 예술혼을 불 태운 길인가 싶기도 한데, 청소하지 않고 오래 다녀서 낡은 빈티지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룬은 곧장 길을 가로질러 들어가 나무문에 손을 대었다.

별다른 잠금장치 하나 없었다.

“하긴, 요정의 길을 통해 와야하는데 필요할 리도 없었겠지.”

요정의 길이 이미 최고의 보안 자물쇠였을터다.

룬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소 질린 기색으로 감상을 말했다.

“취미 한번 고약하네.”

퀴퀴한 악취야 그럴 수 있다.

솔직히 이빨 요정의 면상이 그리 호감상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단순한 이빨 수집상이라기엔 잔혹하고 괴이쩍었다.

뭘 뜯어먹다 수집된 건지 엿가락처럼 이빨에 붙어 늘어진 살점까지 통째로 전시된 치아.

일부러 썩힌 건가 의심될 정도로 거무죽죽한 구멍이 숭숭 뚫린 짐승의 이.

때론, 원래 이족보행을 했던 자의 이가 짐승의 이처럼 강제로 변하는 도중 뽑힌 이도 있었다.

‘나름대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군.’

고개를 올려보니 유리관에 잘 넣어져 깨끗하게 보관 중인 유치들도 가득했다.

몬스터들의 이는 물론, 특수한 괴수종, 마족, 엘프와 인간.

룬은 온갖 이빨을 죄가 가져다 놓은 이 수집광의 아지트를 쭉 살폈다.

“이건 이미 멸종한 고대종의 이빨이고…… 초대 인간의 왕의 치아는 어떻게 모은거야?”

어이없어하던 룬이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녀석 평범한 이빨 요정이 아니었군.”

본래 정상적인 이빨 요정은 이렇지 않다.

그들은 수집하듯 이빨을 가져가고 새로운 이가 무사히 나도록 가벼운 축복의 말을 남긴다.

여기까진 룬이 본 요정도 비슷한 짓을 하려했다.

차이가 발생하는 건 이 다음.

이빨 요정이 수거해 간 치아는, 세상에 내는 작은 마력 세금 같은 거였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수명이 조금 더 늘어나거나, 태어나면서 그때까지 세상에 그릇된 짓을 한 걸 조금 용서받는다는 속설도 있지만, 진짜는 이것이다.

그 신체의 일부를 마력으로 환원하여 세상이 원활하게 돌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도록 한다는 것.

그렇기에 드래곤들은 이빨 요정이 치아를 가져갔다는 것에 관대한 편이었고, 세상에 발 딛고 사는 이들 대부분이 이 진실을 알지 못해도 헌 이를 찾으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예외적인 녀석은 있는 법.

세상에 사라지게 하는 게 아까워 이렇게 제 공간에 꿍쳐놓은 녀석을 보니 절로 고개를 젓게 했다.

“이쯤이면 착복인데.”

치아를 모아 바로바로 마력으로 환원하지 않고, 잘도 모아놨다.

보아하니 특수종이나 드래곤의 이빨. 고위 마족의 유치같은 것들도 모은 걸 보니 집착도 보통 집착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디서 구하기도 힘든, 멸종한 고대 생물의 이까지 확인한 룬이 중얼거렸다.

“재료들을 이렇게 잘도 모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떤 생물의 신체 일부는, 때론 어떤 마법의 제물. 대가.

혹은 훌륭한 인신공양의 대리물로 쓰인다.

비록 보기엔 징그러운 물건들이고, 썩 유쾌하지 못한 과정으로 얻어지긴 했으나.

룬의 손에 들어온 이상, 이를 사용할 방법은 무척 많았다.

룬은 듀라한이 신호를 주기 전까지, 이 공간에 있는 이빨 재료들을 살펴 엄선된 몇 개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 검은 방으로 돌아왔다.

‘수련에 필요했었는데, 마침 잘 얻었네.’

나머지는 저 나무문 안에 두고 왔지만, 그게 맞았다.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잘 보존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다, 이제 이 길은 룬만 사용하게 되었으니.

룬에게 있어, 저 나무문 안의 공간은 이제 룬 전용 재료보관소나 마찬가지였다.

룬이 흐뭇한 미소를 띠자, 듀라한의 의문스러운 듯 녹빛의 시선을 던져왔다.

“궁금한 모양이네.”

철컥!

고개를 끄덕이는 듀라한에게, 룬은 꽤 순순히 그 의문에 답 해주었다.

“수업에 도움이 될 거나 만들어 볼 생각이야. 기왕이면 다양한 녀석들로.”

어디 보자

본래 인형이 할 수 있는 건 식사, 수면, 스트레칭 정도였다.

하지만 제작이란 결국 숙련도 문제.

이만한 재료가 있다면 동등한.

혹은 그 보다 더 좋은 품질의 제작을 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다양한 걸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어.’

수련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말에, 듀라한이 녹안을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를 본 룬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제대로 만든다면, 대군을 상대하는 방법도 익힐 수 있을걸.”

현재 수업은 듀라한이나 크리스티나와 일대일.

혹은 일대 다수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룬이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낸다면, 다수 대 다수의 싸움을 연습해 볼 수도 있을 터였다.

‘활용하려면 크리스티나에게 허락을 받아야겠지만.’

어쨌든 이만한 양의 재료가 손에 들어온 이상,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룬이 골라 가지고 나온 건, 그중에서도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당장 만들어 볼 만한 것들이었다.

“좋아. 해볼까.”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큼직한 이빨 뼈를 꺼냈다.

묵직하다.

유치일 텐데도 아주 튼실하고 제법 컸다.

터억.

룬의 손이 두터운 이빨 위에 얹혔다.

‘쓸 만한 걸 만들려면, 이 녀석 정도면 되겠지.’

룬이 목적을 생각해 고른 이빨.

몬스터 베어의 유치였다.

이어, 룬은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와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를 꺼냈다.

“마족을 싫어하는 크리스티나니까, 음침한 기운을 씻어낼 필요도 있고.”

룬은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에 물기운이 담긴 청정수를 넣었다.

‘크리스티나에게 인형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으려면 원래 몬스터의 모습보단, 좀 더 무해한 느낌으로 구성해야겠군. 이건 어디까지나 실습용이니.’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를 작동시키고 레시피를 확인한 룬.

그는 몬스터 인형 레시피를 확인하고, 재료를 가늠했다.

‘듀라한 때야 하나뿐인 귀한 혼을 사용해야 하니 그에 걸맞은 일족의 유물을 사용했지만 이건 공들일 필요가 없지.’

룬은 갈아놓은 진주 가루를 사용하면서, 몸체는 엘프 왕국과 드워프 마을에서 얻어둔 잡화와 옷감을 사용했다.

거기에 심해 몬스터를 잡으며 얻은 거죽을 섞어, 몸체를 구성할 재료 비율을 조절했다.

그러다 보니 몬스터의 재료보다 솜이나 옷감 재료를 훨씬 많이 넣게 되었다.

‘이 정도면 몬스터의 외형이 많이 섞이진 않을 테지. 혹시 실패해도 재료를 많이 축내지도 않고.’

마지막으로 미리 수확해 둔 백야의 깃털까지 꺼낸 룬.

재료를 모두 넣고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를 작동시켰다.

달그락. 달그락.

칙칙!

재료가 뭉그러지고 조합되는 소리.

성공 확률은 제법 높은 편이었다.

번쩍!

털썩! 털썩! 털썩!

그리고 완성된 세 인형들은, 룬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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