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242)

“그래 주겠니? 룬.”

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수련하기 좋은 구실이 생겼군.’

“물론이지.”

룬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를 핑계로 이빨 요정의 아지트에서 얻을 이빨은 물론이고, 다른 재료들도 모아 다양한 인형을 만들어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너무 몬스터스럽지 않게 만든 건 역시 잘한 일이었군.’

행동 양식이 사납다 한들, 솜과 천. 가죽 따위의 잡화가 대부분인 인형이다 보니 뭔 짓을 해도 다칠 일이 없었다.

‘자, 그럼 실제로 써먹을 만한지 봐야겠군.’

레어의 주인의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실습해 볼 차례였다.

룬이 시선을 돌려 일행들을 보았다.

“너희들도 사용해볼래? 기본적인 행동 패턴은 몬스터 베어랑 거의 같아. 가끔 변칙적인 행동이 나오긴 하지만.”

룬의 말에 흑미가 씩 웃으며 곰인형을 하나 들어보았다.

흑미의 품에 안긴 핑크색 곰인형이 이를 드러내려다 크리스티나를 보고 핫! 하더니 축 늘어졌다.

“오잉. 늘어졌다아.”

흔들흔들.

흑미가 곰인형을 흔들었지만, 인형은 날 잡아잡슈 하는 듯 얌전했다.

상황을 파악한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겠구나. 너희끼리 훈련해 보고 어땠는지 알려주겠니?”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해주려는 그녀에게 룬이 대답했다.

“응 그럴게. 고마워. 크리스티나.”

상냥한 웃음을 남긴 그녀가 이동 마법과 함께 자리를 떴다.

몇 초뒤.

갸……캬아아아!

곰돌이들의 기세가 다시 흉포해졌다.

“이놈들은 무슨 이중인격인 것이냐?”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은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다만, 흑미는 품에서 버둥거리는 곰인형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보였다.

“룬 님, 이제 저희가 이 인형하고 놀아보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룬은 본성을 드러내며 하악질을 시작한 다른 두 인형의 눈을 어둠으로 가렸다.

어차피 흑미가 이기리란 판단에서였다.

‘강자에게 약한 놈들이라면, 시야를 차단해두는 편이 훨씬 낫겠지.’

그리고 얌전해진 곰인형들을 듀라한에게 안겨주며 답했다.

“응. 한번 해봐.”

흑미가 씨익 웃더니 귤색의 곰돌이 인형과 대련장 위에 섰다.

“자! 이리이리 와 봐! 으음~ 핑키야!”

갸아아앙!

까르륵 웃으며 즐거워 보이는 흑미와 달리, 곰인형은 진지하게 성깔을 드러냈다.

힛, 하고 웃은 흑미가 가슴에 달린 붉은 브로치에 손을 올렸다.

“자! 나도 귀여운 오식이 불러줄게!”

화르륵!

불의 정령을 본 곰인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즉시 네 발로 도주하고 말았다.

“안 돼! 어디 가아, 핑키야!”

갸아아아아아!

눈물까지 글썽이며 도망치는 곰돌이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룬은 오른쪽 검지로 볼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하필 불을 사용하는 녀석이라……. 육탄전 전용이라는 말을 해뒀어야 했는데.’

너무 당연해서 떠올리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흑미가 불의 정령을 소환하자마자 곰인형은 고양이들 앞에 선 쥐 같은 모양새로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텃네.’

룬이 흑미에게 말했다.

“불의 정령들이라도 집어넣어.”

“네에! 사식아, 오식아! 돌아와!”

뒤늦게 정령을 소환해제 했으나 이미 곰인형은 전의를 상실한 뒤였다.

“히잉. 자꾸 도망가요.”

입을 내민 흑미가 아쉬운 듯 룬을 돌아보았다.

“할 수 없지. 일단 다른 녀석을 쓰자.”

행동이 산만해서 시야를 차단시켜 듀라한에게 들려둔 게 다행이었다.

룬은 귤색 곰인형을 꺼내 대련장 위에 놓고, 시야를 돌려주었다.

캬갹?

마찬가지로 한 성깔 할 듯한 귤색 곰인형이 대련장 위의 흑미를 보곤 코를 실룩였다.

갸아아아!

원래 상당한 힘을 지닌 베어 몬스터였는지, 앞발을 치켜들고 발톱을 드러내는 포즈였다.

사뿐.

네 발로 바닥을 디딘 곰인형이 모습만은 밀림의 왕처럼 어깨를 실룩이며 맴돌았다.

‘오. 야생동물 특유의 움직임이군.’

이빨에 담긴 강력한 몬스터의 본능.

그것이, 사냥감을 대하는 포식자의 행동을 취하게 했다.

“이번엔…… 겁 안 먹게…….”

흑미가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며 꼬리를 스윽 치켜올렸다.

순간,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곰인형과 흑미가 달려들었다.

갸아아앙!

“캬앙!”

퍼벅! 퍼버버벅!

솜방망이 같은 곰인형의 앞발이 눈에 보이지 않은 속도로 펀치를 마구 먹였다.

응수하는 흑미가 똑같이 펀치를 때리자, 둘의 주먹이 투다다다다! 하고 제법 앙증맞은 소리를 냈다.

먼저 행동을 바꾼 건 흑미였다.

“호잇!”

갸아아아?!

흑미가 발로 곰인형의 정강이를 걸어버린 것이다.

뀨엥!

곰인형이 자리에서 털썩 쓰러질 듯하더니, 숙련된 중심 잡기로 겨우 몸을 세웠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빈틈을 보인 후.

흑미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야압!”

퍼억!

곰인형이 흑미의 어깨에 치여 바닥을 굴렀다.

금세 일어나긴 했으나, 투우사를 본 흑우처럼 흥분한 뒤였다.

이 뒤엔 순식간에 승부가 났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귤색 곰인형을 여유롭게 피한 흑미가, 수도(手刀)를 세워 뒷목을 단번에 내리쳤던 것이다.

푸욱!

갸아아아아앙!

털썩.

이길 수 없는 강자라는 걸 깨달은 곰인형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이어, 몸을 뒹굴어 배를 드러내며 패배를 인정했다.

갸아……갸아아아.

원통하고 분해하는 듯 우는 곰인형에게 흑미가 손을 뻗어 얼굴을 토닥여주었다.

“울지 마아 오렌지야. 재미있게 놀았는걸.”

그 말을 들은 곰인형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 콱, 흑미의 손을 물려고 했지만.

“떼찌! 자꾸 손 물라고 하면, 흑미한테 혼나!”

푹!

수도로 머리통 가운데가 푹 들어갔다.

찌그러진 모양은 인형이라 돌아오긴 할 테지만, 꼴이 조금 웃기게 되긴 했다.

축 늘어진 곰인형을 두고 일어난 흑미가 룬 쪽으로 다가왔다.

룬이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재미있었어요!”

고개를 끄덕인 룬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상대해 보니 어땠어?”

잠시 고민한 흑미가 입을 열었다.

“으음~ 흑미가요. 룬님한테 예-전에 들은 말이 떠올랐어요!”

“예전에 들은 말?”

환하게 웃은 흑미가 귀를 뾰족하게 세웠다.

“본능에 의존해서 싸우면, 지금은 순조롭게 이길지 몰라도 나중에 엄청 고생하구, 이기기도 힘들어진다는 말이요!”

“그거라면…….”

수인마족인 흑미는 훌륭한 전투 능력을 타고났다.

하지만 본성대로만 싸우면 불리할 때 본능이 시키는 대로 도망칠 우려가 있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전투법을 익히게 해 주려고 룬이 여러모로 손을 쓰곤 했었다.

‘페르디키온도 그 중 하나였지.’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리자, 흑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요- 흑미가 그 말의 뜻을 잘은 몰랐어요. 그런데, 오렌지가 하는 행동이 그때의 흑미랑 엄청 비슷한 거예요!”

흑미의 시선이 아직도 엎어져 있는 귤색 곰인형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러면 안 되는데! 하구 생각하면서 룬 님이 가르쳐줬던 대로 싸웠더니 엄청 쉽게 이겼어요!”

‘호오.’

몸에 체득되었다지만, 상대방의 행동을 보며 직접 떠올리는 전투를 해보는 건 좋은 일이었다.

흑미는 정말 즐거웠는지 연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신기했어요! 룬 님도 이렇게 흑미를 봤겠죠?”

“그럴지도 모르지.”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인 흑미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저렇게 싸우면 안 되는 이유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럼, 도움이 됐다는 거네.”

“엄청요! 다음에도 또 할래요!”

신이 나서 양손으로 주먹을 쥐고 통통 뛰던 흑미.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른 이들도 해봐야하니 잠깐만 기다려.”

“네에!”

대답한 흑미는 한쪽에 놓인 의자로 뛰어갔다.

룬의 시선이 옮겨간 건 아멜리아였다.

“아앗…… 나?”

“응. 무기나 능력은 쓰지 않고 상대하면 돼. 해볼래?”

하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킨 물빛 소녀가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었다.

“으……응. 좋아.”

심호흡을 한 물빛 소녀가 대련장 위로 올랐다.

룬은 흑미의 불고양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던 분홍색 곰돌이는 흔들었다.

“야.”

갸아아?

불이 두려워 도망쳤던, 일명 핑키 곰돌이.

룬은 아멜리아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련장 위에 분홍 곰돌이를 두었다.

“자. 싸워 봐.”

갸……갸갹?

곰돌이의 눈에 비친 건 소심하게 서 있는 푸른 물빛의 소녀.

“자, 잘 부탁……해…….”

작게 인사를 해 오는 모습에, 분홍색 곰돌이는 좀 전의 두려움은 싹 잊었다.

캬갹, 캭.

두 발로 바닥을 디딘 곰돌이가 가슴을 부풀렸다.

……캬아아아아아!!!

두 앞발로 가슴을 텅텅 두드리기까지 하며 기선제압을 하는 곰돌이.

“꺅……!”

얼핏 들으면, 겁이라도 질린 듯한 소리였지만.

사실은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낸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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