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242)

“내겐 별일 없었어. 좀 특이한 일은 있었지만.”

룬은 그에게 있었던 사실을 대부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이빨 요정의 이야기부터, 탐욕스러운 마족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룬의 이빨을 가지러 왔다는 점까지.

“만약 내가 그 요정에게 속아 순순히 이빨을 넘겨준다면, 기대와 다른 모습이라 실망할 거라는 말을 했었대.”

‘실망한 나머지 죽일 거라는 소리까지 했지.’

아직 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러니까, 지금 내 레어에 요정족을 사주해 들였다는 거니 지금?”

뿌득!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이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해츨링을 해하겠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용족 전체의 위협이나 다름없으니까.

주제가 거기에 쏠렸다간 룬은 하고 싶은 말은 하지도 못할 터.

룬은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응. 그래봐야 별건 아니었지만.”

“별거 아니라기엔 너무 끔찍한 일이구나.”

그 말에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빨 요정이 갇힌 흑진주를 꺼냈다.

“어차피 이렇게 됐는걸.”

크리스티나가 구슬을 살짝 들어 살폈다.

“일전에 꽤나 예의 없는 요정을 가뒀던 구슬이구나.”

“맞아. 제 꾀에 자기기 속아 넘어가서 지금 그 안에 있어.”

사정을 설명하는 룬의 말을 듣던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

“약속은 함부로 하면 안 되지만, 영리하게 잘 마무리했구나. 심지어 요정의 길까지 얻었다니.”

그윽한 시선이 된 그녀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룬, 솔직히 말 해보렴. 이런 능력들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전부터 그녀가 내심 묻고 싶었던 그 말.

룬은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룬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신중해졌다.

‘역시 수상했겠지.’

그간 힘을 절제하며 최대의 성과를 내왔던 룬.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크리스티나만큼은 끝까지 속이기 어려우리라 짐작했었다.

그는 대비해 왔던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언젠가 올 줄 알았던 일이잖아.’

그때,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렴, 룬. 말 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단다.”

이해심 깊은 시선을 한 크리스티나의 말에 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설마 크리스티나는 뭔가 알고 있나?’

크리스티나가 그의 정체를 눈치채기라도 했다면?

그가 준비한 생각을 말해봐야 소용없었다.

“무슨 말이야?”

룬이 묻자, 크리스티나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 어린 시절부터 너는 참 영리했지. 네가 가진 힘은 어느 해츨링과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녀의 그윽한 푸른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래.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마치…… 성체가 보일법한 힘. 진작 생각하지 못한 게 이상할 지경이야.”

룬은 긴장으로 목울대가 굳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침착하게 들어와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긴장감에 절로 손에 땀이 날 지경이다.

‘들키나?’

미리 예상했던 답변은 꺼내지도 못하고, 룬은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룬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비밀로 하느라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

두둥!

결정적인 말을 들은 기분에, 룬은 부동심을 유지하기 무척 어려워졌다.

‘그렇게까지 확신한다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상, 결코 닿지 않으리라 여겼던 진실.

어쩌면 그 생각이 틀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아. 그 비밀을 말하지 못했던 이유도 충분히 이해한단다.”

이건 텄다.

발각된 게 틀림없었다.

‘설마 이렇게 들키게 될 줄이야.’

나름대로 잘 숨겨왔다 여겼건만, 부족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룬은 마음을 놓아야 할 때라 여겼다.

결국, 체념한 룬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진짜 알아챘을 줄은 몰랐어. 미안해, 크리스티나. 속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룬은 순순히 인정했다.

어깨에 힘이 빠진 채 고개를 조금 떨어뜨린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네가 혼자 있는 시간을 유독 편해한다고 여겼는데.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색할 때도 있긴 했어.”

“그랬구나. 룬, 고개를 들어보렴.”

순순하게 고개를 든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드래곤답게 살라는 내 부탁 기억하니? 그건 네게 담긴, 네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당당해질 필요가 있단다.”

“?”

뭔가 이상했다.

‘드래곤답게? 어머니 생각? 당당해지라고?’

다른 세상의 이무기라는 걸 알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

어딘가 이상함을 깨달은 룬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룬, 알 속에 있었을 때부터 네 몸에는 분명 특별한 힘이 깃들었을 거란다.”

“!”

그 말에 룬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들킨 게 맞는 거…… 아니, 맞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니,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혼란스럽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 그녀의 지식과 능력을 품고 있었다면 말이야…… 룬, 이상한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니?”

“이상한 느낌이라면…….”

룬이 말끝을 흐리자 크리스티나가 상냥한 어조로 답했다.

“예를 들면…… 그래. 어둠 일족과 관계된 지식이나 힘을 다루는 능력 같은 것들이지.”

“?”

룬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런 능력은 전생에서부터 그가 수련하고 깨우쳐왔으며 이미 지니고 있던 힘이었으니까.

크리스티나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눈치인 어린 블랙 드래곤 해츨링을 보며, 그녀의 짐작을 일러주었다.

“룬. 너는 몰랐을 테지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의 어머니의 안배가 존재했을 거야.”

“…….”

이야기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룬에게 그녀는 안쓰러운 시선을 하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그래,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룬 너는 태어나자마자 상황을 이해하고 네 의사를 전달할 줄 알았지. 이미 지식이 있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야.”

확신 어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분명 너의 어머니인 블랙 드래곤 장로가, 네게 <전승> 마법을 걸었던 게 틀림없어.”

크리스티나가 멋대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룬이 가지고 있던 지식, 능력.

성체에 버금가는 행동까지, 몸의 주인의 어미가 안배한 일이라고.

‘알아서 이렇게 생각해 준다고?’

황당함에 룬의 붉은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의 동요를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여 주기까지 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너에게 <전승> 마법을 한 번 더 걸었기에 너도, 나도. 지금까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 뿐이야.”

당황도 잠시.

룬은 기회라 여겼다.

“그런……거야?”

그가 슬그머니 의뭉스러운 눈치를 해 보이자, 크리스티나가 다시 룬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단다. 내가 아는 전대 블랙 드래곤 장로는 어둠 일족의 존속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드래곤이었거든.”

아련한 눈빛이 푸르게 물들었다.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빛이 그 안에 잠시 머물렀다가, 지금의 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간 고민스러웠단다. 하지만.”

룬의 어깨 위에 올려졌던 크리스티나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 더 혼란스러워지면, 네가 더 힘들어하게 될까 염려스러웠지. 왜 다른 해츨링과 다를까, 그런 생각 속에서 자신의 남다름이 섞이지 못할 특이함으로 느껴졌을 테니까.”

“…….”

그녀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는 했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헛다리였다.

한편으론, 묘하게 핵심을 짚어낸 말이기도 했다.

‘섞이기 힘든 특이함이라. 그건 맞긴 하지.’

그녀의 통찰이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룬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특이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괜찮아. 말 해줘서 고맙고.”

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룬이 생각했다.

‘거짓말도 아니지. 특이함의 종류가 많이 달라서 그렇지.’

이어서, 룬도 생각했던 바를 털어놓았다.

“사실은, 나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누군가 내 몸에 뭔가 해뒀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정말이니?”

고개를 끄덕인 룬.

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그때는 마족과 전쟁 중이었고, 내 어머니는 어둠 일족 장로로서 전쟁을 이끌어야 했잖아.”

“그래, 그랬지.”

크리스티나의 긍정에 룬은 조금 더 편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전쟁 중에 알인 내가 태어났는지, 그 전이나 후일지 알 수는 없지만…… 알로서 존재한 이상 분명 누군가의 손이 닿았을 가능성이 있잖아?”

‘크리스티나가 언젠가 내 정체에 대해 추궁할 때를 대비한 걸 여기서 쓰는군.’

비록 크리스티나의 생각과는 달랐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리라.

룬이 무해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태어났을 때, 근처에서 비문을 봤어.”

룬은 비문의 글귀를 떠올렸다.

[세상의 빛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라도, 아득히 먼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검은 방 한쪽에 고이 모셔둔 비석.

룬이 마법적인 처리까지 마쳤기에 상할 일 없이, 종종 보곤 했다.

그를 곱씹어본 룬이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전쟁 중 죽음에 이를 것을 이미 짐작한 게 아닐까, 싶었어.”

크리스티나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고작 백 년이 좀 넘은 어린 해츨링이 어미의 죽음을 말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으므로.

“그래. 수많은 드래곤이 죽어가는 시절이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이 목소리에 담겨 전해졌다.

룬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아득히 먼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랐다는 게 나는…… 저세상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었나 봐.”

가벼운 허밍음을 내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룬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랬다면, 분명 다시 만나게 될거라고 적지 않았을까? 나도, 어머니도 함께 존재할 그곳에서 말이야.”

“!”

충격을 받은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이 떨렸다.

아이가 입에 담기에는 슬픈 깨달음이었다.

그녀의 동요를 무시하고, 룬이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만나지 못할 먼 곳이라고 적혀 있었어. 어쩌면, 어머니는 내가 반드시 태어날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아득히 먼 ‘미래’에서.”

크리스티나는 뭉클함에 눈가가 젖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그런 의미로 생각했던 거니?”

아이는 역시 아이.

순수한 목소리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은 참으로, 그녀가 느끼기에 너무나 아름다워서.

“응. 그래서 그 비문에 적힌 건 이걸 거라고 생각했어.

비록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라도, [아득히 먼 ‘미래’에서 태어나 행복하기를.]이라고.”

이어진 룬의 말을 듣고, 크리스티나는 손이 떨려왔다.

와락!

평소처럼 살며시 다독이는 포옹이 아닌 조금은 강한 포옹.

무언가가 터질 듯한 목소리로,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룬. 너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야. 세상에서 너만큼 착한 아이는 또 없을 거란다.”

룬은 잠시 기다렸다가 크리스티나의 목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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