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고마워, 크리스티나. 태어나게 해 줘서.”
왜일까.
룬의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오래 된 죄책감이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블랙 드래곤의 장로이자, 그녀의 스승.
그녀가 크리스티나에게 알을 맡겼을 때는, 알이 태어나도록 잘 돌보겠다 다짐했다.
그 무게가 천 년 가까이 짓눌리게 될 줄도 모르고.
사라진 어둠 일족.
죽은 어미의 유일한 알.
모두가 사라진 뒤, 블랙 드래곤 비늘로 만들어진 비석만을 찾았을 때의 좌절.
천 년이 다 되어 가도록, 작은 움직임은커녕 신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알을 돌보던 나날들.
결국, 포기했던 시간들.
후회하고, 미안했던 순간들.
남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기분에, 크리스티나는 한숨을 쉬었다.
툭. 투둑.
어깨가 젖는 감촉에 룬이 작게 묻는다.
“크리스티나…… 울어?”
“…….”
작고 어린 어깨에 눈을 묻고, 크리스티나는 눈물을 숨겨보았다.
이내, 숨겨질 리 없다는 걸 안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아이의 몸을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이렇게 자라줬구나.’
크리스티나 역시, 비문을 종종 보곤 했다.
가끔은 글귀를 외면하기도 했지만 그리움에 사무치면서도 비문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그럼에도, 비문에 담긴 그녀의 희망을 읽지 못하고.
심장조차 뛰지 않는 알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어미와 자식이기에 알 수 있었던 걸까.
결국, 크리스티나는 이제껏 입에 올리지 못했던 그 말을.
“미안해…… 룬.”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나랑 닮았어?
비문에 대한 해석을 알려주자, 크리스티나의 눈에 물이 고였다.
모른 척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 라고.
‘그간 가져왔던 죄책감인가.’
이해가 갔다.
죽은 줄 알고 버려두었던 기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적어도 몇백 년은 되었을 테니까.
‘본래라면 태어날 희망이 없는 알이 맞았으니,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솔직히 말 해줄 수 없으니, 룬이 되려 미안해질 지경이다.
최선을 다 해도 안되는 일은 늘 있는 법이고, 정답이라 여긴 일이 때론 현실과 미래에 부정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신수나 신선들도 후회 없는 자가 없는 법이다.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태어날 수 있었던 알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을 키워왔던 거겠지.’
최선을 다해 룬을 비호한 것도.
교육한 것도.
본체의 위압감에 힘들어하던 룬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늘 있어주는 것도.
모두 그 미안한 마음과 따스한 애정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리스티나도 알아야 한다. 아니, 내가 말 해야 해.’
룬은 그가 느끼는 바를 말해주었다.
“이만큼 잘 크게 해줘서 나야말로 고맙지.”
진심이었다.
만약, 그가 태어난 장소가 크리스티나의 레어가 아니거나, 그녀가 우연히라도 발견해 주지 않았다면 살기 힘들었을 터.
혹은, 살아남는다 해도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더는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크리스티나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줄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서는 나뿐이니.’
강한 그녀가 마음에 품어왔던 생의 오점.
살 수 있는 어린 해츨링을 먼저 놔버린 일은, 그녀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룬은 아이가 말할 만한 단어를 골랐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용서하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어. 크리스티나가 최선을 다했다는 건 어린 나도 알겠거든.”
그 말에 고개를 든 크리스티나가 룬을 마주 보아왔다.
“상냥하구나. 늘 그랬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흙과 햇빛. 시원한 허브향이 느껴졌다.
룬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가 늘 그렇게 해줬으니까.”
만약, 크리스티나가 악인이었다면 룬 역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룬의 대답에 그녀가 살풋 미소 지었다.
“이런 점은 네 어머니와는 또 다른 점이구나. 그녀는, 조금 차가운 느낌이었으니.”
룬 입장에서야 진짜 제 어미도 아니었으므로, 마음에 가까이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몸의 본래 주인인 죽은 아이를 생각하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데?”
크리스티나가 생각에 잠겼다.
“강하지만 겨울처럼 냉한 성격을 가진 분이셨지. 하지만, 늘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인정을 잃지 않곤 했단다.”
듣자니 룬과 성향이 닮은 구석도 보였다.
‘잘됐네. 비슷한 구석이 있는 자가 이 몸의 어미라니.’
스승이라며 부르는 모습을 보니, 크리스티나에게도 특별한 인연일 터.
그렇다면, 닮은 구석이 있는 게 정을 주고받기 편할 터였다.
실제로 크리스티나는 즐거웠던 듯, 잊지 못하는 아련한 시선으로 과거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늘 전장의 선두에 설 만큼 전투 능력도 뛰어나셨단다. 나에게 전투를 가르쳐 준 것도 그 분이지.”
“…….”
‘그럼 그 무지막지한 방식의 훈련도 설마?’
직감이지만, 틀림없었다.
룬은 속으로 전대 어둠일족 장로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좀 살살 하시지.’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룬도 아멜리아에게 훈련은 빡빡하게 시켰었지만.
룬이 은근한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그분, 나랑 닮았어?”
“글쎄…… 외모는 닮았지만, 성정은 모르겠구나. 닮았다기에는 너무 귀여워서일까?”
“…….”
‘귀여운 거랑 성정은 관계없잖아.’
그때, 크리스티나가 쿡쿡 웃음을 참더니 말했다.
“아니라 하면서 누군가를 돕던 모습은 조금 닮았구나. 늘 가장 큰 일을 혼자 지려 했거든.”
“…….”
대충 어떤 성격인지 감이 왔다.
‘이 흐름을 잘 활용하면 자연스럽게 위험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분위기를 속으로 가늠한 룬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야?”
“뭐가 말이니?”
룬이 말을 이었다.
“나도, 그리고 나와 관계된 다른 이들도 크리스티나는 레어에 들이고 도와주잖아.”
다음 말을 예감한 듯, 크리스티나의 눈빛이 그윽하게 진한 빛을 띠었다.
까만 머리에 동글동글한 얼굴을 한 아이가 크리스티나는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크리스티나는 내가 내 어머니처럼 혼자 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마음도 분명 있었지.”
고개를 든 그녀는 눈물을 보였던 조금 전보다 훨씬 홀가분해 보였다.
그리고 룬은 크리스티나가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를 도운 일로, 무모함에 혼낼지언정 많이 봐주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역시 지금이야.’
가장 좋은 타이밍임을 직감한 룬이 모른 척 조금 더 편한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 다음에 만들 인형은 좀 더 재미있는 녀석으로 만들어 보려고. 마침 이빨 요정이 모아둔 수집품 창고를 내가 쓸 수 있게 되어서 말야.”
마족과 관련된 이빨 요정의 이야기는 기분 나쁠 수도 있었지만, 크리스티나는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요정의 길을 얻었다더니, 요정의 집까지 손에 넣어버린 거니? 정말 네가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많구나.”
룬은 태연히 대답했다.
“나도 우연히 얻게 된 거지만… 기왕 얻게 된 거, 활용하는 편이 수련에 더 도움이 되니까. 그 안의 다양한 재료들을 써보고 싶어. 허락해 주라.”
크리스티나는 고민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위험한 재료들도 분명 있겠지만, 왜일까.
이토록 신중하고 속 깊은 모습을 보면, 괜찮을 성 싶었다.
‘당돌하다 해야 할까? 재미있는 아이야 정말.’
늘 위험한 일에 손 대는 게 염려스러웠건만,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결국 크리스티나가 허락의 말을 입에 올렸다.
“네 생각대로 해 보렴.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해 줄 테니.”
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분위기가 괜찮으니 좀 더 요구해 봐도 되겠는데?’
룬은 너무 반기는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짝 고민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마침 생각났다는 듯 왼쪽 손바닥 위에 오른 손을 주먹 쥐어 쳤다.
“아, 그럼 크리스티나의 비늘 좀 줄 수 있어?”
그러자 골드 드래곤 장로인 그녀가 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비늘이라…… 얼마나 필요하니?”
척!
룬의 오른손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많을수록 좋지만, 일단 세 장만 부탁할게.”
“흐음.”
크리스티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진한 얼굴로 이토록 뻔뻔한 요구를 하다니.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럴까. 룬은.’
살아있는 고룡의 비늘은, 그 하나만으로도 최상급 마력석을 몇 개를 써도 얻기 힘든 귀품.
원래라면 그걸 대놓고 세 장이나 달라는 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양한 실험도 좋지만,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렴.”
말을 마친 크리스티나가 옷소매를 걷고 팔만 드래곤의 것으로 되돌렸다.
꾸득, 꾸드득!
뼈와 거죽이 재조립되는 섬뜩한 소리가 들린 후,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앞 발과 갈퀴가 드러났다.
크리스티나는 아무렇지 않게 황금 비늘 세 개를 뽑아냈다.
뚜뚝. 뚝.
성체의 비늘은 워낙 단단해서, 뜯어내는 다른 손 끝도 드래곤의 발톱으로 변해야 떼낼 수 있었다.
꾸드드득.
작업이 끝나고, 드래곤의 신체를 다시 인간 형태의 손으로 바꿨다.
“자, 여기 있단다.”
룬은 두 손으로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비늘을 받았다.
“고마워, 잘 쓸게 크리스티나.”
됐다.
이빨 요정의 재료로 마음껏 쓸 수 있고, 골드 드래곤 성체의 비늘까지.
벌써부터 어떤 녀석을 만들지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이거라면 제법 괜찮은 걸 만들 수 있겠는데.’
보물이라도 얻은 양 얼른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는 아이를 보며, 크리스티나가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이렇게 크는 걸 보니 조만간에 언령을 쓴다고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구나.”
“!”
그 말에 속으로 살짝 양심이 찔린 룬.
그는 안색이 변하진 않았나 자신을 살펴야했다.
‘설마 알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몰래 꿀을 먹은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자니, 크리스티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전에 페르디키온과 노래 수업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성과는 있었니?”
“응, 그때 수업 덕분에 배운 게 많아.”
룬의 태연한 말에 크리스티나는 당시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페르디키온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노래가 언령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짐작했단다.”
룬 역시 진작 눈치챘던 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언령마법에 대한 힌트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가장 순수한 ‘염원’. 그리고 가장 잘 이해하는 ‘의미’를 부여해 만드는, 간절한 말. 우리 드래곤들은 살면서 각자 다른 언령을 터득하게 된단다.”
“그게 언령 마법이란 거지? 형과 아멜리아도 하나씩 가지고 있어서, 나도 알아 볼 수 있었어.”
크리스티나는 대답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대의 아이들은 유난히 뛰어나서, 벌써 자신의 언령을 만들어냈지.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이 분명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해.”
룬은 그가 터득한 언령에 대해 떠올렸다.
‘소생’
언령이란, 결국 가장 강렬하고 순수한 열망, 소원.
그리고 그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을 때 구현할 수 있는 언어였다.
그러니, 본래라면 뭣도 모를 어린 나이에 발현시키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