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242)

분노로 자신의 마음과 증오는 물론, 불합리한 것들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던 페르디키온.

그리고, 제 몸과 부모. 바다를 정화하고 싶어했던 아멜리아.

룬은 이 두 경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나 자신도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생긴 게 ’소생‘의 언령이었으니까. 죽은 몸에 더없이 어울렸을 수밖에.’

동시에, 룬은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가장 원하는 걸 실현시키는 능력이라. 마치 여의주 같군.’

여의주.

이무기로 끝나버린 룬으로서는 만지지 못했던 신물.

그걸 만들고 사용할 주인이 위해 정결한 마음과 덕을 쌓았던 시기를 떠올리다가, 또 다른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성장 과정이 순탄치 못한 드래곤은 어떤 언령을 가지게 되는 거지?’

룬은 엘프 왕국에서 갈색 드래곤 란드에게 들은 부탁을 떠올렸다.

***

“드래곤이지만, 드래곤이 아닌 나의…… 동생. 리즈에를 구해. 그게, 숲의 인장의 활용을 돕는 대신 네가 해야 할 일.”

갈색 단발을 한 란드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구름에 반쯤 가리어지고, 일그러진 달이 그의 시선 끝에 걸려있었다.

룬이 물었다.

“애초에, 리즈에 녀석은 왜 드래곤인 거야? 나이로 치면 아직 해츨링인데.”

룬의 질문에 란드는 미간을 구기며, 나무로 만든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숲의 일족이 전멸했을 때, 그 존재조차 몰랐어. 그런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지. 드래곤 로드를 후견룡으로 삼아.”

란드의 우울하고 불쾌한 감정이 목소리에 깃들었다.

하늘을 날아

룬은 란드의 말을 듣고, 그가 어렸을 시절 들은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가 요람에 있을 시절에 들은 것 같군. 미숙한 드래곤이 있다, 고.’

삐익 거리는 콧숨 소리나, 뀨우 뀨우 하며 데굴거려야 했던 시절.

크리스티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안 탓이었다.

그중에는 리즈에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 있었다.

느른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한 란드가 지팡이로 땅을 긁었다.

“알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드래곤이었다지만, 본체를 본 자는 없다…… 심지어, 드래곤 로드의 허락 없이는 그림자조차 볼 수 없지. 허나.”

란드의 열없는 시선이 룬을 향했다.

“비교적 최근 찾아간 게, 너라면…… 기회가, 있을 터..”

갈색 드래곤 란드는 사실상 힘을 잃은 드래곤.

드래곤 로드 아래에 있을 리즈에를 만날 방도가 없었다.

‘내가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보호룡의 권한이 꽤 크다는 증거니까.’

당장 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관심이 많았던 레드 드래곤 장로인 파시야스 조차 페르디키온을 통해 우회해서 소식을 들어야 했다.

상황을 이해한 룬이 확인차 입을 열었다.

“리즈에가 자의로 그 밑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정답.”

탁.

란드가 나무 지팡이로 그린 그림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엔 숲의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모든 후견룡이 바르거나, 선하지는 않는 법, 이니까.”

탁 탁.

지팡이가 재차 땅을 짚었다.

“자격을 잃었다지만, 한때 숲의 일족에 속했던 몸. 그 아이의 안위를 확인할 권한 정도는, 내게도 있어.”

자신을 비난하며 피폐하게 살던 갈색 드래곤 답지 않은 말.

란드에게서 느껴지는 의지를 읽은 룬이 말했다.

“좋아졌네, 란드.”

프슬 거리는 웃음을 지은 란드가 고개를 모로 비틀며 답했다.

“그것도, 정답.”

하늘의 이지러진 달처럼 웃은 란드가 유려한 몸짓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얼핏 힘이 없어 보였으나, 제대로 중심을 잡고 선 그는 기울어졌으나 쓰러지지 않는 탑처럼 보였다.

란드가 말을 덧붙였다.

“이토록 어리석었던 자의 부탁이다. 수락하겠지? 어둠 일족 장로, 룬.”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

그리고, 선으로 숲의 인장을 잘 활용할 방법을 속성으로 받아낸 룬이었다.

***

‘덕분에 세계수를 살릴 정도로 힘을 키운 건 좋았지. 소생 언령과의 궁합도 좋았고.’

그뿐이랴.

이번 인형 제작에도 도움이 되고, 제드의 저 몸을 유지하고 살리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기까지 했다.

‘의뢰가 다소 까다롭긴 하지만, 그만큼의 값어치는 했다는 거지.’

씨익.

앞으로 이 힘을 더욱 활용해 얻을 것들을 떠올린 룬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쭈욱.

“흐? 허야 흐히스히하?”

크리스티나의 엄지와 검지가 룬의 볼을 잡아 늘였다.

어린 볼따구는 쫀득하게 잘도 늘어났다.

“푸후. 네가 이상한 웃음을 짓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웃으며 얼른 볼을 놔주었다.

틱! 하고 원래대로 돌아간 볼은 잠시 붉은 기를 드러냈다 사라졌다.

묘한 심술을 부린 그녀를 한 차례 흘겨보자,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네 뜻은 알겠어.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이 레어 안이라면, 어떻게든 내가 손 쓸 수 있으니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보렴.”

‘오.’

그래, 뺨 좀 늘릴 수 있지.

생각이 바뀐 룬의 표정이 즉시 순하게 바뀌었다.

“응. 크리스티나도 원하는 인형이 있다면 이야기 해 줘. 최대한 잘 맞춰줄게.”

“고맙구나, 룬.”

볼을 꼬집었던 손을 들어, 상냥하게 까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크리스티나.

룬은 그녀를 보며,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다른 녀석들도 내가 만들 인형을 재미있어 해. 그리고 녀석들에게 뭐 만들어 주는 것도 좋고. 나는 내 어머니처럼 혼자 모든 걸 지고 가진 않을 거야.”

“…….”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럴 수 있을까?

홀로 책무를 감당하고 죽었을 제 어미를 떠올리는 크리스티나의 마음을 어린 해츨링이 읽어낸다는 게.

‘우연,일까. 아니면.’

이조차 키사의 <전승 마법>으로 배운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건 크리스티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어린 해츨링의 마음이리라.

“그래, 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 아이라면.

물론 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크리스티나가 들었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혼자 살다가 어이없이 죽는 건 한 번이면 된다고.’

죽어라 수련만 하다 진짜 죽어서 끝나버린 생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신룡이 되면 다 가지는 여의주 한번 손에 못 대보고, 억울함 가득한 이무기의 한이 솟아오를 지경이다.

‘이번 생에서는 저번처럼 혼자 죽지 않는다.’

룬은 다시 한번 그의 목표를 되새겼다.

첫째. 누구보다 강해져서 어이없게 죽지 않을 것.

둘째. 가능한 제 편을 많이 만들어서 그가 필요로 할 때, 편 들어줄 아군을 만들고 살 것.

덤으로,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을 아이에게 나름대로 생을 받은 셈이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다면 할 것.

‘적어도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군.’

룬은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럼 난 이제 돌아가 볼게.”

용건도 끝났겠다, 룬이 인사를 남기기 위해 운을 떼었다.

“그래야겠구나. 저녁은 어떻게 할 셈이니?”

그녀가 꾸미는 약초재배실을 훑어본 룬.

아무리 봐도 금방 끝날 작업은 아니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

룬의 말에 크리스티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여기 오기 전에 케이크 만들 시트와 생크림을 만들어 놓았단다. 만들기만 하면 되니, 간식으로 가져가 먹으렴.”

“고마워, 크리스티나.”

곧이어, 상냥한 빛과 함께 룬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즉시 조리실로 이동한 룬은 물을 소환해 손부터 씻었다.

‘아무도 없다라. 그렇다면.’

룬은 본체로 돌아왔다.

“뀨우우우아!”

그러고는 양 앞발을 위로 쭉 뻗고, 꼬리 끝까지 힘을 주어 기지개를 켰다.

‘뻐근할 땐 역시 이거지.’

인간의 모습이 손 쓰기 편리한 건 있었지만, 본모습의 편안함이 끌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꼬리를 두세 번 더 휭휭 돌려주고, 베이커리 재료가 든 차가운 유리상자에서 하얀 우유 생크림, 노란 커스터드 크림을 꺼냈다.

킁킁

냄새를 맡자, 그냥 식빵을 토스트 해 발라만 먹어도 맛있을 크림들은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빵, 꿀, 딸기와 포도잼.

각종 과일을 이용해 만든 시럽 등.

준비는 완벽했다.

“뀨!”

‘좋아. 훌륭한 마법시료들이군.’

착착 재료들을 늘어놓은 룬은 맛과 효과의 조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완성은 금방이었다.

케이크만 세 종류였는데, 그중 마롱무스케이크 위에 금가루와 밤 토핑을 얹던 룬은 앞발을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인형을 식용 재료로 만들 수도 있겠는데?’

최근 설탕 공예를 하기 시작한 크리스티나에게는, 설탕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공예품이 존재했다.

그뿐인가?

룬과 제드까지 합세해서는, 사탕과 초콜릿 공예까지 잔뜩 만들었었다.

머릿속에 불이 반짝인 기분이었다.

‘녀석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네.’

룬은 거침없이 사탕 공예품들을 꺼냈다.

‘일단 시범작을 만들어 보여주자.’

만드는 건 금방이었다.

그는 간식을 응접실로 옮기며 모코지석으로 일행들을 불렀다.

<간식 만들었어. 다들 응접실로 와.>

<앗! 흑미 얼른 갈게요!>

<어이쿠야, 언제 그런 좋은 일을!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였는데, 감사하군요!>

흑미와 제드의 문자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뒤 떠오른 건 페르디키온의 문자였다.

<인형이 조금 상했다. 일단 가져가마.>

“?”

‘아까 이미 망가진 거 아니었나?’

설마, 거기서 더?

룬은 그 예감이 맞을거라 예상했다.

인간형의 모습으로 바꿔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응접실에 모인 이들 중 흑미, 페르디키온, 듀라한의 손에 들린 인형은 하나같이 넝마 꼴이었다.

절로 이런 질문이 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쩌다 저렇게까지 뜯겼어?”

귤색, 핑크색, 아이보리색 인형 모두 성치 않은 건 기본.

귤색은 단추눈이 덜렁거리고 있었고, 분홍색은 어디서 능지처참을 당한 모양새였다.

그나마 무사해 보였던 아이보리색 인형은…….

‘저건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의 합작이군.’

화형을 당한 듯 한 차례 불에 타서 그을렸는데, 축축하게 물에 젖어 늘어져 있다.

룬의 아련한 시선이 아멜리아를 향했다.

안 그래도 눈치를 보던 아멜리아가 말했다.

“으음, 그……그게 있잖아, 굳이 성능을 한번은 봐야 한다면서…….”

힐끔.

아멜리아의 시선이 페르디키온을 향했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당당하게 말했다.

“아우님의 작품이 궁금했을 뿐이다. 본래라면 내가 저런 곰인형 따위에게 관심을 둘 것 같은가?”

관심이 없으면 건들지도 않았을 녀석임을 뻔히 아는 룬이다.

무엇보다, 화끈하게 태워버린 저 곰인형이 증거였다.

‘딱 봐도 거짓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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