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242)

‘인간계와 관련된 수업이라서?’

여태껏 종족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한 적은 없었으므로, 이는 독특한 수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되었다.

‘뭐든 상관없지만. 흑미도 강해졌고, 일전의 수업들로 다들 어느 정도 대비도 했을 테니.’

룬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시선이 마주친 페르디키온이 유독 편안한 복장을 입고 서 있었다.

“다들 같은 지령을 받았나?”

룬이 대답했다.

“그런 모양이야.”

페르디키온의 옆에 선 아멜리아는 자신의 창인 ‘멜’을 챙겨들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호, 혹시…… 모르니,까. 준비를 해야겠다고 새, 생각…… 했어요.”

꼬옥.

진주 장식과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멜리아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창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흑미도 왔어요!”

“뺙!”

백야를 안고 달려온 흑미.

흑미 역시 꼬리와 귀가 없었다.

본래 여우수인 마족이었던 흑미.

지금은 검은 머리에 분홍빛 눈을 한, 무척 귀여운 인간 소녀로 변해있었다.

대신 벚꽃과 닮은 머리 장식이 까만 머리 양쪽에 달려있었다.

크리스티나가 따로 내어준 인간형 변신 아티팩트였다.

“아, 흑미야……예뻐. 잘…… 어울려.”

아멜리아의 소감을 듣고, 인간 모습인 흑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아멜리아 언니!”

모여보니, 모험가라기보다는 여행을 나서는 귀족 자제들 모임 같았다.

‘인간계에 과업을 하러 갈 때는 이런 느낌이겠군.’

이렇게 모아보니 면면들의 특징이 눈에 보였다.

티 없이 하얀 피부의 청순한 아멜리아와 귀여운 인상의 밝고 활기찬 흑미는 물론.

사나워 보이지만 페르디키온도 귀공자 느낌을 풍겼다.

문제는.

‘다들 얼굴이 너무 눈에 띄어.’

인간의 모습을 했지만 정말 인간 같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이 녀석들의 모습이 어딜 봐서 평민으로 보이겠냐고.’

돈 좀 버는 상인집 자제라 해도 믿기 힘들만치 귀티 나는 모습들.

룬은 드래곤들이 귀족 행세를 하게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얼굴로 귀족이 아닌 게 더 수상하지.’

절레절레.

속으로만 고개를 저은 룬은, 나름대로 수업이 무엇일지 예상해보았다.

‘진짜 귀족 자제가 될 리는 없을 테니, 인식 방해 마법 같은 걸 배우게 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허공에 조그마한 흰 빛이 생겨났다.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흑미였다.

“라이! 안녀엉.”

['◡'✿]

나름대로 준비했는지, 웬 꽃을 그려 보인 라이가 그들 앞에서 빛을 흔들었다.

[ᕕ( ᐛ )ᕗ]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라이의 그림을 추측했다.

“으, 음…… 시, 신난다?”

[Σ( ̄□ ̄;)]

딱 봐도 그건 아니라는 뜻.

아멜리아가 머뭇거리자, 룬이 나섰다.

“이쪽으로 가자는 뜻 같아.”

[ (❀╹◡╹)b]❀❀

빛으로 만들어진 꽃 모양이 흔들리며 룬의 머리 위에 날아왔다.

가볍게 닿아, 소리 없이 사라지는 빛의 꽃.

그를 본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정답인 모양이다. 바로 가면 되겠군.”

그 말에 앞장서기 시작한 라이.

도착한 장소는 크리스티나가 종종 차를 마시던 하얀 테이블이 있는 정원이었다.

거기에는, 평소의 활동성 좋은 옷이 아닌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크리스티나가 앉아있었다.

“어서 오렴. 기다리고 있었단다.”

난생처음 보는 그 모습에 룬은 눈을 깜빡였고, 페르디키온은 뭔가 눈치챈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의외로 용기를 낸 건 아멜리아였다.

“저, 저어…… 오늘은 무슨 수, 수업인가요?”

상냥히 웃어 보인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귀족들의 티 타임이란다.”

“…….”

“물론, 그뿐만은 아니지만.”

룬은 주변을 살폈다.

정원사가 손질한 듯 손이 닿은 흔적이 있는 꽃과 나무.

모인 일행의 수만큼 존재하는 둥근 테이블에 놓인 의자.

그리고 한쪽에 구비된 와인병.

‘설마?’

다시 봐도 와인이었다.

‘혹시…… 술?’

후각에 집중해 향을 맡아보니, 아주 오래 숙성시킨 진품이었다.

‘와인이다!’

심장이 떨려왔다.

뇌물인 듯

닫힌 코르크 너머로 새 나오는 향은 저번처럼 와인인 척하던 샹그리아는 절대 아니었다.

룬은 와인병을 감싼 라벨을 확인했다.

‘오래 눈을 두지는 않았지만 확실하다. 신의 눈물이라 불리는 황금주. 제국력 985산 베르노델 와인.’

와인을 좋아하는 슐츠 황제가 맛보고 푹 빠져 직접 포도원을 만들어 낼 만큼 맛이 좋았다는.

제조국인 베르노델국이 전쟁으로 망하여 제조법이 상실된 비운의 와인.

귀하다 못해 돈 주고도 못 사는 포도주라는 소리다.

그리고, 룬이 이런 걸 알고 있는 이유는.

‘맛으로 유명한 건 물론, 망한 망국의 와인이라 역사가 얽혀있기 때문이지.’

이런저런 배경을 떠나, 맛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유명한 술이었다.

하지만 저런 걸 진짜로 내어 줄 리는 없을 터.

에휴.

속으로 절로 한숨이 삼켜졌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수업 중인 자리에 비치된 와인인데 마실 수 있을 리 없지. 그림의 떡이나 다름 없잖아.’

다만, 그냥 둔 와인은 아닐 터.

그때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 님을 뵙습니다.”

오른손을 배 앞에 두고 고개를 숙여 보인 붉은 머리의 소년.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하는 그를 따라, 룬이 함께 고개를 숙였다.

흑미와 아멜리아도 조금 늦게 룬을 따라 했다.

한 호흡 지난 뒤 크리스티나가 자리를 권했다.

“앉도록 하렴.”

페르디키온이 즉시 움직이고, 그다음 룬, 흑미, 아멜리아가 따라 앉았다.

부드럽게 웃은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자, 너희의 인사가 인간에게 어떻게 보였을 것 같니?”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 건 흑미였다.

“흑미는요, 상냥한 크리스티나 님을 뵈어서 좋아요. 그런 흑미의 마음이 느껴졌을 것 같아요.”

순수한 답변에 크리스티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평했다.

“좋은 대답이구나. 혹시 다른 대답은 없니?”

나름대로 고민하던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어…… 조, 조심스러운 자리……로 여겼다고 생각 해, 해요. 왠지 시험대에 오른 느, 느낌이랄까…….”

크리스티나가 살짝 미소를 띠며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래. 핵심에 근접한 말이기도 하구나.”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이번에는 룬을 향했다.

“룬, 너는 어떻게 생각했니?”

둘이 문답하는 사이, 룬은 이미 주변을 훑은 뒤였다.

원형 테이블, 모인 일행의 인원수대로 있는 의자.

‘긴 사각 테이블이 아닌 원형의 테이블은 신분의 고저 없이 평등한 대화 상대를 뜻하지. 그런 자리에 망국의 와인이라.’

겉으로 보기에는 친근한 자리로 보이지만, 의도가 느껴졌다.

이런 자리를 마련한 자의 생각이라.

룬이 답했다.

“아마, 가장 먼저 인사한 페르디키온 형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여길 것 같아.”

그 말에 크리스티나가 좀 더 흐뭇한 미소를 드러냈다.

“감이 좋구나, 룬.”

이어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자, 붉은 머리의 화룡족 소년이 입을 열었다.

“룬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단다. 네게는 이미 익숙한 수업이겠구나.”

역시나였다.

크리스티나의 손이 주전자를 향했다.

“그들의 역사에는 반드시 우두머리와 그 휘하의 귀족이 있지. 왕국도, 제국도. 그보다 작은 마을 단위까지 말이야.”

그녀의 손끝이 손잡이를 가볍게 건드리자, 마법에 걸린 주전자가 스스로 공중에 떠올랐다.

“피, 욕망, 종교 등.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역사를 통틀어 늘 파란을 불러일으키곤 했단다. 역사가 바뀌면 문화를 바꾸고, 없애고. 때로는 발전하고 도태되었지.”

쪼르륵.

기울어진 주전자가 일행들의 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문화를 경험해 보자꾸나. 그게 이 수업의 목적이란다.”

룬의 시선이 다시 와인을 향했다.

망국의 와인.

와인 때문에 흥한 나라이자, 그 와인을 욕심낸 제국에 의해 망한 나라.

저 하나의 물건이, 바로 크리스티나가 말한 인간의 이야기를 축약한 물건이었다.

흑미가 호오오, 하고 눈을 반짝였다.

아멜리아는 긴장한 눈치로 어깨를 좁혔다.

‘하기야, 그쪽 문화가 존재하는 곳에 일하러 가는 입장이니. 페르디키온의 과업을 위해서라도 알아두는 게 좋겠지.’

이미 경험이 있다지만, 페르디키온이 모든 걸 다 알려줄 수는 없다.

룬 역시 지식을 전수 받긴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을 터.

이는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준비한 첫 수업은, 티파티 대화법이란다. 이제,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시범을 보여줄게.”

그 말을 맺은 뒤,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페르디키온을 향했다.

“붉은 귀공자에게 잘 어울리는 와인을 준비했답니다. 부디 좋은 선물이 되길 바라요.”

페르디키온은 와인을 보지도 않았다.

“마음에 걸맞은 답례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디키온의 답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빙긋 웃으며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지금의 담소가 어떤 의미일 거라 생각하니?”

“우우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고민에 빠진 흑미.

의외로 수업에 적극적으로 나선 아멜리아가 머뭇거리며 입을 움직였다.

“아…… 그, 그러니까. 귀한 선물을 준 거라고 생각……해요.”

대답하긴 했지만, 물빛 소녀는 자신이 없었는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아꼈다.

그럴 만도 한 게, 둘의 대화만 들으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룬은 잠시 가늠하다 입을 열었다.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보이는데. 망국의 와인이니 망국의 순리를 따르라는, 패배를 기원하는 걸 수도.”

이채 어린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정면으로 보며 룬이 말을 이었다.

“혹은, 나라는 망해도 술은 모든 이들이 원할 귀한 물품이라는 특징을 상징으로 삼았을 수도 있을 듯해.”

감탄한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훌륭하구나. 다양한 해석을 곁들인 영특한 대답이었어.”

달칵.

공중을 돌며 차를 모두 따른 주전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너희들이 인간 세상을 다니다 보면, 때로는 이런 의미들을 읽어낼 필요가 있지.”

먼저 찻잔을 든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꼭 정답이 아니어도 좋단다. 너희가 보는 세상과 다른 관점을 가지는 연습이라 생각하렴.”

이 수업은 말로 보이는 것 이면을 읽는 능력을 기르는 자리였다.

룬은 흑미와 아멜리아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확실히, 해 두면 좋은 수업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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