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흑미나 아멜리아만 해도, 인간을 경험해 본 적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 보니, 타인을 의심조차 할 줄 모를 게 뻔했다.
‘순수한 건 좋지만, 확실히 인간의 안좋은 면을 보게 되면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좋은 말을 하는 듯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미리 알고 가면 더 나으리라.
‘좋아. 이 수업은 특히 잘 들어두면 좋겠군.’
룬은 이 티파티를 통해 알려주려는 게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했지만, 흑미는 난감한 눈치였다.
“으으. 흑미는 잘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흑미는 귀가 있었다면 뒤로 접혔을 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 룬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페르디키온 형의 불의 레어에 갔을 때 말이야, 드워프 아저씨들 기억하지?”
“앗, 기억나요!”
아는 게 나와 신이 난 흑미가 냉큼 대답했다.
아멜리아는 잘 모르는 드워프족 이야기가 나오자 집중하는 눈치였다.
“그때 아저씨들 어땠어?”
“으으음. 흑미 많이 예뻐해줬어요. 옷도 만들어 줬구요. 술이랑 금속이랑, 장비들을 좋아했구…… 아! 룬 님 비늘도 엄청 가지고 싶어 했어요!”
룬이 생각한 것과 다른 이야기도 있었지만, 여튼 답이 들어있었다.
“그래. 드워프들은 자기 욕망이 투명하지. 하지만 그걸 눈에 보이게 말하지 않고, 이런 물건에 느낌을 담아서 알려준다고 생각하면 돼.”
잠깐 생각한 흑미가 눈을 깜빡이더니 제 손바닥을 가볍게 마주쳤다.
“아! 흑미 그거 뭔지 알아요. 그건 ‘뇌물’이란 거죠?”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자리에 일시적인 침묵이 감돌았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떠오른 난쟁이 인형의 얼굴.
그런 룬의 짐작을 긍정하듯 흑미가 답했다.
“제드 아저씨요!”
‘역시나냐.’
잠깐 잊고 있었지만, 제드의 본래 성격은 그야말로 돈에 충성스러운 탐욕의 화신.
나이가 들며 성숙한 부분이 생기고, 실제로 룬에게 성숙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본성이 어디 갈 리 없는 법이다.
“어? 그러고 보니 흑미 뇌물도 받아봤네요.”
“크흡! 콜록!”
정말 예상 못 한 말이었는지, 페르디키온이 사레들린 얼굴로 목울대를 울럭거렸다.
아멜리아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눈치로 흑미를 바라보았다.
룬이 물었다.
“뭘 줬는데?”
“말린 과일 조각을 줬어요.”
아.
‘뭐야. 그 정도는 그냥 간식 준 거잖아.’
단 걸 너무 많이 줘서 좋을 건 없지만, ‘뇌물’이란 단어를 쓸 만큼은 아니었다.
안도를 한 룬이 한결 편안한 얼굴을 했다.
딱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만.
“대신, 흑미는 드워프였던 제드 아저씨랑 드워프 언니들하고 아주머니들 만나러 갔었어요!”
“?”
얼굴이 굳은 건 룬뿐만이 아니다.
“……어머나.”
차마 아무것도 모르는 흑미에게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못한 이들.
당장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상상이 떠올랐다.
***
-흑미 님, 흑미 님. 이 제드가 부탁할 게 있는데 말입죠.
가식적이지만 친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드워프 제드.
아무것도 모르는 흑미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앗! 제드 아저씨. 무슨 부탁이에요?
-커허험! 별건 아니고…… 아! 우선은 이거부터 드셔보시죠?
-아! 맛있다아. 이거 달아요!
-그렇죠! 제가 준비한 회심의 작은 뇌물…… 아니, 성의입죠.
제드가 준 말린 과일을 냠냠거리며 먹는 흑미에게 아주 음흉한 미소를 짓는 제드.
그가 손을 샥샥 비비며 입을 연다.
-고것 참 맛있죠? 흑미 님 드리려고 아주 어!렵!게! 구한 겁니다요.
-앗, 정말요? 너무너무 고맙숩니다!
꾸벅, 얼굴을 크게 숙이는 흑미에게 제드가 멋쩍게 입맛을 다신다.
-흐흠. 그래서 말인데, 제가 작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요!
-으응? 부탁이 뭔데요?
-아유~ 진짜 별건 아니구요~
손사래를 치며 순수한 분홍빛 시선을 향해 ‘걸렸다, 월척!’이라는 의미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내는 제드.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제드의 친구를 좀 같이 만나러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요! 아주 쎄끈, 아니 예쁜 친구인데 낯을 가려서 말이죠. 흑미 님이라면 금방 잘 친해질 것 같거든요!
고개를 갸웃한 흑미는 맛있는 걸 나눠주는 착한 드워프, 라고 여기는 제드에게 환하게 웃어보인다.
-네!
총총 따라간 흑미는 자기도 모르게 제드의 연애 사업을 돕게 된다.
***
룬은 페르디키온과 크리스티나와 시선을 맞췄다.
아멜리아는 아직 뭔가 고민 중인 모양이지만, 인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세부 디테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상이란 뜻이었다.
그때였다.
“저, 저기……. 나는 있잖아…… 뇌물이 아니……었다고 새, 생각해. 뇌물인 듯, 보……인 건 맞지만…….”
아멜리아가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내었다.
뭐라고 생각하는데
“수업……하면서, 같이 게임하면서 본 제드 씨는, 승부욕이 강해 보였지만 아, 안 좋은 일을 할 느낌까진 아니었어서…….”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아멜리아가 부담스러웠는지 말끝을 살짝 흐렸다.
듣고 보니, 아멜리아의 생각도 일리 있어 보였다.
‘하긴, 생각해 보니 제드 녀석. 어린 생명체에게 악의를 품는 법은 없었지.’
룬은 <폐광 던전>의 히든 보스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제 앞에서 끝내 버티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데…… 악의가 없는 거지, 잘못을 안 하는 건 아닌 놈이라 문제란 말이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암시장 열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룬을 협박하질 않나.
아직 어린 아이에게 쓰기엔 다소 거슬리는 ‘집착 변태’ 같은 단어를 써서 혼난다던가.
그런 식으로 룬에게 한 소리 들은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멜리아. 그 말도 맞지만, 악의가 없다고 무조건 선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아?”
룬의 물음에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었다.
“그, 그렇지만…… 어제 게, 게임하면서……들었는걸. 제드 씨, 결혼도 결국 모, 못하셨다며.”
룬은 생각했다.
아멜리아도 만만찮게 강력하다고.
이어진 말은 확신을 불어넣어주었다.
“……제드씨, 능력도 있고 돈도 있으시잖……아? 그러니, 흑미를 이용할 정도의 나, 나쁜 짓까지 하며…… 여자를 만날 리는 없을 거라고 새… 생각해…….”
“…….”
“…….”
갑자기 자리가 숙연해졌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느낀 건지 아멜리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어왔다.
“내가…… 뭔가 자, 잘못 말했어?”
“……아니.”
룬이 총대를 메고 고개를 저어주었다.
하얀 거짓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진실을 말 할 수 있겠는가?
여자 좋아하고, 돈이 많고, 연애에 열성을 다한다 한들…… 실패하는 녀석은 있다는 것을.
‘이 자리에 제드가 없는 게 다행이다.’
룬은 전날, 제드가 카드게임에서 전멸하고 패배하며 외치던 절규를 떠올렸다.
-결혼도 못 해 보고 죽었는데 게임에서까지 패배자라니요오오!
차마 말 해줄 수 없는 진실과 더불어, 룬은 아멜리아가 룬과 같은 상상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젊은 시절 제드를 모르니, 어쩔 수 없나.’
아멜리아가 제드를 제대로 본건 최근.
그것도, 드워프 제드가 아닌 난쟁이 인형 제드였다.
반면, 룬은 여자 드워프를 꼬셔 애인을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잔머리를 굴리던 100년 전 제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근데…… 제드 녀석. 생각해보면 순정파였던 놈인데. 어쩌다 결혼도 못하고 죽게 되었는지.’
페르디키온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녀석에 대해 알지도 못하니 그런 말이 나오는 거다.”
이어, 그가 미간을 구기고 한 소리 터트리려던 순간.
짝!
어느새 찻잔을 내려둔 크리스티나가 손뼉을 가볍게 쳐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수업 중에 이어갈 말은 아닌 듯하구나.”
그 말에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멋쩍은 표정을 지은 페르디키온이 자리를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앗…… 죄, 죄송해요.”
“나도 미안해, 크리스티나.”
페르디키온, 흑미, 아멜리아, 룬 순으로 미안함을 표했다.
크리스티나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갈 길이 멀겠구나. 하지만 처음은 누구나 그렇지. 다음부터는 주의하렴.”
“네!”
씩씩한 흑미의 대답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세를 바로하는 등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 뒤로, 수업에 집중하게 된 일행들은 전례 없는 집중력을 발휘해 그 날 배워야 할 내용을 모두 흡수했다.
***
수업은 오후 늦게서야 막을 내렸다.
점심 식사 자리의 예절까지 배우느라 점심을 챙기기는 했지만, 대신 수업은 조금 일찍 끝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었다.
그리고,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대련을 청했다.
“나 수련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도와주라, 형.”
“좋다.”
척 하면 척이라고.
의도를 짐작한 페르디키온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 벚꽃 아티팩트를 조작해 작동을 멈춘 흑미가 귀와 꼬리를 쏙쏙 꺼내며 물어왔다.
“오잉. 흑미도 같이 가도 돼요?”
“…….”
아무것도 모르는 저 해맑은 얼굴이라니.
하지만 룬이 괜히 페르디키온을 데려가려던 건 아니었다.
‘제드 녀석 이야기 좀 해보고 싶은 건데. 적당히 거절해야겠군.’
룬이 입을 열려는데, 아멜리아가 흑미를 뒤에서 안아 살짝 들었다.
“으음, 흑미야.”
“네?”
발 끝이 공중에 뜨자, 흑미가 발끝을 살살 흔들며 대답했다.
“흑미야, 우, 우린 백야랑…… 잠깐 정원 구경……가지 아, 않을래?”
아멜리아를 올려다본 흑미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좋아요! 흑미가 안내할게요!”
“삐약!”
백야도 함께 하겠다는 듯, 아멜리아의 푸른 머리 위에 살포시 앉았다.
직후 아멜리아가 흑미 모르게 룬 쪽으로 눈짓했다.
명백한 신호였다.
‘고마워, 아멜리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룬이 눈에 감사의 뜻을 담아보내며 생각했다.
덕분에 자리를 옮긴 룬과 페르디키온.
아무도 없는 대련장 위에 올라선 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드 녀석은 대체 뭘 했던 걸까?”
팔을 쭉 뻗어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니, 페르디키온의 답이 돌아왔다.
“놈은 여자랑 잘 되고 싶어 열성적이었다. 언젠가 아우님이 연애 상담을 해 왔을 때 제드 녀석이 답해준 걸 기억하나?”
“? 무슨 소리야. 나는 연애 상담 한 기억이 없…….”
부정하려던 룬은 뭔가를 떠올리고 말을 멈췄다.
‘설마 100년 전 그때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