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드래곤 레어에서 마력 열쇠를 통해 아멜리아를 처음 만날 때쯤.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으나, 경계가 너무 심해 말 붙이기도 힘들었던 아멜리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던 때가 있었다.
-소심한 여자애는 뭘 좋아하지?
분명, 룬이 그렇게 물어보긴 했었다.
룬은 미간을 구겼다.
‘연애 상담 같았던 질문…… 인건 알겠는데. 그거 아니라고.’
이미 페르디키온은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시치미 떼고 싶은 마음이라면 뭐, 이해는 간다. 원한다면 지금은 넘어가 주지. 어차피 본론은 그게 아니니.”
“아니, 그거 진짜 아니라니까.”
룬이 재차 부정했지만 페르디키온은 몸을 다 풀었는지 바로 주먹을 뻗어왔다.
룬이 고개를 젖혀 피하자, 전의로 타오르는 붉은 눈이 룬을 향했다.
“그때 제드 녀석이 그랬지. 여자는 맛있는 것, 예쁘고 반짝이는 것, 마음을 담은 로맨틱한 선물 따위를 아주 좋아한다고.”
더 이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룬이 페르디키온의 손목을 빠르게 쳐냈다.
‘그걸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다고?’
룬은 그동안 반쯤 까먹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그 즈음의 일이 대략적으로 기억은 났다.
타탁!
손 방향을 바꿔 페르디키온의 목젖에 손날을 치기 위해 발을 바꿨다.
그러자, 화룡족 소년은 상체를 숙였다.
그대로 품 안으로 파고들어와 제 등으로 룬을 들쳐올리려 드는 순간.
휘익!
두 손을 모은 룬이 빠르게 페르디키온의 등 위에 손을 짚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탁.
가벼운 발 걸음 소리와 함께,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 말 그대로, 당도 높고 맛이 있는 간식이라던가, 예쁘고 반짝이는. 즉 흑미를 준비한 게 아니겠나.”
마주본 페르디키온이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말했다.
“심지어 여자 드워프가 많은 장소라니. 공방의 대부분은 남성 드워프다. 그게 무슨 소리인 줄 아나?”
빠르게 말을 이으려던 페르디키온이 큼, 하고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 네 입장에서는 불쾌한 소리일지도 모른다만. 일반적으로, 성인 드워프들에게 그런 장소는 술집밖에 없다.”
드워프들이 호쾌하고 정도 많지만, 그렇다고 선하고 착하기만 하냐면 절대 아니었다.
<여자가 많은 술집>이라.
이는 룬이 어리다고 생각한 페르디키온이 아주아주 순하게 돌려 말한 게 틀림없었다.
‘저 얼굴만 봐도 어딜 생각하는지 알겠네. 유곽 같은 장소겠지.’
확실히 날것의 단어를 쓰기에는 무리가 있긴 했다.
웃음이 웃음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멸 섞인 얼굴.
지금 말해봐야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아우의 순수함으로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룬은 그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 해주었다.
“형, 나는 제드가 그렇게까지 가벼운 녀석이라 생각하진 않아.”
‘그런 장소가 있었다면 몰랐을 리 없거든.’
페르디키온은 모르겠지만, 당시 룬은 어린 흑미 때문에 드워프 마을에서도, 제드가 인간계에 정착할 때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대충 파악한 상태였다.
혹 꼭꼭 숨겨진 장소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오가는 동선 근처에는 그런 장소가 없었어.’
자세를 바로 한 룬이 손목을 한 바퀴 돌렸다.
“이걸로 형하고 오래 이야기 해봐야 뭐하겠어. 당사자에게 물어보러 가는 게 빠르지.”
“좋다. 흑미를 이용해 여자의 환심을 사려든 적 있는지, 직접 물어보러 가지.”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투 자세를 풀었다.
“어차피 답은 나왔다만.”
페르디키온의 말이 사실이라면, 룬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한 일이다.
여자의 환심을 사려고 흑미를 이용했다는 소리니.
심지어 유곽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아니지.’
연심이랍시고 홍등가나 유곽에 있는 여성에게 흑미를 데려간다?
페르디키온은 모르겠지만, 룬은 제드를 주시하며 은근히 드래곤이나 쓸 법한 피어(fear)를 둘이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보이곤 했다.
때문에 룬을 꽤나 두려워했으니, 흑미를 건드릴 리 없었다.
무엇보다.
‘녀석이 그렇게 생기긴 해도, 나름 상도덕은 있긴 한 놈이라.’
오죽하면 ‘집착 변태’를 조심하라고 했다가 룬에게 그런 단어 좀 조심하라고 경고를 들었겠는가.
문득, 룬은 페르디키온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잠들었던 100년 동안, 제드를 지원해 준 게 저 녀석이랬지.’
이동마법을 쓰기 전,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스쳐 가듯 질문을 던졌다.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수면기에 들었던 동안 제드에게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별 건 없었다.”
촉이 왔다.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는 게, 룬의 짐작이 사실임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막 이동마법을 사용하려던 룬이 마법을 멈췄다.
“말 못해주는 일이야?”
“…….”
페르디키온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결국, 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드도 형도, 내게 말 못할 일이 있었다는 거네. 알겠어.”
의식하지 않았으나, 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울렸다.
“이동할게. 어차피 들으려던 건 흑미 문제니까.”
우웅.
다시 이동마법을 전개해 검은 방. 그 안에 있을 제드의 대장간에 이동하려던 순간.
탁.
“잠깐 기다려라. 룬.”
페르디키온이 룬의 손목을 잡았다.
룬이 고개를 돌렸다.
“왜?”
되물음에도 페르디키온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몇 초가 그 곱절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듯, 짙게 느껴질 차.
페르디키온은 한숨을 길게 쉬며 룬의 손목을 놓았다.
“다소 불명예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다.”
“무슨 일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제드가 죽음을 각오하고 룬과 있기로 한 일.
그건 아무나 해낼 일이 아니다.
다른말로 하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 일이 제드의 드워프생에서 일어났다는 말도 되었다.
이용할 수 있겠네
“네 권속이 문제가 있었다는 걸 말 하고 싶진 않았다만.”
페르디키온이 답지 않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실, 녀석이 드워프 마을에서 여성 드워프들을 데려간 일이 있었다.”
“단체로?”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
룬의 의아함을 이해한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허락했다 한들, 나의 아버지께서 드워프들의 이동을 반겼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계약에 따라 레드 드래곤 영토에 자리를 잡는 대가로 후손들까지 레드 드래곤 일족을 위해 일해야 하는 드워프족.
후손들까지 묶인다는 점에서, 이는 강력하고 무서운 계약이었다.
“맞아. 이전 개혁파 드워프들도 제드가 내 권속이 되었기 때문에 보조로 데려간 거잖아?”
룬의 대답에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 뒤로 아버지와 크게 다퉜었다. 현재로선 관계도 좀 서먹한 편이지.”
심플한 말이지만, 지독한 다혈질인 둘의 성정을 뻔히 아는 룬이다.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게 눈에 훤했다.
‘보나 마나 이 녀석이 흠씬 두들겨 맞았을 텐데.’
대놓고 반항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테니 저번처럼 부지깽이로 때리는 수준이 아니었을 터.
자는 동안 성체도 아닌 녀석이 고생했을 거라 생각하니, 룬의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형, 괜찮았어?”
“버틸 만했다. 예고 없이 바닥에서 용암이 솟고, 화산이 몇 개 터지긴 했다만.”
기가 찬 소리였다.
‘그게 버틸 만한 수준으로 싸운 거냐. 드래곤 싸움에 용암 터졌으면, 넌 등짝이 터졌겠지.’
일전에 페르디키온의 꿈에서 보인 파시야스가 떠올랐다.
어휴.
꼬리치기로만 쳐 맞아도 피부 껍질 다 벗겨졌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호흡이 좀 더 길게 들이 내쉬어졌다.
‘죽기 직전까지 간 거 아냐?’
어쨌든 아직 파시야스가 훨씬 강하다.
룬에게 말하지는 않지만, 보나 마나 피 튀고 이가 날아가며 잔인하게 해를 입었을 터였다.
“형, 고생했겠네.”
“뭘. 어쨌든 이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가 떠오르는지 페르디키온의 얼굴에도 자조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다만, 그게 완전한 승리라고 할 수는 없을 뿐.”
“이겼는데, 승리한 건 아니라고?”
한결 의젓해 보이는 얼굴로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년식 과업. 내 아버지가 제시하기로 했다. 통과하지 못하면 지금의 내 레어를 반납하게 되지.”
룬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아멜리아가 과업 수행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으로도 꽤 까칠하게 굴더라니.
‘이 녀석 입장에서는 레어와 레어민. 앞으로의 삶까지 걸린 일이었잖아. 당연히 동행 기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겠군.’
이런 식으로 사정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덕분에 ‘언령’까지 써가며 아멜리아를 시험한 이유는 이해했다.
룬이 입을 열었다.
“그럼 엄청 중요하고 큰 일이잖아. 대책은 있어?”
문득,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룬에게 닿았다.
“너만 있으면 괜찮다.”
“…….”
그게 무슨 대책이냐?
한 소리 던지고 싶었지만, 룬은 속으로 삼켰다.
‘원래 아멜리아는 동행할 계획이 아니었어. 그럼 나와 흑미. 듀라한, 백야가 일행이었단 소리인데.’
흑미나 듀라한이 힘이 되는 건 맞지만, 어린데다 룬의 권속.
사실상 믿는 건 룬이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룬은 이제 100년이 넘은 해츨링이다.
장원급제 시험을 치는데 똘똘한 어린 도령을 데려가는거나 다름없었다.
그 말은 도움이 안 된다는 말과 같았다.
차라리 고양이 손을 빌려 쓰는 게 나을 수준일지도 몰랐다.
그가 평범한 해츨링이 아닐 뿐.
‘그만큼 혼자 돌파할 자신이 있다는 소린가.’
그렇다면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과하다.
대범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
정도를 넘치면 오만이 될 수도 있었다.
한데, 별거 아니라는 듯한 화룡족 소년의 표정을 짓고 앉아있는 걸 보니 절로 미간이 꿈틀거렸다.
‘무모해도 너무 무모한데, 이유나 들어보자.’
룬이 입을 열었다.
“형, 나 아직 해츨링인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그런 중요한 일에 나를 포함시킨 이유가 뭐야?”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또렷하게 룬을 향했다.
“아직 어린 해츨링, 그렇지.”
깜빡임 하나 없는 붉은 루비색의 눈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피부에 화산의 열기가 느껴지는 착각이 들 즈음, 페르디키온이 말을 이었다.
“또한, 불의 인장을 가진 내 아우님이기도 하다. 스스로 어둠의 주인임을 천명하고 힘을 되찾은. 그리고 물과 숲의 인장까지 지닌.”
뚜렷한 시선에 담긴 의미가 전해졌다.
“지금까지 그런 해츨링은 없었다.”
강한 확신이 담긴 시선이 오롯이 룬에게 고정되었다.
“나는 안다. 네 재능은 분명 나보다도 뛰어난 구석이 있다는 걸.”
말만 들으면 마스터 피스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건 진실이기도 했다.
‘진짜로 내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데려가는 거였군.’
결국 믿는 구석이었다는 소리.
하지만 페르디키온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안했다. 너와 과업을 깨보이겠다고 말이지.”
“허락하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