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아버지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룬은 직감적으로 어째서 허락을 받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어리니까 별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 한 거네. 하긴 누구라도 당연하게 생각할걸.”
“뭐, 그 짐작대로다.”
적어도 겉보기에 룬은 도움은커녕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파시야스는 페르디키온의 제안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을 터다.
실제로 파시야스는 ‘제 어미처럼 정에 약해 어리석은 제안을 하는구나.’라며 페르디키온을 무척 업신여겼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페르디키온이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룬, 너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긴 모양이다.”
“그건 뭐…… 할 말이 없네.”
룬 때문에 페르디키온이 변화된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성장과 발전이지, 잘못된 길은 아니다.
무엇보다 페르디키온이 받아들인 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설득할 말 따윈 없었다.
페르디키온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내 아버지는 이번 과업을 통해, 나와 너의 생각이 틀렸음을 가르치고 싶어하시지.”
듣고 있자니 허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게 내 덕분이라 해야하나, 나 때문이라 해야하나.’
만약 페르디키온이 그대로 살았다간 속이 곪아 썩었을 터.
그대로 자라면 분노에 마음과 몸을 불사르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모든 걸 태우는.
재앙의 화룡으로 자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긴, 그걸 나약하고 쓸모없다 여기는 자였었지.’
생각에 잠겨있는 룬을 향해 페르디키온이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너를 통해 바뀐 지금의 내가 더 강하다는 걸.”
룬은 스승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좋은 마음가짐이네.’
이어서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또한, 룬 네가 나의 비장의 힘이 되어 줄 거라는 것 역시 알지. 어둠의 힘을 완전히 얻었다는 건 네 일족의 비밀. 내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 말은……?”
룬은 페르디키온의 표정에 기묘한 장난스러움이 번뜩인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의 아버지께서는 룬, 네가 물의 일족에게 인장을 받은 것만 알고 계신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한 방 먹일 준비를 마친 악동 같은 얼굴로 페르디키온이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아버지는 물의 일족들이 네가 인장을 잘 다루는지는 관계 없이, 물의 인장을 받았다고 여기고 계시다.”
“마치, 형이 나한테 불의 인장을 주도록 허락한 이유랑 같다고 여기는 거구나.”
당시 룬에게 건네진 불의 인장은 페르디키온이 독단으로 주었으나, 파시야스가 허가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결코 불의 일족을 배신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족쇄로 작용할 테니까.
“물의 일족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이야.”
룬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길길이 날뛰셨지. 감히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하는 파렴치한 놈들이라고 말이다.”
페르디키온은 드물게 즐거워 보였다.
붉은 머리 소년이 말을 이었다.
“어둠 일족 유일한 후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치졸한 계략이라며 분통을 터트리셨지. 그 모습을 보기만 하려니 입이 다 간지럽더군.”
“잘 참았네.”
기본적으로 소통하지 않는 종족인 드래곤 족.
거기에, 자존심까지 높아 벌어진 착각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솔직히 알렸다 한들, 진실을 믿을 드래곤이 있을까.
평범한 해츨링이 물과 숲, 어둠 인장을 자력으로 모두 얻었고, 심지어 그 힘을 전부 다룬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크리스티나가 그랬지. 힘을 숨겨두는 건 비장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고.’
그녀의 말이 맞았다.
룬이 새삼 그녀의 혜안에 감탄했다.
어리고 힘 없는 해츨링이라는 모습이 파시야스에게 방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니까.
룬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겠네.”
특히 지금이 가장 좋은 도박의 기회였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쓴 약을 맛본 얼굴을 했다.
“룬. 널 이용한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페르디키온의 답을 들은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오히려 좋아. 진짜 잘했다 형.”
‘그야말로 써먹을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었으니까.’
룬은 페르디키온의 영리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잠시 흐뭇한 시선으로 페르디키온을 보았다.
‘녀석. 볼수록 잘 성장했단 말이지.’
이 기회를 살려 과업을 완수시켜준다면.
훌륭한 성체가 되어 룬에게 아주 유용한 패가 되어주리라.
‘후후.’
룬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룬의 속을 모르는 페르디키온은 제 아우의 칭찬에 내심 좋은 눈치로 입을 열었다.
“나는 당당히 과업을 해결할 거라 선언해 놓았다. 대신, 성년식 과업에 실패하기 전 까지는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확답도 받아내었지.”
룬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래서 드워프들이 자유롭게 인간계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
페르디키온이 어깨를 펴고 말할만도 했다.
다만, 이는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파시야스가 왜 그랬는지는 알겠어. 과업에 실패하게 되면 페르디키온이 다신 일어나지 못하게 밟을 셈이군.’
페르디키온이 이룬 성과가 클수록.
성년식 과업 실패로 한번에 물거품처럼 꺼뜨릴 셈이 틀림없었다.
희망을 키울수록, 그것이 꺽일 때의 절망은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지독하군. 아버지란 자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페르디키온이 거의 영향 받는 눈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기분 좋은 티를 감추지 못한 페르디키온이 주의를 주었다.
“이런 사정은 너니까 말한 거다. 다른 녀석들에게는 비밀로 해둬.”
“알겠어.”
‘적당히 알리고 협조를 구하는 것도 괜찮을 텐데.’
아멜리아와 흑미 모두 같이 화내고 힘내줄 이들이었지만.
아무래도 페르디키온에게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들을 믿고, 솔직히 말할 만한 시간이.
‘그렇지만 잘한 건 잘한 거고.’
룬은 원점으로 돌아와, 문제를 상기시켰다.
“드워프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된 건 알겠어. 그럼, 제드 녀석은 대체 뭔 짓을 했는데?”
뭔가 굉장하네
페르디키온은 드물게 난처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룬도 차분히 말을 기다렸다.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네가 잠들어 있을 때다. 아버지와 서먹해진 뒤에, 제드 녀석에게 말해 두었다. 모든 건 내가 책임 질 테니 드워프들을 정착시켜가라고.”
“응.”
여기까지는 기특하기도, 고맙기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화룡족 소년의 표정은 미묘했다.
“녀석은 처음에 무척 좋아하더군. 오죽했으면 그 자리에서 날 끌어 안으려 들었다.”
“그럴 정도로 기뻐했다는 이야기겠지만. 형이 놀랐겠네.”
“그래. 나도 모르게 주먹을 쓰고 말았다. 네겐 또 미안한 말이다만.”
“뭐…… 맞을 짓 한 것도 맞으니까. 신경 쓰지 마.”
말은 안 했지만, 같은 상황이라면 룬도 좋게 반응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안 그래도 제 무기인 파라리엄을 휘두르며 불을 휘두르고 다니던 제드.
그런 녀석이니, 흥분을 주체 못하고 달려들었을 텐데 상상만해도 그닥 달가운 일이 아니다.
페르디키온이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제드는 드워프 마을에서 자신이 만든 인간계의 터로 드워프들을 데려오곤 했다.”
조금씩 회상에 잠겨드는지, 페르디키온의 말이 다시 차분해졌다.
“처음에는 개혁파부터. 시간이 좀 지나니 보수적인 전통파 드워프도 조금씩 건너가곤 했다.”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문제없어 보이는데.’
그뿐이랴.
말만 들으면 진취적이고 훌륭하기까지 했다.
워낙 겁 없이 다니던 녀석인 만큼, 기회만 보이면 냉큼 움직이는 성향이 이번에는 빛을 발하기도 했고.
룬이 가볍게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형 덕분에 제드가 좋았겠는데? 워낙 실행력은 좋은 녀석이라 행동도 빨랐을 거고.”
아마, 결과도 무척 빨리 냈을 터.
페르디키온 역시 레어민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 만족할 만했다.
페르디키온이 수긍하며 말했다.
“그래. 여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
후.
미간을 구긴 페르디키온은 속에서 슬슬 열이 올라오는 표정을 지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녀석이 여성 드워프들을 데려가기 시작하더군.”
‘호오. 진짜는 여기부터인가.’
룬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경청하는 눈으로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말을 덧붙이는 페르디키온은 열이 올라오는 눈치였다.
“처음엔 그리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들 사정은 잘 모르나, 대륙이나 대장장이 일에 여성 드워프들의 관심이 더 늘었겠거니, 했을 뿐.”
쳇, 하고 표정을 찌푸린 녀석이 말을 이었다.
“부끄럽지만, 아버지와의 대담으로 입은 상처가 아직 낫질 않아서. 당시 나는 그들에 대해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그 말에 룬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심했나 보네. 건강해 보여서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어.”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애초에 이런 일로 걱정을 끼칠 생각도 아니었으니 상관 없다. 일부러 크리스티나 님에게 함구를 부탁했던 것도 있고.”
워낙 자존심이 센 녀석인 건 알았지만, 입막음을 부탁할 정도면 지독하게 앓았던 모양이었다.
룬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이 녀석 설마, 그거 말하기 싫어서 망설인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룬이 물었다.
“얼마나 다쳐있었는데?”
“…….”
“형?”
“……몇 년 안 된다.”
대답을 들은 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확실히 찔리는 게 있는지, 페르디키온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페르디키온 녀석, 상처가 심해서 거동이 불편할 정도였다는 거군. 잘 알겠다.’
이제 와 추궁해봐야 끝까지 말하지 않을 셈인 게 틀림 없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지.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느낌으로 굴렀던 모양이라 룬은 추측했다.
에휴.
고생한 녀석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한편으로는 보기 안쓰러운 것과는 별개로 그 모양이 되도록 투쟁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
‘덤으로 드워프 족과 제드의 일까지 잘 되어서, 나도 득을 보긴 했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며 보고 있으려니, 유난히 찌푸려진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신경 쓰이네.’
어린 녀석이 폭력에 시달려 고생하게 되다니.
하지만 페르디키온이 원치 않아 했으므로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모른 척 말을 넘겨주니 페르디키온이 냉큼 말을 이었다.
“큼……. 아무튼, 상처가 다 나았을 즈음인가. 그래. 흑미가 중간에 깨어났다.”
“흑미가?”
‘전혀 몰랐는데.’
룬의 되물음에 페르디키온은 대답했다.
“너는 워낙 잘 자고 있었다. 어둠의 인장과 물의 인장 모두를 한번에 삼켰으니, 그럴 만하고.”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 정도로 푹 자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룬은 마음 한구석에서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다.
“그러게. 흑미가 깼는데 모를 정도로 잘 잤을 줄은 몰랐지만.”
“대신, 크리스티나 님께서 흑미와 지내주셨지.”
흑미에게 굳이 묻지 않은 일이다 보니, 룬 역시 몰랐던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드래곤 족 특성상 성장을 위한 수면기가 필요할 뿐.
흑미는 룬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긴 해도 꼭 수면기를 가져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듀라한 녀석도 비슷했겠군.’
워낙 우직한 녀석이라 말이 없어서 그렇지, 룬이 잠들어 있는 동안 듀라한도 그를 지키고 있었을 터.
어린 그가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건 여럿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기억해 둬야겠어.’
머리 한쪽에 그 생각을 넣어두고, 룬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