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 즈음 형이 흑미랑도 본 거고?”
“그래. 내 몸도 거동하기 괜찮아졌고, 흑미도 드워프들을 보고 싶어했기에 불의 레어에 초대했다.”
드워프들과 헤어질 때를 생각하면 기억에 남을 만도 했다.
‘하긴, 내가 살던 곳에서 어지간한 사당패와 가희들도 받지 못한 배웅을 받았으니.’
다행히 드워프들도 백 년 이상 사는 자들.
젊었을 때, 혹은 어릴 때 흑미를 봤던 드워프들이 이젠 원숙한 어른이 되어 반겨주었다고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흑미 신났었겠네.”
“그래. 나는 옛날 생각 난다며 우는 놈들 때문에 어이가 없긴 했지만.”
페르디키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지만,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과거 젊은 시절의 기억이 눈 앞에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찡하긴 했겠지.’
오래 살아보니 룬 역시 그런 경험이 있긴 했다.
그렇다고 눈물까지 흘린 적은 없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흑미의 방문은 그야말로 광기였다. 흑미 열풍을 불러일으켰지. 정등으로 단체로 모여 밤에 글자를 만들지를 않나.”
“뭔가 굉장하네.”
“굉장해? 내 생전 그런 기괴한 모습은 처음 봤다.”
갑자기, 페르디키온이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머리에 여우귀를 만들어 단 건장한 드워프 놈들이 성 앞 대련장에 모여 정등으로 그…… 따위 단어를 만들었다.”
무슨 단어?
룬이 되물으려는데, 페르디키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했다.
“사랑해. 라는 말이 들어가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어.”
갑자기 별로 알고 싶지 않아진 룬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말을 잘라내긴 했지만, 룬의 표정을 잠시 살핀 페르디키온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흑미에게 나쁜 일은 없었다. 환대와 선물도 꽤 많이 받았고.
정말 궁금하지 않아 보이는 룬의 얼굴에 안도했는지, 페르디키온도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런데 이걸 본 제드 녀석이 흑미와 대화를 좀 하더니, 유난히 여성 드워프를 챙기기 시작했다.”
좀 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딱딱한 얼굴이 된 페르디키온이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젊은 여성 드워프들을 모으기 시작했지. 나는 그 뒤로 제드 녀석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하필이면 젊은 여성 드워프만 모았다는 게 묘하게 걸리긴 하네.”
룬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위 아래로 한 차례 단호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렇다. 그들이라고 일을 못하는 건 아니긴 하다만, 뭔가 있는 건 확실했지.”
아마도 그건 페르디키온의 감일 터.
‘흑미를 보며 비상식적으로 열광하는 남성 드워프들을 관찰하더니, 젊은 여성 드워프를 모았다?’
이야기만으로는 룬 역시 제드의 생각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물어본 적은 있어?”
“물론이다. 듣자 하니, 제 수행원이자 조력자이자 훌륭한 일꾼들이라며 여성 드워프들을 인간계에 늘 데리고 다닌다더군.”
이렇게 보면 수상쩍은 느낌이 들 만도 했다.
대장장이 일은 여성 드워프보다 남성 드워프가 훨씬 많이 진출한 직업.
여성 드워프 중에도 훌륭한 대장장이가 존재했지만, 기본적으로 남성 드워프들이 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데, 혼성도 아니고 젊은 여성 드워프만의 일이라니.
이어진 페르디키온의 말은 더 희한했다.
“알아보니, 노래 실력이 출중한 드워프, 요리나 잡화. 바느질 다루는 실력이 좋은 드워프들이더군. 근육을 풀거나 삔 곳을 고치는 드워프도 있었고.”
“?”
특기가 있기는 한데.
노래에, 요리, 바느질?
근육을 풀거나 삔 곳을 만지는 드워프는 그나마 이해가 되었다.
거친 노동 속에서 육체에 쌓인 피로를 풀고, 일하다 보면 신체가 다치거나 삐는 경우 역시 있으니.
잠깐 고민해보던 룬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거라면 이해는 간다. 안 그래도 제드는 인간계에 드워프들의 무덤까지 만들었으니.’
생각을 입에 올리려던 룬은, 페르디키온이 묘하게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걸 느꼈다.
‘그런데 저 녀석 표정이 왜 저러지. 뭔 생각을 하길래.’
룬의 생각이 맞다면, 저런 표정이 나올 리가 없었다.
혹시 룬이 듣지 못한 뭔가를 제드에게 들어보기라도 한 건가?
하긴, 페르디키온은 제드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의문 탓에 룬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살짝 기울었다.
“형, 제드한테 물어봤어? 여성 드워프들을 데리고 뭘 하냐고.”
붉은 머리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물어는 봤다만, 그 놈이 음흉한 웃음만 지으며 비밀이라고만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룬 역시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고 웨폰을 성공 할 때도 그런 식이었지.’
룬은 제드의 유언장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결과로 보여드리겠다며, 바람을 잔뜩 넣어놓더니 죽어있어서 얼마나 황당하고 놀랐던가.
“그래도…… 하필 여성 드워프인 점은 너무 독특하긴 하잖아. 나중에라도 물어볼 수 있지 않았어?”
“내가 안 물어봤을 거라 생각하나?”
페르디키온은 다시 복장 터진다는 듯 말을 꽉꽉 씹어냈다.
“어쩌다 한번이 아닌, 여러 번 여성 드워프들을 데려가 비밀리에 뭔가 하는 듯했다. 그래서 한 번은 작정하고 물어보려는데.”
“보려는데?”
“그걸 따지기 전에 녀석이 죽는 바람에.”
“…….”
페르디키온의 눈은 딱 그랬다.
죽은 자에게 뭘 어떻게 묻냐.
그제야 룬도 페르디키온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 뒤에 에고웨폰으로 되살아나긴 했지만, 죽었다가 영혼만 살아 나온 놈에게 무어라 하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꽤 지나기도 했을 테고.’
그 뒤로, 몸이 없어 정신이 둔해지고, 때론 망각이 느껴진다 말하던 제드.
다행히 엘프 왕국에서의 원정 덕에 몸을 찾긴 했으나, 이는 최근 일이었다.
“형 상황은 알겠어. 그럼 지금이라도 물으러 가는 게 어때?”
“좋다.”
마침 아멜리아랑 백야, 흑미까지 자리에 없으므로, 사정을 아는 둘이 찾아가기 딱 좋은 때였다.
찬미하라!
그렇게 찾아간 제드의 대장간.
듀라한은 제드의 일을 돕고 있었는지 한쪽 팔을 기이하게 꺾어 올리고 사선 위를 보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 두 분이서 여긴 웬일이십니까요?”
목탄으로 음영을 만들며 그리는 모습이 제법 틀을 잡아가던 차에, 제드는 종이를 책상에 두고 마중을 나왔다.
절그럭.
듀라한도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인사를 했다.
룬은 듀라한에게 굳이 자세를 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룬의 시선이 제드를 향했다.
“형한테 들었는데, 여성 드워프들을 모아 뭔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며?”
“일을요?”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참고로, 네가 생각하는 게 뭔지는 대충 알 거 같았거든. 그에 대해 의논도 할 겸 왔어.”
그 말에 제드가 놀란 눈을 했다.
“정말입니까? 그걸 알아주셨다고요?!”
제드는 그야말로 감격한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었지만, 룬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드래곤 족이 생각하기엔 어려운 일이라선가. 그럴만 하지. 아마도 제드는.’
룬은 나름대로의 결론을 혼자 되새겼다.
‘대장장이 진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 드워프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줄 수 있었겠지.’
일이든, 여가생활이든.
대륙은 넓고, 인간들이 개발해 둔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다.
그러니 꼭 대장장이가 아니어도 노래든 바느질이든, 특기를 쓸 수 있을 터.
‘안 그래도, 대륙으로 나와 시야가 넓어졌을 테니.’
꽤 좋은 의도였으므로, 그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나 오해 살 짓을 했다 해서 제드를 꾸짖을 생각은 없었다.
룬은 팔짱을 끼고 재차 입을 열었다.
“여성 드워프들이 새로운 터에 자리 잡도록 해 주려는 거였잖아. 맞지?”
“! 룬 니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제드의 모습을 본 룬은 살짝 긴장을 했다.
다행히, 제드는 두 손을 꼭 모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드워프 마을은 따지면 하나의 촌락.
생계 활동이 자급자족인데다, 생산과 분배는 마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 말은, 전혀 다른 문물을 교류하는 도시나 국가보다 훨씬 소규모로 운영되는 집단이라는 의미도 되었다.
‘대륙을 모르기 전에는 그렇게 해도 괜찮았겠지. 돈보다 금속이나 요리, 잡화로 거래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물론 이는 마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괜히 엽전이 통용되었겠는가?
국가에서 인정하고 상호 가치를 모두 인정하는 화폐가 필요한 이유.
가볍고, 거래하기 좋은 다른 수단이 필요하니까.
그를 떠올리는 건 룬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룬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보였다.
“뭐…… 대충 짐작했지. 이래뵈도, 너랑 다닌 시간이 있잖아?”
이 정도 말하면, 눈치채리라 여겼다.
바로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던 ‘사막의 암시장’에 대한 언급이라는 걸.
‘제드는 드워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부상을 하는 놈이었으니, 공용 화폐의 필요성은 진작 알았겠지.’
보부상.
여기서 쓰이는 말은 무역상인.
사실 그냥 무역상인도 아닌, 밀수업자에 가까웠지만.
중요한 건 이거였다.
‘녀석은 유일하게 드워프제 무기를 팔아 다른 재화로 ‘환전’을 한 뒤 물건을 샀던 경험이 있었지.’
룬은 남모르게 페르디키온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저 녀석이야 이걸 모르니 오해를 했던 모양이지만……. 지금도 영 짐작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고.’
‘사막의 암시장’에 대해서는 룬 역시 함구해주기로 한 일.
룬은 파시야스와 드워프들에게 알려졌다간 큰일 난다며 목을 긋는 시늉을 하던 제드를 떠올려 보았다.
한편 룬이 보내는 시선을 받곤 잠시 말이 없던 제드.
그는 머릿속에 전구가 켜진 얼굴로 눈과 입을 동그랗게 떴다.
“오! 이런, 들켜버린 이상 어쩔 수 없이 말씀 드려야 겠군요. 휴, 이 제드의 천재성에 반해버리시겠지만.”
“……?”
‘그야, 머리를 잘 썼다는 건 인정하지만…… 저렇게까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제드의 행동을 생각하면, 룬에게 은근한 눈짓을 보내거나 혹시 페르디키온에게 말한 건 아닐까 눈치를 살핀다든가.
그런 반응이 나와야 했다.
‘사막의 암시장은 대대로 내려져 온 비밀 아니었냐고.’
룬은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말했다.
“뭔 소리야. 정신 차려.”
하지만 룬의 노력에도 제드의 입은 멈출 수 없었다.
후후, 하고 웃던 제드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일생일대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죠. 남자라면 누구나 채워야 할 그것! ”
두둥!
난쟁이 인형 제드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텅 쳐냈다.
“바로 좋은 짝을 맺는 것 아니겠습니까!”
“…….”
“……?”
이게 아닌데.
룬과 페르디키온 모두 침묵한 가운데, 제드는 흥에 겨워 떠들기 시작했다.
“크으, 역시 룬 님. 드워프들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아주셨을 줄은! 역시 룬 님도 남자였군요. 하긴 첫사랑에 대한 상담도 했던 이 제드 아닙니까?”
“……그거 아니라고 했다.”
이 말만 몇 번을 한 건지 이젠 세기도 힘들었다.
기가 차서 보고 있자니, 제드가 히죽 웃었다.
“아 물론, 이 제드는 다 이해합니다요. 암요. 그러니 인간대륙에 출장 나온 녀석들의 시린 옆구리를 위해 힘 쓴 게 아니겠습니까?”
할 말을 읽은 룬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페르디키온이 제 의문을 던졌다.
“그럼 내겐 그걸 왜 비밀로 한 것이냐?”
“어휴우. 적어도 이 제드 주선으로 결혼 1호는 나와야 결과를 좀 냈다 할 수 있잖아요? 그 전에 설레발치면서 이래저래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요?”
단번에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번에는 룬이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인간계에 진출한 개혁파 드워프들의 장가를 보내기 위해 니가 뚜쟁이…… 아니, 중매쟁이를 했다?”
“맞습니다! 역시 똑똑하시군요!”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