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를 올린 제드를 보며 할 말을 잃은 룬.
그리고, 제드가 본격적으로 입에 침을 발랐다.
“타지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건 좋았죠. 한데, 가서 살기 좋게만 만들면 뭐 합니까?”
주먹을 꽉 쥔 제드가 열변을 토했다.
“가족도 만들고 싶고, 토끼 같은 마누라와 여우 같은 자식들도 좀 두고 살아야 드워프다운 삶이죠!”
페르디키온이 저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토끼 같은… 뭐?”
룬 역시 뭔가 바뀐 것 같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제드의 말이 이어졌다.
“엇험! 민망하지만, 제가 죽고 나서 묻힌 자리를 보셨을 겝니다요. 드워프들이 죽고 나서도 편안히 묻힐 자리를 만든 건, 그저 저 혼자만의 힘과 재화를 쓴 게 아니었거든요.”
“그건 그렇겠지.”
룬이 대꾸해 주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희 드워프들, 인간세상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다음 목표는 무어다?”
짝!
손뼉을 친 제드가 힘차게 외쳤다.
“바로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 되는 것이죠!”
그러더니 누가 듣지도 않은데, 제드가 귓속말을 하듯 한 손을 입가에 세워 올리고 소곤거렸다.
“안 그래도 애들이 좀 쓸쓸해 했거든요. 가을 겨울만 되면 아주 우울해져서는. 봄 되면 봄 됐다고 꽃잎이나 뜯고. 뭐 저도……그렇고.”
갑자기 제드가 눈가를 훔쳤다.
룬의 시선이 아련하게 흔들렸다.
“…….”
최초 진출한 개혁파 드워프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 드워프들.
고향을 등지고 나오는 건 나름대로 각오한 일이었다 하나, 혼자 쓸쓸히 늙어 죽어가리라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객지에 나가 고생고생해서 터를 일군 그들에게, 제드의 조치는 제법 적절했다는 건 인정할 만했다.
“아! 꼭 결과를 내고 말하려던 것만은 아닙니다. 페르디키온 님, 저희 드워프들을 위해 좀 무리하셨다고 들었거든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제드가 페르디키온을 향해 말했다.
“그 이상 무리하시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감당해 본 것도 있습니다요. 드워프 주제에 쓸데없는 짓 한다고 건방지게 여길 수도 있으시겠지만.”
그 말을 들은 룬이 페르디키온의 안색을 살폈다.
역시나.
예상치 못한 배려에 화룡족 소년이 꿀 먹은 사람처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었다.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건 좀 감동받을 만하지.’
제드의 말은 결국, 여성 드워프 무리를 이주시키는 과정 중에 문제가 생겨도 어느 정도 책임을 나눠지려 했다는 말.
모든 걸 페르디키온이 해결할 필요 없도록 한 조치라는 소리였다.
룬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건 날 믿고 한 거잖아.”
제드가 부정하지 않고 손을 샤삭 비볐다.
“으헤헷. 역시 눈치가 빠르시다니까요, 룬 님은.”
약삭빠른 녀석답게, 제드는 룬이 말하지 않아도 허락할 만한 부분을 잘도 이용했다.
얄미운 구석이 있긴 했지만, 나름대로 이해한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좀 다른 생각을 했었지만.”
“다른 생각이요?”
제드의 의문에 룬이 답했다.
“넌 대륙에 나가봤으니 여성 드워프들의 손이 필요한 일도 봤을 거 아니야. 당연히 그걸 써 먹을거라 생각했거든.”
“? 어라?”
제드가 눈을 끔뻑이더니 호오오오. 하고 빛을 담았다.
“그 생각도 했었습니다!”
‘역시 했었냐.’
룬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아리따우신 여성 드워프들을 모셔 오면서 내건 공약이었죠!”
그러면서, 제드는 제 이마를 손으로 탁 쳤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흑미 님이 드워프 마을에 잠시 오셨을 때 혼자 벌어들인 드워프 재화가 얼만지 혹시, 아십니까?”
히죽.
제드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히힉 거리는 얼굴을 했다.
룬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상당하긴 했겠지.”
“맞습니다, 맞고요!”
태연하게 답한 룬에게 박수까지 쳐 보인 제드가 이어 말했다.
“그만한 광기와 열정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요?”
푸슉!
콧김이 뿜어져나온 제드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했다.
“이용해야죠! 그 훌륭한 에너지! 파워! 힘! 그야말로 본초적인 열광!”
콧대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다.
뭔가 받기라도 할 듯 두 손을 들어 보인 제드야말로 광적인 그 무언가로 보였다.
보고 있던 룬은 봐선 안 될 걸 본 기분이 들었다.
‘이 새끼 진짜, 가끔 보면 좀 그래.’
이용할 건 다 이용하겠다는 저 마인드.
돈에 미친, 그야말로 탐욕의 화신다운 얼굴.
제드가 눈을 데로록 굴렸다.
“결혼해서 정착하고 나면 여성분들 역시 훌륭한 일꾼. 그리고 아름다움을 갖춘 완벽한 드워프! 찬미하라, 드워프들의 매력을!”
챠라랑!
쓸데없이 마석가루같은 게 날렸다.
룬은 흐린 눈으로 그를 보며 생각했다.
‘저 손빠른 녀석이 재료로 쓸 마석 가루는 언제 손에 쥐었담.’
그 뒤로 제드는 드워프들이 세계 무대에 활약할 수가지 계획이 있다며, 드릉드릉 긴 발표의 시동을 걸었으나.
“저녁 준비를 내가 해야해서 그런데, 나머지는 밥 먹고 하자.”
라는 룬의 말에, 에잉 하고 입맛을 다시며 열이 식었다.
“아유. 입이 근질거리네요. 하지만 왕성 구경도 식후경인 법이긴 하죠.”
페르디키온은 룬에게 ‘잘했다.’며 눈짓을 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술상이요?
“그럼 형, 저녁 시간에 애들이랑 응접실에 와주라. 제드 너도.”
“알겠다.”
룬의 말에 맥없이 있던 제드가 다시 어깨를 폈다.
“예입!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제드와 단둘이 요리했다간 요리하는 시간 내내 그의 속사포 수다를 들어야 할 게 뻔했다.
“됐어. 혼자 하는 게 편해. 그림 마저 그리고 와.”
“예이!”
철그럭.
이제까지의 모든 광경을 보며 미동하지 않던 듀라한은, 조각상처럼 굳었던 고개를 다시 숙여왔다.
인사를 나눈 룬은 즉시 요리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생각해 둔 메뉴가 간단하긴 한데, 시간이 걸린단 말이지.’
룬은 점심으로 먹은 메뉴를 떠올렸다.
홍차와 쿠키. 핑거 푸드에 어울리는 둥글고 작은 과일들.
생크림 딸기 샌드위치와 샐러드, 혹은 브라우니 같은 케이크류.
하나같이 맛이 좋았지만, 좀 더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었다.
‘손은 좀 가지만, 역시 이걸로 가자.’
한번 마음을 정하니 행동은 일사천리였다.
‘오늘 요리는 본체가 더 편하겠군.’
황금 팔찌를 빼고 해츨링의 모습으로 돌아간 룬이 목을 가볍게 돌렸다.
시작해볼까.
뒤뚱거렸지만 거침없는 걸음이 바닷물이 든 수조로 향했다.
그리고 한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게를 띄워 올렸다.
촤악!
룬은 수족관에서 단번에 놈을 꺼냈다.
‘실하네.’
오른쪽 앞 발로 잡자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커다란 집게발.
버르적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이 녀석은, 온몸이 거칠고 딱딱한 몬스터 자이언트 크랩킹이었다.
그 이름답게 덩치가 무척 컸지만, 지금은 몸통을 해츨링에게 잡힌 채 굴욕적으로 몸부림만 칠 뿐이다.
카가각! 카가가각!
놈은 곧 죽기 전 최후의 승부라도 벌이겠다는 듯 룬의 비늘을 딱딱 소리 나게 때리고 긁어대었다.
‘그렇게 공격해봐야, 간지럽기만 하지.’
아무리 어리다 해도 드래곤의 피부.
강력한 데다 마력까지 감돌아 어지간한 공격에 상처 하나 날 리 없었다.
룬의 눈빛이 냉혹하게 변했다.
“뀨뀨.”
[잘 가라.]
까만 해츨링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크랩킹을 도마 위에 휙 내리쳤다.
쾅!
껍질이 부서지라 내려친 덕분에, 단번에 기절해 버린 자이언트 크랩킹.
녀석은 게거품을 물며 혼절해버렸다.
털썩!
힘없이 늘어진 게의 다리가 유난히 처연했다.
“뀨뀨.”
확실히 기절한 걸 확인한 룬이 앞발을 가볍게 문질렀다.
[좋아. 이제 손질하면 되겠군.]
뭐든 손맛과 품이 들면 더 맛있어지는 법.
룬은 직접 게를 쪄내고 바다향이 나는 게살을 손수 발라냈다.
‘아멜리아가 이런 건 먹을 수 있다 해서 다행이지.’
이 사실을 안 건 수업 때의 일로, 인간의 식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수업했을 때 알게 된 것이다.
“뀨.”
[인간들은 바다 생물들을 요리 해 먹는다는 이야기에 전혀 거부감 없어 한 게 의외였어.]
생각해보면 드래곤이야말로 최상위 포식자.
어릴 때 페르디키온도 고기를 즐겼다 하지 않은가.
다만, 살아있는 모습이 강하게 상상되는 건 싫다는 게 아멜리아의 말이었다.
‘이걸 그대로 먹어도 맛있겠지만.’
룬은 익힌 게살을 잘 발라내어 볼에 담아둔 뒤, 미리 준비한 잘게 잘린 양파와 버터를 팬에 넣어 휘휘 저었다.
치익.
고체 버터 녹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양파와 섞이며 스튜 같은 식감으로 변했다.
‘우유.’
척.
이동마법에 무척 능숙해진 룬의 앞발 위에 우유 통이 올라왔다.
꼴꼴.
자글자글.
투명한 양파와 노란 버터에 부드럽게 섞이는 우유색 띠.
고소한 향이 안을 채웠다.
“뀨우.”
‘쩝.’
저도 모르게 혀로 주둥이를 할짝인 룬.
팬 안에 잘 섞인 것들은 익힌 게살이 담긴 볼에 잘 섞어 시원한 곳에 슥 밀어 넣었다.
이어 습식 빵가루를 갈아내고, 삶은 감자와 계란으로 샐러드까지.
조물조물 앞발을 움직이자 금세 치즈가 들어간 감자 크로켓, 계란 크로켓이 만들어졌다.
“뀨우.”
[혹시 게살을 안 먹을 수도 있으니까.]
룬은 튀겨낸 게살크림 크로켓에 당근으로 집게다리를 만들어 붙였다.
[이러면 골라 먹겠지.]
치즈가 들어간 감자 크로켓은 둥글게.
계란 크로켓은 위 아래로 긴 타원형으로 만들어 차이를 둔 룬은 거기에 스파게티를 추가해 만들었다.
“뀨.”
완성된 요리를 확인한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늘버터 바게트 슬라이스, 토마토 스파게티.
모닝빵에 깊숙하게 칼집을 내어 계란, 감자샐러드 슥슥 밀어넣고 나니, 소풍이라도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크리스티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