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의 질문에 제드가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왼쪽 위로 굴렸다.
“제가 알기로, 성공한 건 마론 뿐입니다요. 그나마도 마론은 원래 썸 타는 드워프가 있었던지라 쉬웠죠.”
이어진 제드의 말을 요약하면 이랬다.
우선, 최초 개혁파 드워프들이 터를 잡은 뒤 다른 드워프들도 조금씩 더 대륙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향수병에 걸려 돌아갔고, 머문 드워프들은 여성 드워프가 없어 홀아비 신세가 된 이들이 속출.
결국 결혼을 위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드워프 마을로 돌아가는 경우도 생겼다.
“어디 그뿐인가요. 부모 드워프들이 저한테 아들 내놓으라고 대장간을 뒤집어 놓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습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제드의 말에 룬이 호응해주었다.
“고생했겠네. 하긴, 젊은 드워프들이 모두 부모 허락을 맡고 오기 쉽진 않았겠지.”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끼었다.
“그런 사정이었나. 미처 생각지 못했군.”
“저도 일 벌려보니 알게 된 건데요. 뭐, 이 정도 역경이야 가뿐히 해쳐나갈 수 있어야죠!”
한쪽 팔을 꺾어 올린 제드가 다른 손으로 꺾어 올린 팔뚝을 두드려 보였다.
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게다가 여성 드워프들만 정착시켜주면 상당수 해결될 문제기도 하고.”
“에헴. 맞습니다요! 가업을 물려주는 게 저희 드워프들 문화인 이상, 가족. 가문만 잘 꾸려 대를 이어준다면 이런 소란은 금방 줄어들 테죠!”
의욕적인 대답이었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룬이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형, 이거 우리가 도와주자.”
“그게 무슨 소리냐.”
씨익.
룬이 미소를 띠곤 입을 열었다.
“형, 날 믿어봐. 이거 잘 해두면 과업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미간을 찌푸린 페르디키온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이유는?”
간결한 물음에 룬이 생각했던 답변을 내놓았다.
“형은 ‘약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요구할 수 있는 세상’이 과업의 큰 틀이라 했지?”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서, 내가 받게 될 과업은 ‘약자’들이 존재하는 ‘인간’과 관련된 걸 받게 될 거라 예상하는 것이지.”
룬은 속으로 미소를 띠었다.
“과업의 특징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럼, 형 레어에서 진출한 드워프들이 인간 세상에서 힘을 키워둔다면?”
“!”
과업 수행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게 목적인 반년.
이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쓸 방법이라면, 페르디키온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과연, 그런 거였나.”
터억.
화룡족 소년의 붉은 눈이 번뜩이더니 룬의 어깨를 잡았다.
“훌륭하다 룬. 역시 내 아우다워!”
“별말씀을.”
드래곤의 과업 방식을 잘 모르는 제드가 슥 손을 들며 말했다.
“오잉? 여러분, 이 제드가 이해하기 어려운 뭔가가 오가셨는데요. 저기요?”
제드가 장난스러운 손동작으로 허공에 노크를 두드리는데.
번뜩.
페르디키온의 눈이 그런 제드를 향했다.
“오, 오……오우.”
제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페르디키온의 붉은 눈이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 같았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환기시킨 건 룬이었다.
“형, 말 해줘도 되지?”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시선을 잠시 두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페르디키온.
무언의 허락을 받은 룬이 입을 열었다.
“들어봐. 이해하려면 레드 드래곤의 과업 방식에 대해 알아야 해.”
“헙.”
생각지도 못하게 드래곤의 성체 과업을 듣게 된 제드가 몸을 굳혔다.
룬이 말을 이었다.
“과업은 주로 해당 드래곤의 개성이나 특징, 가치관. 간절히 기원하는 것 등이 반영된다고 해.”
이 내용은 레드 드래곤 족의 1급 기밀 정보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제드가 룬의 권속이 아니었다면, 평생 알 수 없는 이야기란 소리기도 했다.
“그리고 형은 ‘약자라도 옳은 말. 옳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겠다.’라고 이미 다짐했어. 그러니 과업도 이와 관련된 게 나올 확률이 아주 높아.”
“호오오오. 흥미롭습니다요. 그럼 그 과업을 주는 건 대체?”
“불의 인장의 원천. ‘최초의 불꽃’이라고 알려져 있어.”
룬 역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크리스티나에게서 전승된 지식으로도, 이 내용은 제법 상위 랭크일 정도.
하긴, 드래곤이 성체가 되는 방법이 쉽게 알려졌다간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드래곤은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존재임과 동시에, 강력한 힘을 지닌 탐욕의 대상이기도 하니까.
룬이 페르디키온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이번 과업, 형 아버지께서 간섭하신다며?”
룬의 질문에 페르디키온이 긍정했다.
“그래. 아버지가 명하신 과업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이건 아버지와의 ‘약속’이니, 과업을 받을 때 추가로 반영되겠지.”
페르디키온은 아무렇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그간 파시야스에 대해 느낀 룬은 이를 악재로 보았다.
‘타자를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이기적인 자다. 바른 말을 하는 자를 용납할 리 없지.’
그런 자가 원할 과업.
예를 들어 페르디키온에게 어울리는 과업이 정의로운 세상 만들기, 같은 거라면.
파시야스의 약속 탓에 정의를 누구도 넘보지 못할 압도적인 힘을 통해 취하라는 업이 될 수도 있었다.
“제드. 너도 알잖아. 파시야스의 방식이 어떤지.”
제드도 제법 진지한 눈이 되었다.
“그렇습죠. 생각해 보면 룬 님과 페르디키온 님의 치세를 통해, 드워프들은 많은 변화를 이뤘으니 말입니다요.”
파시야스에게 천대받고 수탈당했던 지난날.
그들에겐 자유가 없었고, 무기를 만드는 도구에 불과했다.
굴욕적일 만치 절대적인 복종을 보이지 못하면 모두가 목숨을 잃던.
죽음이 그리도 흔하던 시기였다.
새삼 깨달은 듯, 제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룬 님과 페르디키온 님께서 존재하지 않던 지옥 같은 시절이…… 고작 몇백 년 전이었죠.”
제드의 변화를 확인한 룬이 말을 이었다.
“다시 그렇게 돌아갈 수 없잖아. 안 그래?”
“물론입니다!”
격양된 어조로 제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야말로 치를 떠는 얼굴이었다.
‘좋아.’
룬은 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 위기를 피하지 못하면, 너희 드워프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대륙 진출은커녕, 장인이라는 말은 쓰이지도 못할 테지.”
“!”
입이 떡 벌어진 제드의 얼굴은 인형임에도 공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 그런……!”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제드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태연히 말했다.
“안심해라. 내가 질 리가 없으니까.”
“아이고, 아이고! 그게 말로만 그러신다고 다 되는 줄 아십니까요!?”
꿈틀.
미간을 구긴 페르디키온이 손을 꺾었다.
“룬, 이 자식이 감히 불의 주인을 무시하는군. 적절한 교육을 해도 되겠나?”
“안 돼. 저 몸 다시 만들기 힘들어.”
“쳇.”
룬의 단호한 말에 페르디키온이 쳇,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페르디키온이 참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제드는 꿀 먹은 놈처럼 입을 합! 다물고 얌전히 있어야만 했으니까.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벌써 드래곤 피어(Fear)를 쓰고, 잘 한다.’
다행히 룬이 다음 말을 잇자, 살기가 옅어졌다.
“아무튼, 형의 과업을 위해서라도 형을 위해 움직여 줄 이들이 필요할 거야.”
페르디키온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난 온전히 내 힘으로 과업을 해낼 셈이었다만.”
“응, 형이라면 분명 그러리라고 파시야스도 생각하고 있을걸.”
룬이 여유있게 말을 덧붙였다.
“한낱 드워프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솔직히 형도 아직 잘 모르겠지?”
“…….”
뭔가 잘 모르겠다는 말이 다소 싫었던지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움찔했다.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지만.
“하면, 날 위해 움직일 이들이, 설마 드워프들인 거냐?”
“응. 형, 생각해 봐.”
씨익.
어리고 순수한 해츨링이 짓기엔 무척이나, 영악한 웃음이었다.
“힘이란 게 개인의 무력만을 뜻한다고 생각해?”
가벼운 선문답.
그를 들은 페르디키온이 대답했다.
“한때 그렇게 여겼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말을 주저하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이 말했다.
“형이 처음으로 내게 수업을 가르쳐준 걸 기억해. 남들 위에 설 자는 강한 권력과 힘. 지배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던 거. 그건 형의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거겠지.”
룬의 얼굴에 어린 웃음이 짙어졌다.
“형, 드워프들을 대륙에 진출시키면 우리가 그 점을 파고들 수 있을 거야.”
룬의 제안에 페르디키온의 눈이 커졌고, 제드는 흥미로운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룬은 생각했다.
‘잘만 되면, 드워프들이 페르디키온의 손과 발이 되어주겠지. 그리고 나에게도.’
본래 불의 권속에 속한 드워프들.
하지만,룬을 통해 대륙에 퍼진 이상 그들은 룬의 힘이 되어줄 녀석들이기도 했다.
부탁이 있는데
“형 아버지라면 대충 예상이 가.”
룬이 입을 열었다.
“어떤 과업을 목표로 하든 폭력을 통해, 혹은 형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조건을 달 수도 있고.”
“그러니 네 말은, 내 힘이 될 다수의 녀석들을 미리 대륙에 진출시키자는 게 아니냐.”
페르디키온의 호응에 룬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응. 그들 역시, 형의 ‘힘’이라 할 수 있으니까.”
페르디키온이 이체 섞인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없던 화룡족 소년이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움직였다.
“나보다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허를 찔러보자는 말이 뭔진 알겠군.”
적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다는 듯,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룬은 페르디키온을 보며 생각했다.
‘너는 인간 하나에게 목숨까지 위협당해 본 적은 없으니, 잘 모르겠지. 하찮다고 생각한 존재가 생각지도 못한 위협일 수 있다는 걸.’
몸소 겪은 교훈을 이렇게 이용해 먹게 되다니.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략,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제드가 호오우,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이거, 드워프들이 은혜를 갚을 기회란 말이죠? 이 제드의 제안이 아주 쓸만하게 된 셈이고요.”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네.”
룬이 나온 이야기를 하나씩 꼽아주었다.
“제드의 목표는, 대륙에 진출한 드워프들이 가정을 꾸리며 완전히 정착해 살도록 해주는 거지. 그걸 위해 여성 드워프들이 인간계에 정착할 수 있게 할 거고.”
“옙! 맞습니다요!”
룬 역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주었다.
“형의 목표는, 불의 일족으로서 다스렸던 드워프들이 대륙에서 안정적인 힘을 키우고, 무리를 짓게 해서 형의 과업에 도움을 받는 거.”
페르디키온이 수긍하는 눈치로 말을 받았다.
“그렇다. 아버지가 생각지 못한 변수를 준비해 두어 나쁠 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