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242)

파시야스가 이 제안을 들었다 한들 하찮고, 쓸모없는 개미 떼를 모아 어디에 쓰려는 거냐며 비소를 던졌을 터.

그를 이용하자는 생각은 페르디키온에게도 흥미로울법 했다.

‘개미 떼한테 물려서 고생해봐야 무서운 걸 알지.’

룬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드가 물어왔다.

“하면 룬 님은 목적이 뭡니까요?”

“나?”

룬은 세상 순수하게 웃어 보였다.

“난 그냥, 형이랑 제드를 도울 수 있으면 돼.”

“!”

“크흡!”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 어린 소년이 평소 잘 짓지 않는 순한 미소를 짓다니!

기특함과 순수함에 페르디키온과 제드가 심장에 격통을 느끼는 동안, 룬의 속에서는 음험한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

‘이걸 빌미로 이쪽 세상 구경을 좀 해보겠군. 나중에 내 힘이 될 드워프들도 미리 정착시켜두고.’

일족의 장로 후보로서, 불의 인장을 받은 자로서.

페르디키온의 과업을 도우러 간다는 건 외출하기 좋은 이유가 되어줄 터.

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페르디키온이 말을 던져왔다.

“그렇다면 룬. 너도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인간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지. 과연 크리스티나 님께서 이를 허락하실지가 의문이로군.”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실걸. 형이랑 약속한 일인걸.”

얼굴만 보면 형아,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은 아주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페르디키온은 다소 찜찜해하는 표정이었다.

“룬, 내가 통행증이 된 기분이다만?”

그야 그렇지.

물론 그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다.

룬은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통행증이라니 무슨 소리야. 소중한 내 형님인걸.”

생각지도 못했다는 눈을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페르디키온이 한 발 물러났다.

“큼. 뭐, 그렇긴 하다만.”

순진한 녀석.

룬은 속으로 생각하며 제드를 향해 손짓했다.

“여성 드워프들이 대륙으로 몇 명이나 갔어?”

“에엥. 사실상 제가 있을 때는 딱 한 명이었죠.”

많진 않으리라는건 알았다.

하지만 이건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룬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 한 명, 마론과 결혼한 드워프뿐이겠네?”

“안타깝지만 그렇습죠.”

그래도 그렇지 아예 옮겨간 여성 드워프가 없다니.

“생각보다 저조하네. 특기나 재능이 있는 이들로 구성해 데려갔었다길래, 어느 정도 정착시킨 줄 알았는데.”

룬의 말에 난쟁이 인형 제드가 면목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일하는 짬짬이 시간 내서 다닌거다 보니 말이죠. 대신 한 번에 여러 여성 드워프들을 데려가보긴 했는데요.”

스스로도 아쉬운 부분이긴 했던지 입맛을 쩝, 하고 다신 제드.

덧붙이는 말에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일단 중간에 제가 죽는 바람에 일이 흐지부지되어 버린 탓이죠…… 마론도 제 후임으로서 일이 벅차 사정은 비슷했을 겁니다요.”

룬은 유언장을 건네주던 드워프, 마론을 떠올렸다.

나이가 제법 들어있었으니, 아무리 힘이 좋은 드워프족이라 해도 젊은 시절만큼의 활동성을 보이진 못했을 터.

‘페르디키온이 수상하게 볼 정도로 많이 데리고 다닌 건, 그나마 활동하기 좋은 시기였기에 가능했다는 거군.’

오갈 기회가 적었기에 최대한 많은 여성 드워프들을 데려가 보려던 것도 한몫했을 터였다.

룬은 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점을 꼽았다.

‘접근성이 높아야겠네.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룬은 그 생각을 아이다운 말로 바꾸어 전했다.

“일단 이동을 편하게 만들어 주면 일이 쉬울 거 같은데. 그치?”

룬의 얼굴이 페르디키온을 향했다.

시선을 부딪친 붉은 머리의 소년이 우려를 표했다.

“말처럼 쉽진 않을 거다. 쓴다면 장거리 이동 마법뿐인데, 그건 나나 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펄쩍 뛸 듯이 만류하며 제드도 말을 덧붙였다.

“아이고, 장거리 이동 마법? 말도 마십쇼. 저희가 마탑 마법사들 도움을 받아서 이동하긴 했는데 이게 보통 어렵고 돈 많이 드는 게 아닙니다요.”

당시 쑥쑥 뽑혀나가던 금액을 떠올린 제드.

일순 난쟁이의 볼이 쑤욱 꺼진 듯 핼쑥해 보였다.

“드워프 다리가 다 후들거릴 정도로 돈이 사라졌지요. 어휴.”

그 말을 들은 룬은 생각했다.

저 정도 큰 손 고객이기에 마탑과 협조도 잘 구해지고, 사이도 좋았던 것이리라고.

‘덕분에 제드 녀석도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긴 했겠지.’

돈을 그렇게나 밝히는 놈이니 그냥 재산을 상납하진 않았을 터였다.

어쨌든, 매번 룬과 페르디키온이 있어야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여러모로 최선의 기책일 순 없으므로.

“그건 내가 해결해볼게.”

룬이 나서자, 제드와 페르디키온의 눈이 모두 룬에게 쏠렸다.

“뭘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의문을 던진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이 씨익 미소를 띠었다.

“내가 마침 얻어둔 게 있거든.”

‘설마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자신 있게 웃어 보인 룬이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였다.

“자, 이거야.”

“?”

“?”

작은 아이 손 위에 다소곳하게 놓인 흑진주.

무척 낯이 익은 구슬이었다.

뭔가 알아챈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네가 가지고 다니던 것 아니냐?”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리고 이걸 쓰려면 크리스티나에게 허락을 받긴 해야 해.”

그건 어렵지 않지.

룬은 속으로 생각하며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뀨악!”

철푸덕!

해츨링의 본 모습인 룬은 온 몸이 빛의 끈으로 말린 채 바닥에 엎어졌다.

꽉.

그 끈의 끄트머리를 잡고있던 크리스티나가 제 팔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푸른 시선의 끝.

손목에 걸린 건 검은 나비 매듭의 마력실.

그를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그닥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냈구나. 구속에 관한 마법은 이쯤이면 되겠어.”

“뀨우우우…….”

크리스티나에게 개인 수련을 받고 혼자 널브러져 있던 룬.

그는 일주일 전의 의기양양했던 모습과 달리, 꼬리 끝까지 추욱 늘어진 모습이었다.

‘쉬울 리가 없지. ‘그’ 크리스티나인데.’

온갖 속박, 잠금 관련 마법들을 익혀야 했던 일주일.

크리스티나의 빛의 끈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도, 최소한 상대할 만한 수준까지는 도달하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룬은 그걸 막 해낸 참이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룬이 확인차 물었다.

“뀨?”

[이제 허락해 주는 거야?]

“그래. 이렇게 잘도 성공했으니.”

크리스티나는 손목의 까만 마력으로 된 끈을 흔들어 보였다.

언 듯 보면 팔찌같이 생겼지만, 엄연히 ‘구속’계열 마법 능력을 넣은 마법.

룬은 무려, 인간형 폴리모프 상태라지만 성체 골드 드래곤에게 구속 마법을 건 참이었다.

물론 이 결과를 얻기까지 많은 고난이 존재했지만.

‘크리스티나와 구속 대결이라니. 상상도 못 했어.’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파훼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묶는 능력을 기른 룬.

처음에는 구석 마법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녀에게 속박 당하곤 해 짜증이 울컥 솟아오르곤 했다.

‘지독한 일주일 이었다. 진짜.’

뀨하아- 하고 숨을 뿜어내자, 크리스티나가 칭찬의 말을 건넸다.

“룬, 너는 재능이 있어서 가르치는 내내 즐거웠단다.”

“뀨욱.”

‘진짜 그 재미뿐?’

어디서 전문적으로 묶기 기술을 배워오기라도 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속박에 대해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어쩐지, 일전에 화가 났을 때 꺼낸 게 빛으로 된 사슬이더라니.

‘크리스티나한텐 함부로 덤비지 말아야지.’

빛의 줄이 사라지고 룬은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 흑진주를 슥 내밀었다.

“뀨!”

[자, 약속대로 이 녀석을 깨워 줘.]

탐탁지 않은 시선이 좀 더 짙어졌다.

“그래. ‘약속’했으니 지키긴 하겠다만. 정말 괜찮겠니?”

이걸 위해 이제껏 줄에 묶여 굴렀던 룬이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뀨우.”

[물론이야.]

어린 해츨링의 곧은 시선을 마주한 크리스티나가 푸른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

이어, 하얀 손을 구슬 위로 뻗은 그녀가 그녀만의 언어를 중얼거렸다.

몇 가지 마력의 구절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마지막 문장은 제법 또렷하게 들려왔다.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힌 빛이여. 그 주인에게 돌아오라.”

파앗!

흑진주에서 아주 가느다란 빛의 바늘이 뽑혀나왔다.

그리고.

[꺄아아악! 아,아?]

깊은 밤의 요정.

어둠 일족의 힘이 존재하는 장소에 길을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여, 물의 던전에서도 그 능력만큼은 쓸만했던.

그러나, 속은 어딘가 뒤틀려있던 은발의 요정이 깨어났다.

‘여전히 엄청 시끄럽네.’

그렇게 생각한 룬은 요정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말을 걸었다.

“뀨뀨.”

[정신이 좀 들어?]

흑진주위 고작 한 뼘 정도 위에 서 있는 요정이 룬,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꺄, 꺄아악! 살려줘!]

따콩!

냉큼 흑진주 안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룬이 구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탓에 요정은 이마를 부딪치며 몸이 뒤로 튕겨졌다.

“뀨뀨우.”

[진정해. 안 잡아먹어.]

그 말에 오들오들 떨던 요정이 둘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그, 그럼……?]

룬은 나름대로 안심시킬 의도로, 아주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눈꼬리를 휘어 웃어 보였다.

“뀨!”

[내가 부탁이 있는데.]

물론, 이는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증스러운 해츨링!’

요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까만 해츨링.

그 뒤에 푸른 안광을 빛내며 오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금발의 드래곤.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지만, 요정족인 그녀가 말실수라도 했다간 그대로 숨질 것만 같았다.

속으로는 온갖 욕지기를 씹어댔지만 차마 뱉어내진 못하고, 요정은 새초롬한 눈빛을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