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일. 뭐, 뭔데?]
분노와 두려움에 떨던 요정이 팔짱을 끼고, 허공에서 동동 발을 굴렀다.
초조해 보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본 룬이 말했다.
“뀨우.”
[네가 필요하거든. 길을 만들어 내야 할 곳이 있어서 말이야.]
요정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내가? 길?]
“뀨.”
[응.]
독기가 담겨있던 얼굴이 놀라움, 그리고 신중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팩, 고개를 돌렸다.
[흐, 흥! 못 믿어. 그 말.]
당차게 고개를 돌렸지만, 룬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그러면서 실눈 뜨고 이쪽 보고 있잖아.’
룬이 파악했을 정도니, 크리스티나도 당연히 알아챘을 터.
푸른 시선을 움직이며 그녀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저렇게 말하는구나, 룬. 어떻게 하고 싶니?”
그 말에 작은 요정은 흠칫하려다가 팔짱을 낀 손에 힘을 꽉 주어 참아냈다.
[나라도, 길. 안돼. 함부로 만드는 거.]
그러면서 반쯤 눈을 뜬 요정이 말을 이었다.
[나 없어. 힘. 주던가?]
지금 가진 힘이 얼마 없어 길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없다는 소리였다.
룬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힘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고 있군.’
물론 힘이 없는 것도 사실일 터였다.
깊은 밤의 요정.
그 이름답게 그녀는 어둠 일족의 힘을 기반으로 생성된 존재니까.
룬이 일족의 힘을 전부 회수 해 갔으니 남은 힘이 거의 없을 터다.
“뀨뀨규.”
[넌 힘을 되찾고 싶겠지?]
슬슬 룬의 낚싯줄이 드리워졌다.
낚시 바늘 끝 미끼는 너무나 달콤했다.
힘이 없어진 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요정에게 이는 더 없이 유혹적이기까지 했다.
[물론이지! 당연히!]
요정은 아예 대놓고 룬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마치, 원래 제가 가져야 할 힘을 빼앗아 간 원흉이라는 듯.
룬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하긴, 어둠 일족의 힘에서 태어나 얼마 살지도 못한 요정이다.
기껏해야 던전, 그리고 해양 몬스터들이나 흡수해 상대하며 살았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룬이 말했다.
“뀨뀨꾸까.”
[힘을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너도 알겠지만, 이제 어둠 일족의 힘은 다 내 거거든.]
그 다음, 룬의 표정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뀨우우우.”
[그 말은 내가 줄 생각이 없으면…… 넌 평생 이 구슬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고.]
[!]
요정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분하지만, 밉보였다간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내적 갈등이 시작된 요정.
그 과정을 보던 룬이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뀨뀨.”
[물론, 나는 네가 힘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의향이 있어. 하나 약속만 하면 말이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요정이 은근하게 관심을 보여왔다.
[뭐야. 그게?]
이미 낚인 고기를 보는 눈이 된 룬은 한결 편안한 눈으로 요정을 바라보았다.
“뀨.”
[나를 돕고, 내 명령을 듣는 거.]
[날 네 마음대로 다루겠단 거야?]
세상에서 가장 못돼먹은 드래곤을 보는 시선으로 바뀐 요정.
룬은 어깨를 으쓱였다.
“뀨욱.”
[그 말이 불편하면,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이해하면 돼.]
[안 해! 싫어!]
피식.
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사실, 이 제안에서 아쉬운 쪽은 룬이 아니었다.
“뀨……뀨우.”
[뭐…… 그럼 다시 구슬에 들어가던가. 그 안이 편했나 본데.]
[아, 안돼!]
화들짝 놀란 요정이 두 손을 내 뻗으며 만류했다.
눈동자까지 떨리며, 요정이 작고 하얀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하지 마. 그것만은.]
“…….”
손바닥을 싹싹 빌기까지 하는 모습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긴, 크리스티나의 마법은 끔찍했을 만하지.’
시간과 공간에 섞이지 못하고, 박제되는 그 기분.
꽤나 무시무시한 경험일 터였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 바늘은 크리스티나의 언령일 테니까.’
정확한 단어는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 상 특성은 대략 짐작이 갔다.
룬은 그 언령이 그녀의 후회, 과거, 추억, 결심.
그 모든 것들이 매듭지어져 이루어진, 슬픈 언령이라 생각했다.
“뀨우.”
[어지간히 무서웠나 보네.]
요정은 크리스티나의 눈치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파르르 떨리는 작은 몸을 제 팔로 안고, 요정이 입을 움직였다.
[싫어. 깨지, 못할 줄 알았어. 영원히.]
요정은 정신체.
만질 수도, 교감할 수도 있지만 사념에 휩쓸려 덧없이 사라지기도 쉬웠다.
그렇기에 요정은 자신만의 본질을 갈고 닦아, 최대한 독립적인 특성을 가지곤 했다.
“뀨우.”
[네가 걱정하는 걸 해결해 준다면 어때?]
요정이 살짝 고개를 들어 보였다.
[해결? 어떻게?]
작은 은빛 머리를 내려다보며 룬이 앞발을 뻗었다.
“뀨우우.”
[네게 요정으로서 새로운 특성을 만들 기회를 줄게.]
물끄러미 루비빛 시선을 보던 요정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불가능. 이미, 가졌어. 난. 어둠, 그와 같아.]
어둠 속에서 태어나, 그 어둠에서 살고, 어둠을 원천으로 움직이는 특성이란 뜻이었다.
룬이 고개를 저었다.
“뀩.”
[그건 애초에 네 어둠이 아니었잖아.]
[…….]
눈을 끔뻑인 요정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크리스티나가 이 요정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랬다.
‘크리스티나는 이 녀석을 ‘기생충’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지.’
룬은 언젠가, 크리스티나와 깊은 밤의 요정에 대해 이야기했던 일을 떠올렸다.
***
“크리스티나, 깊은 밤의 요정은 죽은 거야?”
룬과 함께 검은 방의 유품들을 함께 정리해 주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하진 않았단다. 하지만, 다신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을 거야.”
그 말을 하던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은 상냥한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를 찬기가 느껴졌다.
돌아오는 말이 없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룬과 시선을 마주쳤다.
“룬, 세상에는 함께 해서 좋은 존재만 있는 게 아니란다. 곁에 있기만 해도 네게 해로운 존재도 있게 마련이지.”
금발을 손으로 가볍게 넘기며,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 요정은 그 같은 거란다. 네가 온전히 가져가야 할 힘에서 태어나, 그 힘이 제 것이어야만 하는.”
냉혹한 푸른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잘못 태어난, 무언가라고.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바른 이치로 태어나기만 했어도 그렇진 않았으련만.”
크리스티나는 룬의 보호룡이기에, 더욱 냉정하게 평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친절했던 그녀가 쓰기에는, 무척 냉정한 단어의 나열이 이어졌다.
“다른 힘에 기생해서 태어나, 그 힘을 가지도록 만들어진.
잘못 태어났으며, 잘못되어 살아가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할. 그런 존재이지.”
룬이 가진 힘을 탐내며, 시기하고 질투하도록 태어난 존재.
’분명 그렇게 말했지만.‘
회상을 마친 룬이 눈을 떴다.
그의 앞에 여전히 간절한 얼굴을 한 요정을 보며 룬이 입을 열었다.
“뀨.”
[한 번쯤, 기회를 줄까 싶어서. 물론 대가는 필요하지만.]
진실을 알 기회도.
자신을 바꾸어 볼 기회도 없던, 이 요정에게.
단, 그 기회가 공짜는 아니었다.
“뀨꾸우.”
[넌 운이 좋아. 진짜로.]
’누군가는 그런 기회조차 같지 못하니까.‘
어휴.
속에 담긴 말 대신 까만 해츨링이 포옥,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은발의 요정이 이상한 놈 보듯 룬을 바라보았다.
[뭐야?]
“뀨뀨뀨.”
[아무것도 아니야.]
슬슬 까만 꼬리를 흔들며, 룬이 제안했다.
[너 말이야. 내 어둠을 좀 빌려 줄 테니, 세상에서 써먹을 생각 있어?]
요정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원래 제 것이었던 그 힘을 가질 기회!
빌려준다는 의미를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요정은 그 미끼를 덥썩 입에 물었다.
[당연히!]
“뀨.”
[좋아. 그럼 크리스티나, 준비 해 주라.]
룬의 말을 듣고 크리스티나가 손을 움직였다.
번쩍!
요정과 룬의 옆에 금빛으로 빛나는 양피지가 펼쳐졌다.
순수한 드래곤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계약서였다.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건 드래곤이 공증하는 계약을 형태로 만든 것이란다. 자세한 건 읽어보면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크리스티나가 직접 작성하고 만든 계약서.
룬이 요정을 쓰겠다고 했을 때, 설득 끝에 타협한 내용이었다.
“룬에게 위해를 끼칠 일이 생겼을 시, 네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란 점이지.”
[네, 네에!?]
부드러운 어조로 일러주는 내용이 충격적이었기에, 요정의 몸이 쭈뼛하게 굳어버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고운 목소리로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상세한 조항은 이걸 읽어보렴. 존재 소멸을 건 내용이니 가능한. 꼼꼼하게.”
살랑이며 날아간 계약서를 확인하며 요정은 하나하나 끔찍한 얼굴로 확인했다.
1. 깊은 밤의 요정은 앞으로 룬이 지시하는 일을 가장 최우선으로
수행한다.
2. 룬에게 위해가 갈 일이 생겼을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또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