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물론, 룬 역시 왜 그런지는 이해했다.
작성된 계약 내용을 보고 떠올린 게 이거였으니까.
‘노예계약서와 주종의 계약, 신체포기각서를 합쳤네’
뒤에 몇 가지 조항이 더 있음에도, 불합리함에 화가 난 요정이 냅다 외쳤다.
[이게 뭐야! 안 해, 나!]
손으로 금빛 양피지를 잡아 던져버리려 했지만, 마력으로 이루어진지라 손이 그대로 통과했다.
룬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뀨뀨.”
[나도 확인했는데, 네가 날 배신하지만 않으면 문제되는 조항 없더라고. 그냥 해.]
[이, 이이!]
욕을 하려다가 크리스티나의 서슬 퍼런 눈에 말을 삼킨 요정.
하지만 얼굴만큼은 여전히 딸기처럼 울긋불긋했다.
[준다며. 기회! 제대로!]
빽 소리를 내는 요정에게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회를 준다 했지, 신뢰한다고는 안 했잖아.]
울컥!
요정이 세상 나쁜 놈 보는 얼굴로 룬을 다시 노려보았으나, 타격이 있을 리 없었다.
룬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얼굴로 응수했다.
요정이 길길이 날뛰며 공중을 마구 날아다녔다.
[누가 해! 이따위 거!]
닿을 것도 없는 공중에 발을 구르며 외치는 요정에게 룬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뀨우우.”
[너무 화낼 건 없잖아? 네가 신뢰할 만한 행동을 하면 내가 계약서를 파기해 줄 수도 있는 건데.]
물론, 룬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요정은 그 말에 룬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로?]
“뀨우.”
[진짜로.]
‘즉시 파기해 준다는 소린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룬이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존재했다.
그럼에도, 요정은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더니 큰 결심 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좋아. 해!]
“그럼 여기에 사인하렴.”
사락.
크리스티나가 오른손 검지를 세워 흔들자, 요정의 손에 꼭 맞는 금빛 깃펜이 생겼다.
요정은 룬을 노려보더니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삭!
글자도 아닌, 그냥 그림이 양피지 하단에 아무렇게나 그려졌다.
룬도 깃펜을 받아 양피지를 눌렀다.
해츨링 최고야!
‘근데, 이 녀석 싸인이 왜 이래?’
룬은 자신의 이름을 서명으로 넣으려다가, 요정이 애들 장난처럼 그려 둔 문양을 바라보았다.
‘이건 싸인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문득 룬은 중요한 부분을 떠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뀨.”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없지?]
요정이 눈을 끔뻑였다.
[있어.]
“뀨?”
있다고?
룬이 의아하게 보자 요정이 바보야? 하는 눈으로 룬을 보았다.
[깊은 밤의 요정! 그게, 나야!]
“…….”
역시 있을 리가 없었다.
하다못해 듀라한조차, 흑미가 ‘라한’ 이라고 불러서 그게 이름이 붙었건만.
‘깊은 밤의 요정.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다시 물끄러미 계약서에 그려진 낙서를 본 룬이 의견을 내었다.
“뀨우, 뀨뀨우.”
[이 참에 이름을 하나 만드는 게 어때?]
룬이 깃펜의 깃털 부분으로 대충 그린 엉망 동그라미 낙서를 가리켰다.
그러자, 요정은 자존심이 상한 듯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몰라. 그런 거. 필요해?]
“뀨후우우…….”
그 말에 룬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룬이 말했다.
[당연하지. 계약서는 원래 정확한 게 좋아.]
평범한 약속도 아닌 골드 드래곤이 공증하는 계약이다.
명확하게 해 두지 않으면 자칫 크리스티나에게 피해가 갈 지도 몰랐다.
“뀨.”
[어쩔 수 없네. 너, 이름 하나 만들자. 원한다면 이름 짓는 걸 도와줄게.]
[뭐, 뭐어?!]
화들짝 놀란 얼굴.
마치 엄청난 행운이 닥치기라도 한 듯, 요정의 눈이 점차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믿기 어렵다는 듯 재차 룬에게 물어왔다.
[도움? 줄거야? 네가. 만들어?]
“? 뀨우.”
[그렇지?]
요정이 원한다면 도움 정도야 줄 수 있었다.
안위가 걸린 계약 때문에 갑자기 이름을 정하게 되었는데, 그걸 번개불에 콩 볶듯이 만들어야 상황.
당혹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다만 반응이 이상했다.
[만들어준다니. 그런 거 가, 갑자기. 꺄악, 몰라!]
“…….”
도움을 준댔지, 만들어 줄 생각까진 하지 않았던 룬.
‘그걸 나보고 지어주길 바란다고?’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룬이 의아한 기분을 담아 바라보자, 갑자기 한 손을 볼에 대며 몸을 베베 꼬았다.
‘왜 저런 반응이야.’
룬은 섣불리 입을 놀리지 않기로 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왠지 요정에게 이름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듯 했다.
룬은 가진 지식을 뒤적였다.
‘이름이 특별하긴 해도, 저 정도는 아닐텐데.’
요정은 무어라 불리던, 그 본질이 중요한 정신체.
‘깊은 밤의 요정’이라는 본질을 아는 게 중요하지, 이름은 그저 불리우는 여러 명칭 중 하나일 뿐이다.
‘밤와 관련된 요정이 저 녀석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정확히 명시하고자 쓰려는 것 뿐이라고.’
하지만 요정은 얼른 이름을 줬으면 하는지, 룬을 빤히 보며 말했다.
[받아는 주지! 준다면야.]
툭 건드리면 펑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룬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어둠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룬은 어둠의 일족 유일한 후계자이자 주인.
즉, 이는 요정의 근본으로부터 이름을 받는 다는 소리와 같았다.
고민하기 시작한 룬을 눈치 챘는지, 크리스티나가 조언을 건내왔다.
“룬, 너무 가볍게 내릴 필요는 없어보이는 구나. 너는 어둠의 후계. 저 요정에게 네가 내릴 이름의 무게를 생각해보렴.”
룬은 이 상황이 딱 맞는 예시를 떠올렸다.
‘정령왕이 정령 하나를 위해 이름을 주는 상황이잖아.’
어둠이 저 요정의 부모와 같다면, 룬은 그보다 더 높은 대상.
그걸 생각하면, 룬이 이름을 지어주기만 해도 저 요정의 격이 올라갈 터였다.
‘그리고 격이 올라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지.’
기왕 일하는 거, 여러모로 능력이 있는 편이 좋긴 했다.
그때, 무슨 오해를 한건지 요정이 다급히 말했다.
[왜? 고민 왜? 나, 잘해! 좋아!]
좋긴 뭐가 좋아.
룬은 어이없는 눈을 해보였다.
[!?]
그러자 요정이 안절부절하게 발을 굴렀다.
이윽고 룬이 크리스티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뀨.”
[한번 줘 볼까 해.]
“그러니? 네 뜻이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티나를 힐끔거리던 요정이 최대한 순한 얼굴을 해 보였다.
[줄 거야? 이름.]
“뀨.”
[그래.]
[!]
요정이 눈을 과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무를까 얼른 재촉하고 싶은.
동시에 뭐라고 말하면 기분 상해 취소라도 할까 갈등하는 게 고스란히 얼굴에 다 드러났다.
“뀨뀨우.”
[네 이름은 그레이스(grace)야.]
[그레이스?]
요정, 그레이스의 반문에 룬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뀨뀨.”
[그래. 은총이라는 뜻이지.]
[흐, 흥! 뭐야, 은총이라니…….]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안든다는 건지.
고개를 돌리며 ‘그레이스’를 중얼거리는 요정을 보며, 룬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아함이나 품위. 영예로움을 드러내는 뜻이기도 하지.’
딱 저 말광량이 천방지축같은 녀석에게 필요한 단어였다.
“뀨.”
[그럼 여기 싸인.]
해츨링의 통통한 앞 발가락이 요정이 대충 그린 낙서 위쪽을 가리쳤다.
냉큼 깃펜을 뺏아든 요정 그레이스가 낙서처럼 된 자리에 가로줄을 두 번 그었다.
[그……레……이……스. 됐어!]
화악!
계약서에 싸인을 마치자, 갑자기 그레이스의 몸이 빛으로 감싸여졌다.
‘격이 높아지는 과정이군.’
룬은 요정의 모습이 변하는 걸 적당히 확인하며 제 싸인을 마쳤다.
금빛 양피지가 공중에서 돌돌 말리더니, 날아가 크리스티나의 손안에 착지했다.
“그럼, 이 계약서는 내가 맡도록 할게.”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잠시 룬에게 머물렀다.
“순수한 마음으로 저 요정까지 품어버리다니. 네 상냥함에는 정말 못 당하겠구나.”
그 말에 룬은 무해한 미소만 띄워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절대 순수하진 않다.
‘게다가 저 녀석 계약서에는 제 목숨이 걸렸잖아. 이판사판으로 덤빌 때를 생각해 둔 것 뿐인데.’
성질머리가 제법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 악덕계약이라고 난리를 피울 지도 모를 일.
하지만 이젠 걱정 없었다.
본질의 주인인 룬이 이름을 하사한 이상, 이는 일종의 ‘권속 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만 이득이란거지. 이걸 굳이 말 할 필요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