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요정을 보아하니, 몸도 살짝 커져있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길어진 은발.
보랏빛이 섞인 은빛 눈.
검은 요정의 옷도 우아함이 좀 더 섞인 디자인으로 바뀌어있었다.
[아…….]
손을 들어보이고, 모습을 둘러보며 멍해진 그레이스가 룬을 바라보았다.
[해츨링 최고야!]
“뀨우우.”
[룬 이라고 불러. 그게 내 이름이니까.]
[그래! 그럼, 룬 최고야!]
“뀨우.”
[그래. 잘했어.]
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레이스가 갑자기 뾰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거짓말! 영혼 없어!]
척!
하얀 손가락을 뻗어오는 요정.
룬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칫. 까다로운 녀석 같으니.’
그럼 그렇지.
격이 높아져도 본성이 어디 가진 않았다.
‘하긴, 일만 잘 하면 됐지.’
어차피 이동 마법을 유지할 매게체로서 데려오게 된 만큼, 중요한 건 능력이었다.
“뀨우, 뀨우우.”
[크리스티나, 이 녀석 데리고 가 볼게. 나머지 녀석들 수업 잘 부탁해.]
요정이 만약 난동을 부릴 경우를 대비해 일주일간 밤낮없이 특훈 해 온 룬.
그리고 애초에 대부분 수업을 마스터 한 페르디키온.
둘은 ‘졸업반’ 으로 분류되어 드워프들을 돕기로 이야기가 되었었다.
다만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웠는지 룬에게 다양한 도구가 담긴 주머니, 그리고 즉시 이동 가능한 통식석을 내어주었다.
“늘 몸 조심하렴. 그리고…….”
잠시 머뭇하던 크리스티나가 룬의 앞 발을 손 위에 두고, 그 위에 제 손을 포개올렸다.
“인간에게는, 너무 정 주지 않도록 하렴.”
“…뀨.”
[응. 이미 비슷한 건 경험해 봤는걸.]
그 말에 크리스티나가 조금 슬픈 듯 미소지었다.
“그래, 그랬지. 그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단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사과하는 지는 명백했다.
분명 제드가 세상을 떴을 때 이야기일 터.
물론, 그렇게 들리리라 여겨 한 말이지만 사실은 그것만은 아니다.
‘그런 일은 전생에도 있었으니까.’
섬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세상에 남긴 업적을 들었을 때.
혹은, 제법 괜찮다 여겼던 인간이 세상을 뜨게 되었을 때.
또는 나름 친하게 될 줄 알았던 녀석이 사실은 신수의 거죽과 심장을 탐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기분은 참 더럽고 서럽기도 했다.
‘다 어릴 때 일인데. 옛 생각이 나는군.’
룬은 남몰래 속으로 씁쓸한 미소지어 보았다.
‘아마, 해츨링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이유도 비슷하겠지.’
룬은 크리스티나에게 걱정하기 말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뀨.”
[괜찮아. 형도 있었고. 다시 만났는 걸.]
언젠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른다면.
신선과 같은 급이 된다면 한 번쯤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여겼던 그 마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사는 거지.
진하게 농축된 상념과, 피부를 스치는 이야기들.
그것들이 녹아든 세월을 한 잔 하고 나서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을 꾸려나가는 모든 존재들에게 부과된 업이리라 여겼다.
***
출발 준비를 마친 룬은 페르디키온과 함께 검은방 한 쪽에 섰다.
크리스티나와 수련하며 만든 워프 포탈이 우웅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본 룬이 물었다.
“다 모였지?”
“네에!”
“삐이약!”
흑미가 제 머리위의 백야와 함께 대답했다.
흑미는 졸업반이 아니지만, 드워프들에게 워낙 인기가 많았던지라 인사차 데려가기로 했다.
제드가 살아있을 적, 종종 인간계에 놀러갔던 경험도 데려갈 이유로 충분했다.
이어, 크리스티나 옆에 선 아멜리아가 푸른 머리카락을 흔들며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 다녀와…… 다들.”
“힛. 수업 때 봐요, 언니!”
“삐잇!”
파다닥!
흑미 머리위에 앉아있던 백야가 몸을 쭉 들어올리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내심 아쉬워했던 아멜리아가 작게 푸훗, 하고 웃었다.
“으, 응! 얼른…… 강해질, 테니까.”
철컹!
듀라한 역시 배우인사차 고개를 숙여보였다.
듀라한이 남은 건 아멜리아의 수업도 수업이거니와, 검은 밤의 요정인 그레이스 때문이기도 했다.
[왜! 왜에?]
전부터 불만스러워 하더니, 진짜 두고 간다는 걸 깨닫자 아주 심통이 터진 저 꼴을 보라.
물론 그레이스의 심통은 그 때문만은 아니긴 했다.
그녀는 시위하듯 손으로 제 오른쪽 머리를 꾹 짚고있었다.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머리카락 고작 4가닥 정도밖에 안 뽑았는데. 아직도 심통이냐고.’
길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그레이스의 일부를 필요가 있었다.
백야의 깃털처럼, 그레이스의 머리카락 정도면 충분했건만.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룬은 그레이스가 머리카락을 한 가닥 똑, 따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난리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카락 하나씩 뽑은 걸로 아플리는 없으니, 이는 엄살이었다.
룬이 입을 열었다.
“대신 듀라한도 남기로 했잖아. 이만한 이동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데려가봐야 소용 없다고.”
듀라한을 힐끔 본 요정은 나름 할 말이 없었는지 볼을 부풀렸다.
이어 제드가 손을 비비며 등짐을 진 채 앞으로 나섰다.
“이거이거, 옛날 생각 납니다요! 캬. 전 그때도 길잡이 드워프로 안내를 도 맡아했습죠!”
사실 여기서 가장 걱정스러운 게 바로 제드였다.
바부예요?
룬은 물끄러미 제드를 바라보았다.
“너 진짜 괜찮겠어?”
생전과 달라진 몸.
제드가 난쟁이 몸이 된 건 드워프 중, 아마 마론이나 그 측근 정도만 알 터였다.
그러니 제드 스스로가 이 작은 난쟁이 모습으로 나선다는 건 나름대로 결심이 필요했을 터였다.
“아무렴요! 이 제드가 이날만 기다린 거, 아시지 않습니까요?”
그렇긴 했다.
일주일 전, 드워프 대륙이동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후.
그날부터 제드는 들뜬 나머지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녔으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지.’
룬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대장간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무구를 만들다가, 히힉! 거리면서 돌아다니질 않나.
누가 보면 귀신 들린 줄 알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귀신이 붙긴 했다.
바로 돈귀신 말이다.
여성 드워프 이주 계획을 신이 나서 떠들며, ‘이주 후 금화 대박!’
따위를 중얼거리던 모습은 진정 돈에 미친놈 같았다.
‘뭐라더라. 남녀 드워프를 연결해 주고 중개비를 받겠다던가.’
발상도 신박했다.
물론, 그 역시 이무기 시절.
솜씨 좋은 중매쟁이에게 웃돈을 주고 받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로 대박이라 할 만큼 큰 돈을 버는 경우는 한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드워프들은 연애 결혼이 대부분인 것 같던데 말이지.’
룬은 상념에서 벗어나 점차 활발하게 돌아가는 이동문을 바라보았다.
우웅!
손을 뻗고 이동문을 작동시키던 요정 그레이스가 끙끙거리며 말했다.
“빨리! 힘들다구!”
“시끄럽다.”
테스트를 해 주기로 한 페르디키온이 대꾸하며 통로 너머로 작은 불덩어리를 쏘았다.
화르륵! 화륵!
통로 끝으로 갈수록, 불이 점점 커졌다.
거의 끝에 가서는 불이 통로를 감쌀 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확실하군. 불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불의 기운이 강한 장소로 연결되었다는 의미지.”
그레이스가 낑낑거리면서 항의하듯 말했다.
“당연히! 레드 드래곤의 레어. 기억했다구!”
코웃음을 친 페르디키온은 그 뒤로 한두 번 더 통로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그레이스가 성질을 냈다.
“아! 왜 빨리 안 가?”
“계약에 묶였다 하나, 네 녀석이 룬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새빨간 불기운 어린 시선이 요정에게 박히자, 그레이스는 분한 듯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룬은 이해하기 어려운 그레이스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덤벼서 이길 상대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열을 내지.’
하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그럼, 시작할게.”
룬은 미리 추출해 둔 그레이스의 머리카락.
거기에 담긴 마력을 이용하여 ‘마력열쇠’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열쇠의 끝을 통로 입구에 밀 듯이 꾹 눌러 넣었다.
두쿵!
쿠구궁!
통로의 주인이 바뀌는 소리가 났다.
마치 거대한 성의 문짝을 교체한 듯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즉시, 통로의 색이 바뀌었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검회색이었다면, 지금의 통로는 붉은색이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까만 통로.
훨씬 안정감 있고, 튼튼해 보이는 통로였다.
그 광경을 본 그레이스가 입을 벌렸다.
“이게, 가능?”
룬이 열쇠를 살짝 들어 보이며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로 안정시킬 정도는 돼야 해. 심지어 난 요정도 아니잖아.”
“윽!”
분한 듯 주먹을 쥔 그레이스가 씩씩 댔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진 못했다.
문 건너편에 손을 넣어본 페르디키온이 중얼거렸다.
“불의 힘이 오히려 덜 느껴지는군.”
“그건 어둠의 힘으로 건너편 문이 생겨서 그래.”
건너편에서 흘러들어오는 기운까지 제대로 차단했다는 뜻이었다.
페르디키온이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이는 명백히 그레이스를 향한 평가였다.
문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한, 그저 통로만 겨우 만들었다는 부족함을 탓한 것.
그레이스는 화가나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무해! 진짜!”
그런 그레이스를 달랜 건 흑미였다.
“요정 언니, 언니두 흑미랑 같이 수업해요! 룬 님이 우리를 위해 연습 인형 잔뜩 만들어줬거든요.”
그랬다.
룬은 자신의 성과를 돌이켜보았다.
‘수련하는 틈틈이 이빨 요정의 창고를 털었지.’
촉박한 시간 내에 만들려니 힘들었지만, 놈이 재료를 알뜰살뜰하게 잘도 모아두어서 괜찮은 인형 몇 개를 만들어냈었다.
주먹을 쥐어 올린 흑미가 말을 덧붙었다.
“요정 언니도 수련 열심히 하면 더 멋진 길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힘내요!”
“흥!”
표정을 표독스러웠지만,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의식한 그레이스는 결국 볼만 부풀리고 말았다.
룬은 내심 걱정이 됐다.
‘저거 성질 사나워서. 흑미랑 둬도 괜찮을까.’
그때, 듀라한이 상체를 쑥 숙여 그레이스를 물끄러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