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쭉 입술이 나온 그레이스가 물었다.
“왜?”
잠시 바라만 보던 듀라한이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스윽스윽, 요정의 은발을 쓰다듬었다.
“뭐, 뭐야아……?”
싫은 척하려 들었지만, 좋은지 슬슬 머리를 내미는 그레이스.
“이, 이런다고 내가 좋아할 거라 생각해?”
팅커벨 같은 투명한 날개까지 바르르 떨던 그레이스는 듀라한의 손등 위에 살포시 앉았다.
룬은 흐린눈을 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보면 또 괜찮아 보이는데. 아무튼 수고가 많네, 듀라한.’
듀라한은 룬의 명령을 착실하게 지켰다.
그 결과는 보는 바와 같이, 요정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목적도 달성했고.’
사실 드워프 마을은 레드드래곤의 레어를 통하면 쉽게 갈 수 있었다.
지금 요정의 길을 쓰게 한 건, 격이 높아졌으니 현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그레이스의 힘을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크리스티나도 그레이스의 쓸모를 확실히 느꼈을 테니까.’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은 법.
결과에 만족한 룬이 입을 열었다.
“이 길은 내가 가져간다. 새로운 길 만드는 연습 제대로 하고 있어.”
뾰로통해진 요정이 볼을 부풀렸다.
“흥. 어차피 가져갈 셈이었잖아. 뭘 물어봐.”
그러면서도 길을 힐끔거렸다.
룬의 소유가 된 길은 무척이나 깔끔하고 훨씬 좋은 길이었다.
그레이스가 만들 땐 자갈과 잡초가 무성한 길이었건만, 순식간에 왕성 대로처럼 변했으니.
내심 시무룩해진 그레이스는 속상한 마음에 삐쭉삐쭉한 마음이 솟았다.
‘무슨 해츨링이 저래? 뭐 저렇게 다 잘하냐구!’
눈앞에서 실력 차이를 느끼고 나니 심통 맞은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결국 그레이스는 괜한 성미를 내고 말았다.
“칫. 짜증 나, 진짜.”
문제는 페르디키온이 그 말을 곱게 넘어갈 리 없었다.
눈썹을 갈지자로 일그러트리며, 화룡족 소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룬. 역시, 저 녀석 정신을 고쳐놔야…….”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가는 건 아닐까 싶은 험악함이 느껴진 순간.
“때!찌!”
짭!
흑미가 손뼉을 짝, 하고 치며 귀여운 얼굴로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부, 요정 언니!”
“삐약!”
흑미 머리 위에 백야까지 서서 날개를 뒤로 제꼈다.
당황한 요정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내, 내가 왜 바보야!”
“요정 언니는 왜 좋은 걸, 좋은 줄 몰라요? 바부예요?”
진짜 바보라고 생각하는 흑미의 얼굴이 갸웃 기울어졌다.
그러자 얼굴이 새빨개진 요정이 성질을 부렸다.
“바, 바보 아니야! 나!”
“바보예요. 엄청 불쌍한 바보.”
흑미의 말이 더블쇼크였는지 요정이 뒷목 잡을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흑미가 말했다.
“언니, 룬 님이 가진 힘에서 태어났잖아요. 근데 지금은, 힘의 근원인 룬 님이 이름을 불러주었잖아요.”
순간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달싹이는 그레이스에게, 흑미가 이어 말했다.
“예전에는 외로워서 몬스터들을 데려왔다면서요. 지금은 우리 있어요. 근데 왜 좋아하지 않구, 화만 내요.”
“…….”
의외였다.
역정을 내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레이스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싫어해. 나. 다들.”
이윽고 입이 열린 그레이스의 말.
흑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닌데요. 흑미는 요정 언니 안 싫어요.”
“싫잖아! 다 알아!”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자리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네가 하는 행동이 불편하고 싫은 부분이 있는 거지, 네 존재가 싫은 건 아니야.”
룬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무조건 싫고, 짜증 난다는 말을 하니까, 아무래도 듣는 쪽에서도 싫다는 소리가 나오게 되지.”
특별할 것 없는 정론이었다.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차분한 말이 검은 머리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대로 네 기분이 어떤지 말하고, 원하는 게 뭔지 대화한다면 오히려 잘 풀릴지도 몰라. 우린 서로 다르고,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
열 없는 침착함 탓일까.
요정은 묘하게 기가 죽었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룬, 먼저 가렴. 그레이스는 내가 이야기를 해 볼 테니.”
“크리스티나가?”
작은 끄덕임을 따라 금빛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렀다.
“이 일에는 내 탓도 조금은 있을 거란다. 그러니, 우린 대화가 필요하지.”
룬에게 웃어 보인 크리스티나가 그레이스에게 눈짓을 했다.
찔끔한 그레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룬은 생각했다.
‘첫 만남부터 영 좋지 않긴 했지.’
빛의 힘으로 봉인 비슷한 장치를 했다거나, 룬의 힘에 기생하는 존재로 보았다거나.
룬에게 해가 되리라 여겨 가차 없이 행했던 일들이 있었다.
페르디키온도 말을 거들었다.
“내 생각도 그렇다. 분명, 우리보다 현명하게 해결해 두실 거다.”
잠시 생각해본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먼저 가볼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줘.”
“그래. 잘 다녀오렴.”
가볍게 손을 흔드는 크리스티나, 듀라한, 그리고 아멜리아.
다소 찜찜했지만, 대화와 시간이 필요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을 두고 룬과 다른 이들은 안정된 통로에 발을 올렸다.
“나중에 봐.”
인사를 남긴 룬은 그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걸었을 때.
“드워프들을 제대로 보는 건 나도 오랜만이다. 그동안은 소식만 종종 들었지.”
일에 집중하게 하려는 의도인지, 페르디키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룬이 말을 받았다.
“특별한 소식은 없었고?”
“있긴 했지. 흑미를 숭상하는 이상한 놈들이 생겼다던가.”
“…….”
그 말에 어허험! 하고 제드가 헛기침을 했다.
“아이고, 물론 그것도 있지만! 최근에 생긴 문제는 또 다른 거지요.”
“다른 거?”
룬의 의문에 제드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예이! 거, 사실 룬 님에게 말하기는 좀 그런데. 페르디키온 님께서 회복기에 드신 사이 문제가 좀 있었죠.”
룬이 입을 열었다.
“좀 더 말해봐.”
종종거리면서 통로를 걸어야하는 제드는 남들보다 발 움직이는 속도가 빨랐다.
그 상태에서도 말하는 게 힘들지 않은지, 제드는 잘도 입을 움직였다.
“대륙 문물을 들여오자는 드워프와, 전통을 지키자는 드워프들의 힘의 균형이 무너진 일이 생겼거든요.”
입맛을 쩝, 하고 다신 제드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통파가 지금은 우세하긴 해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힘은 개혁파가 더 강합니다. 이게 뭔 소리냐면요.”
양 손바닥을 모은 제드가 손끝을 서로 가볍게 부딪쳤다.
“대륙에 나온 녀석들이 돈도 잘 벌고 성공은 했는데, 문전박대를 당해요. 고향으로 가면.”
“저런.”
룬의 추임새를 받은 제드가 말을 이었다.
청을 들어주십시오
“이유야 다양하지만, 대륙으로 나간 드워프들에게는 대장장이의 명예가 없다고 여기는 게 제일 문제죠.”
제드의 말을 정리하면 이랬다.
드워프들이 결혼 상대로 가장 선호하는 건 대장장이로서 훌륭한 업적을 낸 자.
혹은, 가까운 선대에 그런 업적을 해낸 드워프 집안이었다.
나름의 신념을 품고 대륙으로 떠난 드워프들.
전통파의 드워프들에게는 탈선한 비행 드워프 보는 눈이었다는 소리다.
제드가 말했다.
“그것만이라면 그래도 제가 말씀 잘 좀 드려볼 수 있겠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이유가 또 있었습죠.”
룬이 입을 열었다.
“그것만이 아니라고?”
“예에이. 저희 쪽 애들이 전통파 물건을 가져오다 뭔 실수가 났는지.”
휴, 하고 제드가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전통파 드워프 중 하나가 장인대회에 내야 할 물건까지 저희한테 보내버리는 바람에 그만 도둑으로 몰려버렸거든요.”
룬이 생각하기에도 이는 심각했다.
장인대회는 드워프 장인들의 자존심 대결.
거기에 출품해야 할 무기는 당일까지 극비로 제작된다.
한데, 그 물품이 반출되어버린 일은 드워프 장인들의 공분을 살 만했다.
“그건 진짜 큰일이겠네. 오해가 쌓이기 너무 좋은 일이잖아.”
룬은 제드를 보며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물품은 되찾았어?”
제드는 우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작……팔려버렸습죠…….”
“…….”
장인 대회 출품해야 할 물건이라면 최소 10년간.
혹은 그 이상 공을 들여 작업했을 터.
어떤 자가 사 갔을지는 몰라도, 결코 돌려줄 리 없었다.
‘직접적으로야 제드 탓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 치명적인데.’
룬이 그렇게 생각하며 침묵하고 있자 곁에서 페르디키온이 열기 어린 한숨을 쉬는 소리가 났다.
하기야, 마음 같아서는 룬도 한숨을 쉬고 싶을 정도다.
‘저 화룡족 녀석이 듣기에는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벌써 눈앞에 어두운 마력으로 덧씌워진 주홍빛 불꽃이 보였다.
살아 움직이는 무늬처럼 일렁이는 붉은 빛은 무척 사납게 이글거렸으나.
이내, 제 주인을 알아본 듯 얌전히 열기를 줄였다.
룬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말 없는 침묵 사이로 룬과 페르디키온의 눈치를 보던 난쟁이 제드.
그는 멋쩍은 얼굴로 목 뒤를 손으로 긁었다.
“쌍방 과실로 끝나긴 했습죠. 표면적으로는요.”
룬이 말을 정리했다.
“양쪽 다 제대로 납득하진 못했다는 소리네.”
“역시 룬 님. 척하면 척이십니다요!”
엄지를 치켜올린 제드가 씩 웃어 보였지만, 분위기가 딱히 나아지진 않았다.
룬은 제드를 한번 슥 보고는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너갈게.”
뒤에서 잘 따라오던 흑미와 백야를 확인한 룬이 문에 손바닥을 대었다.
몸속까지 데울 듯한 열기.
그 뜨거운 힘이 넘실거렸다.
룬에게 있어서는 고작 100여 년.
드워프 마을이 그간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화르륵!
룬의 손이 닿자, 단단해 보였던 문이 무형의 어둠과 섞인 불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문 너머로 가장 먼저 빠져나간 건 룬과 페르디키온.
그 뒤로 제드와 흑미, 백야가 따랐다.
주위를 둘러본 룬이 입을 열었다.
“여긴 여전하네. 조금 바뀐 것도 있지만.”
불길이 몸에서 사라지자,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드워프들의 광장이었다.
달구어진 용광로에서 쇳물 붓는 소리.
언제나 폭염이 쏟아지는 마을.
작은 용암을 다루는 작은 드워프들의 바쁜 모습들.
그러나, 바뀐 모습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룬이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