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의 대답에 스콧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제 어린 시절 보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벌써 백 년전이라니.”
백여 년 전, 장인의 길을 고민하던 시절의 스콧.
어둠 일족인 룬이 처음으로 장인 대회 우승자를 고르는 순간, 그도 자리에 있었다.
-미래와 역사 중 하나를 밟고 우위에 서는 걸로, 장인의 자존심 운운하는 게 드워프 족의 장인 정신은 아니지 않아?
드워프들을 내려다보며 태연히 말하던 어린 룬.
그 장면은 스콧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생전에 이렇게 보게 되다니, 무척 감격스럽군요.”
그리고, 스콧은 젊은 시절 가슴을 뜨겁게 달군 이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룬 님께서 이 어린 드워프의 가슴에 꿈을 새겨주셨죠. 지금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감사하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스콧이 호응을 기대하는 눈으로 룬을 슬쩍 보았다.
완전히 무시할 필요는 없기에, 룬은 시선을 가볍게 맞춰주었다.
“음. 그랬다니 좋은 일이네.”
그러자 스콧은 양손을 쫙 펴 보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저 같은 녀석들이 모여 만든, 100년밖에 되지 않는 신생 공방. 작지만 개혁파와 전통파에 이은 제3의 파벌로 자리 잡았죠.”
룬은 듣자마자 생각했다.
그 배경에는 페르디키온의 은근한 지원이 있었을 거라고.
‘안 그래도 전통파와 개혁파가 서로 물어뜯고 난리였으니. 중도파가 있는 걸 달가워했겠는걸.’
룬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스콧의 말이 이어졌다.
“저희 공방의 물건은 세련되고 독특한 걸로 유명합니다.”
“흥미롭네.”
과연 블랙 드래곤 일족 해츨링의 비늘로 만든 용광로로 어떤 작품들을 만들었을지.
룬 역시 무척 궁금하긴 했다.
‘성과가 정말 좋았으면 좋겠는걸.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를 녀석들이니.’
룬의 눈빛이 반짝였다.
길은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리는 수차 돌아가는 소리.
뜨끈한 열기와 함께, 피부로 느껴지는 어둑한 기운.
지붕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가 살아있는 거친 숨처럼 느껴졌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개통파의 공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깁니다.”
스콧의 말에 제드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아이쿠야……. 이것 참.”
제드가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여긴 재료 구하러 오가는 길도 영 불편하고, 던전을 들어가기 위해 가는 길도 돌아서 가야 하는데.”
그 말대로 위치가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다.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확실히. 개혁파와 전통파 대장간을 갔을 때보다 길이 안 좋기는 하지만.”
스콧과 다른 드워프들이 움찔 몸을 굳혔다.
룬은 태연히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건 만들어내는 물건과 품질이니까. 대장간 구경부터 시켜 줘.”
그 말에 금세 표정을 수습한 스콧이 나섰다.
“아무렴, 물론입니다. 자, 이리 드시지요.”
문이 열리고 보이는 아늑해 보이는 내부.
‘확실히, 좀 작긴 한데.’
위대한 대장간들만 주로 갔던 룬.
개혁파와 전통파의 공방이 거대한 호텔이었다면, 여긴 아늑한 오두막집 같았다.
나쁘진 않았지만, 조금 더 오붓한 아지트 같은 느낌이었달까.
“나쁘지 않네.”
진심이었다.
일단 물건들이 좋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어둠의 기운이 맺힌 무구들, 장비들.
그리고.
“이건 악기 아냐?”
피아노와 피리 등.
물건을 알아 본 룬이 스콧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콧수염 드워프가 다가와 바이올린을 들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어둠의 용광로에서 나오는 힘. 그리고 사용 가능한 재질들을 연구해본 결과, ‘악기’를 만들어내는 게 효율이 좋았지요.”
룬이 보기에도,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진 악기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문제는, 어떤 건 어둠의 기운을 잘 머금고 있어 흉흉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룬은 나름대로 좋은 평을 내렸다.
‘연구는 제대로 했네.’
룬이 피아노 앞에서 건반을 가볍게 건드렸다.
따라란.
따단.
음색이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룬은 잠시, 그가 아는 노래를 가볍게 쳐 보았다.
딴-따라라~
딴-따라라~
따~라라라라~라~라라라
고혹적인 선율이 구수한 음색을 연주했다.
몇 번인가 건반을 더 건드린 룬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누가 만든 건데?”
음악에 홀린 듯 멍하니 있던 드워프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접니다!”
청을 들어달라며 가장 간절하게 머리를 박고 있던 성실한 얼굴의 드워프가 손을 들었다.
룬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잘 만들었네.”
“정말이십니까?”
어둠의 주인의 칭찬에 드워프의 눈이 황금빛으로 반짝일 지경이었다.
그러자, 다른 드워프들 역시 슬금슬금 입을 열었다.
“저, 저도 사실 이 비올라를 반들었습니다만…….”
“저는 이 트럼펫을…….”
“저는 이 아코디언을 만들었는데, 평가 좀 해 주십사…….”
“실로폰과 이 하프 선율도!”
뒤로 갈수록 드워프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흑미는 이 하모니카가 마음에 들어요! 소리 재밌어요!”
드워프들의 권유로 흑미가 하모니카를 불어보더니 평했다.
룬이 만져보기에도 품질이 무척 우수했으므로, 자연히 이런 말이 나왔다.
“다른 드워프들도 반응 꽤 좋았겠는데.”
그 말에 신이나서 작품평을 해 달라 요청하든 이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성실한 젊은 드워프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걸 좋아하는 건 저희뿐이라 해도 과연이 아니어서 말입니다.”
멋쩍은 얼굴이 된 그가 뒷목을 긁적이며 우울한 소리를 했다.
“일단 악기란 게, 드워프들이 사용하는 게 아니라서요.”
하긴, 룬이 보기에도 음악은 드워프들의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뒤 이어, 여성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맞아요. 귀한 재료로 이런 걸 만드느니, 빨래 방망이나 만드는 게 훨씬 낫다 타박 할 정도라.”
숏컷에 시원해 보이는 인상의 여성 드워프 장인은 미간을 팍 구겼다.
가만 보니, 여성 드워프들이 다른 공방에 비해 많았다.
룬은 피아노와 여성 드워프들을 보고는 생각했다.
‘타 공방으로 가면 재료수집이나 하게 될 거라는 말, 왜 했는진 알겠다.’
여성 드워프 장인들도 위대한 장인이 되는 경우는 있다.
흑미의 옷을 지어준 드워프들은 특히, 여성 드워프들이 꽤 많았다는 걸 알고 있던 룬.
추측하건데, 여성 드워프들은 옷감, 가죽, 세공등의 섬세하고 품이 드는 작업에 적합한 영역.
거기서 능력을 더 발휘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활이나 검 같은 무기도 보이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장인대회에 내보낼 정도의 수준은 아니긴 했다.
대략 파악이 끝난 룬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잘 봤어. 그럼 용광로부터 보여줘.”
발 밑에서부터 느껴지는 어둠의 기운이 아까부터 룬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주인을 향한 손짓처럼.
역시나, 스콧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앞장섰다.
“룬 님, 이쪽으로.”
용케 구했는지, 어둠과 불, 빛의 기운이 담긴 마력석으로 나름 힘을 봉인한 구역.
안으로 들어서자 드워들이 컥 소리를 냈다.
어둠에 질식할 정도로 힘이 가득한 탓이었다.
스콧이 부르르 떨면 입을 손으로 막았다.
“큭, 그 사이에 이만큼이나 힘이……!”
불의 기운을 가졌으나 어둠의 권속인 흑미와 제드는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해 갸우뚱했다.
그리고.
포오오.
“삐이약?”
흑미 머리 위에 있던 백야가 은은하게 자체발광을 시작했다.
불의 힘을 지닌 새의 능력을 탁월해서, 헐떡이던 드워프들은 그 즉시 숨통 트이며 한마디씩 했다.
“헉! 어후 살겠네요.”
“이 새가 뭔가 희안한 힘을 씁니다. 불의 기운이 느껴져요.”
그러자, 드워프들이 슬금슬금 흑미와 백야 근처로 옹기종이 모여들었다.
룬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안 그래도 방어막이라도 둘러줄까 했는데, 차라리 저기 모여있으라 하는 게 낫겠군.’
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는 오두막집 내부처럼 아늑했는데, 아래는 생각보다 탁 트여 넓었다.
룬이 황금팔찌 위에 손을 올리고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나 혼자 가서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 볼테니 잠시 거기 있어.”
잠시 눈치를 보던 드워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습니다, 어둠의 일족. 블랙 드래곤의 후손이시여!”
“잘 좀 부탁드립니다!”
말은 부탁이지만, 여기서 거절이라도 들었다간 그대로 목숨이라도 잃을 듯한 얼굴들이 룬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서 난쟁이 제드가 외쳤다.
“룬 님-! 위험할 거 같으면 얼른 돌아오십쇼오오! 위험해 지시기라도 하면 저 죽습니다요오!”
“…….”
대충 고개를 끄덕인 룬이 변신용 팔찌를 쑥 뺐다.
해츨링의 모습으로 바뀐 룬이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뀨후우.”
[가볼까.]
꼬리를 슬슬 흔들며 뒤뚱뒤뚱 걸어가는 해츨링의 뒷태에 여러 시선들이 꽂혔다.
마실 나가듯 걸어간 룬은 거대한 용광로 앞에 섰다.
“뀨우.”
[역시.]
힘이 폭주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당장 터질 듯한 폭탄처럼.
어둠의 힘을 불의 기운으로 제어해왔으나, 흑미나 어둠의 근원인 룬을 가까이 하자 다듬어두었던 힘이 펑펑 터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뀨.”
[문제 해결은 어렵지 않겠군.]
심지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을 수도 있을 듯 했다.
“뀨뀨우.”
앞 발을 쭉 뻗은 룬은 폭죽처럼 터지는 힘을 우선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를 불러야겠군. 그리고.’
이 상황은 선천적으로 불의 기운을 타고나는 드워프들이 다루기엔 무척 까다로웠을 터.
그렇다고 룬이 늘 상주하며 봐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둠을 다루는 힘을 가진, 그레이스라면.
‘이 힘을 통로를 만드는 데 사용하게 해야겠어.’
룬은 빙긋, 미소 지었다.
“뀨우!”
[잘하면,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상황이 되겠는걸.]
감사합니다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야생마 같은 힘.
룬은 천천히 힘을 다스렸다.
새까만 기운은 제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주변에 모여 맴돌았다.
‘여기까진 쉽네.’
룬은 어둠의 인장을 손 안에 꺼내었다.
파지지직!
검은 갈까마귀 색 번개가 공중을 찢었다.
완전히 발현시키지도 않았는데, 불길하게 일그러지는.
파괴적인 힘이 해츨링의 앞발 위에 올려졌다.
“뀨후우우.”
‘크리스티나나 페르디키온이 없어서 다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