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있었다면 보나마나, 위험하게 힘을 쓴다고 말리려 들었을 터다.
그만큼, 흉흉한 성격을 가진 힘이었다.
하지만 그를 부드럽게, 그리고 차분히 움직여냈다.
탐욕스러운 어둠이 칭얼댔다.
주변 가득한 불기운을 잡아먹고 싶다고.
[들어가.]
짧은 말 한마디.
어둠은 점차 힘을 줄였다.
불의 기운에 의해 강제로 담금질되어있던 힘을 다루며, 룬은 가만히 읊조렸다.
[곧, 너희와 딱 맞는 녀석을 보내줄 테니 조금만 참고 있어.]
스스스슷!
까만 어둠이 룬의 앞 발과 인장 주변을 맴돌더니 점차 잠잠해졌다.
한결 밝아진 내부.
어둠의 힘을 품은 용광로가 위용 넘치게 자리하고 있었다.
룬은 용광로를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드래곤의 힘을 가지고, 불의 영역에서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군.’
룬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뀨뀨우.”
‘돌아갈까.’
룬은 슬슬 꼬리를 흔들며 뒤뚱뒤뚱 다시 원래의 자리로 걸어갔다.
“뀨우.”
[끝났어.]
“삐약!”
백야가 흑미 머리 위에서 날개를 두 세차례 파다닥거리며 다리를 쭉 폈다.
“삑!”
힘차게 울음소리를 낸 하얀새는 무척 의기양양해 보였다.
불의 기운을 뿜어 드워프들을 보호하고 있던 백야.
새가 방패처럼 앞에 선 채, 드워프들이 옹기종기 모인 꼴이었다.
드워프들은 다들 눈이 휘둥그레 떠져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라고 말하는 눈이었다.
“룬 니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흑미가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제야 드워프들도 정신을 차렸다.
“정말이지 훌륭하십니다!”
스콧이 박수를 치더니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종종 힘이 요동칠 때가 있었지만, 그동안은 마법석으로 막아오는 정도였는데.”
스콧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다니. 역시 어둠의 주인이시군요!”
찬사를 보낸 스콧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으려던 차.
룬이 선수를 쳤다.
“뀨우.”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매번 도울 수는 없지. 안 그래?]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스콧이 하려던 말을 얼버무렸다.
“그게…… 그, 그렇겠군요…… 하긴 수면기도 있으실 테고…….”
뻔했다.
칭찬으로 어린 해츨링을 한껏 부추긴 후, 어떻게든 공방이 위험할 때 대비할 수단을 부탁해 보려던 속셈일 터.
룬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 드워프들 속성 한 두 번 겪어보는 것도 아니니.’
룬의 시선이 남몰래 제드를 향했다.
돈귀신이 들린 제드만 봐도, 목적을 위해 은근슬쩍 선을 건드리곤 하지 않았던가.
‘참 투명한 녀석들이야.’
착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손바닥 위 보듯 빤했다.
그 성정이 주변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되기에 룬은 가볍게 짚고 가기로 했다.
룬은 어린 해츨링다운, 무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뀨.”
[역시 그렇게 생각해 줄 줄 알았어. 나는 어떤 이유든, 상대의 상황을 고려해서 말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맞지?]
“크허험! 그렇습죠. 아무렴.”
스콧의 눈빛에, 뒤에 있던 드워프들이 스위치 들어간 기계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눈치 빠른 제드가 어이없다는 듯 드워프들을 둘러보며 호통을 쳤다.
“아니, 설마 자네들. 룬 님을 이용하려 든건가?”
드워프보다도 작은 난쟁이 인형 제드 앞에서 다 큰 드워프 무리가 우물쭈물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물론 저희 힘으로 어려울 때 도와주십사 작은 부탁을 하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떼이잉, 쯔쯧.”
제드가 곤란한 놈들 본다는 눈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느릿느릿 흔들었다.
“멀었구만. 이 친구들! 어딜 감히! 그런 못된 생각으로! 룬 님을 대하려고 하는 겐가!”
룬은 제드의 과장된 몸짓과 말을 들으며 절로 흐린 눈이 되었다.
‘너도 똑같았다만.’
아주 말만 들으면 엄청난 충신 납신 줄 알 것 같았다.
콧수염을 기르고, 좀 더 체면을 차린다 뿐이지.
스콧의 속성을 제드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보다 못한 룬이 말을 던졌다.
“뀨우.”
[됐어. 제드, 너도 한때 저랬잖아.]
“아니 제가 언제요?”
시침 뚝 떼는 제드를 보고 있자니, 룬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야말로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꼴이었다.
룬은 변신용 황금팔찌를 꺼내며 말했다.
“뀨.”
[같이 시장 갔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암시장을 갔을 때, 무려 룬에게 협박 비슷한 걸 했던 제드.
눈에 띄게 찔린 기색을 한 제드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 그건 말이죠. 하하. 제가 젊었을 때라 작은 실수가 있었지요!”
주변 눈치를 보던 제드가 룬에게 슬쩍 다가가 속삭였다.
“룬니임! 그 일은 진짜진짜 죄송했던 일이라는 거 이젠 압니다. 제가 맘고생도 좀 했잖습니까? 여기서는 좀 봐주십쇼오.”
룬은 고민하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여만 보였다.
그리고 황금팔찌를 끼고 인간형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하긴,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 ! 물론입죠, 그렇고 말고요.”
얼른 주는 기회를 받아먹은 제드가 슬쩍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 녀석들에게 룬 님에 대한 예의만 조금 일러두겠습니다요. 요 녀석들이 저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간 머리가 굵어진 제드이니, 드래곤 족에게 함부로 굴었다간 드워프족이 망할 수도 있다는 걸 이젠 알 만도 했다.
‘드워프들끼리 통하는 것도 있겠지.’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휴! 감사합니다, 룬 님.”
제드가 대답하며 작은 난쟁이 발로 스콧의 발을 톡톡 쳤다.
소리는 없는 입모양이 ‘눈치 챙겨’라고 하는 게 훤히 보였지만.
즉시 스콧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룬 님.”
“““감사합니다!”””
뒤이은 드워프들이 함께 고개를 숙이자, 흑미가 눈을 깜빡이며 룬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룬 님 부하에요? 그럼 룬 님은 큰형님이구요?”
절로 미간이 좁혀진 룬이 흑미에게 물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해맑은 흑미의 대답은 뒤통수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제드 아저씨 도울 때, 인간 마을에서 들었어요!”
“…….”
제드쪽으로 지그시 시선을 던진 룬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나 좀 보자, 제드.”
“끄응.”
제드로서는 억울했겠지만,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저 큰형님 운운하는 말은 보통 위험한 조직에서나 할 소리였으니.
문득, 제드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오잉, 근데 룬 님은 어떻게 그걸 파악하신 거지?’
이 의아한 느낌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순간, 룬이 말했다.
“나중에 그레이스가 오면, 힘을 안정시킬 수 있을 거야. 보아하니 종종 저런 식으로 힘이 폭주했을 텐데.”
스콧이 반색을 했다.
“역시 한눈에 알아보셨군요. 불의 기운으로 눌러 쓰긴 하지만, 때때로 한 번씩 폭주하곤 해서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불의 기운으로 어둠을 제련하여 장비나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검은 공방 드워프들.
문제는, 어둠의 힘이 유난히 강해지는 때였다.
‘뜨거운 화기(火氣)를 다루는 데에 뛰어난 녀석들이지만, 암기(暗氣)를 불기운 다루듯이 해선 안됐는데.’
폭주의 이유.
그건, 블랙 드래곤의 힘이 담긴 물건을 잘못된 방법으로 운용한 탓이었다.
분명 여러 번 문제가 있었을텐데, 지금껏 잘 처신한 게 대단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어둠은 다루기가 본래 까다로운 힘이거든. 너희가 워낙 노련하고 손재주 좋은 치들이라 이만큼 잘 관리하며 써 온 거지.”
백 여년 전.
고작 10년 생 어둠 해츨링의 비늘.
거기에 담긴 힘은 드워프들이 어찌어찌 감당할 정도였고, 그를 잘 다루는 세심함과 솜씨가 필요했을 터.
룬은 모여있는 드워프들을 보며 입을 떼었다.
“그간 어둠의 힘을 조율하는 데 애 많이 먹었을 거야. 조만간에, 저 힘을 잘 다루는 녀석 하나 붙여줄게.”
면면들에 화색이 번져갔다.
문제를 단숨에 파악한 룬 덕분에, 드워프들의 고민이 즉시 해소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원시원한 숏컷의 여성 드워프가 말했다.
“그럼, 이제 ‘검은 공방’에서 안정적으로 작품을 만들어 갈 수 있겠군요!”
“잘됐어, 잘됐어!”
기뻐하는 드워프들이 서로 손을 마주치거나,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일이 끝났다 여긴 룬이 미련 없이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난 가볼게.”
드워프들은 아쉬운 눈치를 보였다.
“벌써 가십니까? 언제든 저희 힘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 말에 룬이 잠시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그때까지 실력을 닦아두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때가 오면, 꼭 저를 써 주십시오!”
“저도요!”
여기저기서 시원한 호응이 이어졌다.
룬은 살짝 웃어보였다.
“고맙다, 다들.”
저들의 도움은 예상보다 빠른 시일 내에 필요해질 터.
아공간 주머니를 연 룬은 마력석들을 내어주었다.
“추후, 만들어 줘야 할 물건이 있어. 이건 그때를 위한 거야.”
“오오오!”
모인 드워프들이 일제히 기함을 터트렸다.
“흑진주와 백진주라니?!”
“뭐라고!”
“나도 좀 보여줘!”
“나도, 나도 만지게 해줘!”
처음 보는 마력석에 드워프들에게서 광기가 엿보였다.
백진주 역시 그들이 본 적 없지만, 풍문으로나마 들어보긴 했다.
하지만, 흑진주는 본래 이 세상에 없는 물건.
어둠의 힘이 담긴 순수한 마력석에, 경악을 띤 드워프들의 눈이 홱홱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어쩌다보니 룬이 대충 아무 드워프 손에 올린 덕에, 짜부라질 기세로 다른 드워프들 사이에 낑긴 자가 눈동자를 떨며 물어왔다.
“이런 귀한 걸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룬 님, 제발 말씀 한 번만!”
“나 드래곤 족이잖아. 보물 모으는 건 특이한 일도 아닌데.”
대충 그렇게 말한 룬은 흑미와 백야를 챙겼다.
“돌아가자. 여기서 볼 일은 끝났으니까.”
“으아! 이런 건 대체 어떻게 해야 구하는 거지!”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드워프들이 펄쩍거리는 사이, 룬은 군침을 삼키는 제드와 흑미, 백야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