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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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 저 광기.”

룬이 고개를 저으며 피곤한 듯 말하자 제드가 말을 받았다.

“저 정도는 약과입죠. 아마 제 몸 속에도 저 진주들이 쓰였다는 걸 알면 전 해체될걸요?”

무시무시한 소리를 껄껄 웃으면서 정겹다는 듯 말하는 제드를 힐끔 본 룬.

‘누가 드워프 아니랄까 봐.’

정말이지, 예전 대장장이 물품 제작 때 느껴본 작품과 소재에 대한 광기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룬이 제드에게 말했다.

“제드, 넌 다시 개통파에 가 줘. 어둠의 힘을 다룰 줄 아는 네가 가서 지도해 주면, 실력이 훨씬 빨리 늘겠지.”

“옙! 룬 님은 어쩌시렵니까?”

룬은 머릿속으로 다음 계획을 떠올렸다.

문득, 룬은 한낮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여성 드워프들을 잘 아는 녀석과 조사를 해보기 좋은 때네.’

마음속으로 결정을 한 룬이 입을 열었다.

포기하신 줄 알았는데

“흑미 님과 조사 말입니까요?”

“응.”

룬은 흑미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제드를 제외하면, 흑미가 여성 드워프들을 가장 많이 만나봤으니까.’

여성 드워프들을 만난 이력만 치면 페르디키온보다 많았을 흑미.

룬은 꼬리를 살랑이는 흑미에게 말했다.

“배고프지 않으면 나랑 같이 가자.”

귀를 쫑긋 세운 흑미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배 안 고파요!”

흑미가 백야를 번쩍 들더니 빙글 돌며 한껏 기뻐했다.

“룬 님이랑 산책, 신난다아!”

“삐이약!”

제드가 껄껄 웃으며 분위기를 추어올렸다.

“제 고향이긴 하지만, 언제 와도 좋은 곳이긴 하죠! 산책도 재밌을 겁니다요!”

룬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좀 전, 개통파 드워프들이 흑미를 보며 슬쩍 눈짓하거나, 귀여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분위기 꽤 좋았지.’

흑미가 가볍게 손을 흔들거나 반가워하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다.

바꿔말해 그만큼 여성 드워프들과 안면을 많이 텄다는 소리기도 했다.

‘확실히, 제드를 따라다니며 드워프들이라면 죄다 만나봤다더니.’

5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흑미를 기억하고 반가워 하는 여성 드워프가 있을 만큼.

룬은 막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드 너 흑미랑 여성 드워프들 만나면서 다녔다 했잖아.”

“그렇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요?”

이제 와서 다시 묻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룬이 말했다.

“특별히 신경 쓰였거나, 인사를 나눠야 할 이가 있어?”

잠깐 머리를 긁적인 제드가 고개를 저었다.

“다들 사정은 있지만…… 지금은 꼭 찾아가야 할 분은 없습니다요.”

“그래?”

그렇게 말하는 제드는 어딘가 입맛이 써보였다.

‘나나 흑미가 어리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지도 모르겠군.’

룬은 예전에 페르디키온이 스치듯 언급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불건전한 느낌이 든다던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 같진 않았다.

‘페르디키온은 뭔가 찜찜해하는 눈치였어. 감이 좋은 녀석이니 뭔가 이상한 걸 느끼긴 했을 텐데.’

생각을 정리한 룬이 말을 맺었다.

“저녁 식사 즈음 성에 들어갈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옙! 모코지석으로 바로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요!”

“제드 아저씨, 힘내요!”

흑미의 배웅을 받은 제드가 멀어진 걸 확인하고, 룬은 흑미를 돌아보았다.

“흑미. 전에 제드랑 다녔던 집들, 혹시 기억해?”

“네에!”

“잘됐다. 기억나는 대로 가줄래?”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 하고는 앞장서는 흑미.

활기차게 나아가는 흑미와 함께, 룬은 걸음을 옮겼다.

***

룬은 자꾸만 구겨지려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제드 자식, 좋긴 뭐가 좋아.”

결국, 룬은 미간을 구기고 한숨을 쉬었다.

“죄다 술집이잖아.”

흑미를 따라 몇 군데 들러본 룬.

평범한 곳들도 많았지만, 주점들이 특히 많았다.

문제는 거기에서 들은 제드에 대한 증언은 영 믿음직 스럽지 못했다는 점이다.

-깔깔깔. 우리랑 술 마시다 먼저 뻗은 제드 말이에요?

-헤벌쭉하니 얼굴이 꽃 펴서! 신나서 금화를 뿌리더라구요.

차마 말도 다 할수 없는 추태를 들은 룬은 흑미와 다니는 걸 재고해야하나 고민해야 했다.

물론, 드워프들에게 있어 술은 하루 일과의 끝을 마무리하는 당연한 식문화.

그런 이들에게 주점은 일상적으로 들르는 장소이긴 하다.

실제로, 평범한 곳도 있긴 했고.

하지만 어린 흑미를 데리고 들렀다기에는 다소 민망한…… 장소도 분명 있었다.

‘잘도 이딴 곳을 흑미랑 다녔겠다.’

그렇게 도착한, 마지막 술집.

흑미와 룬을 위해 안주 과자와 우유를 따로 챙겨준 자리에 않아, 룬은 주변을 슥 돌아보았다.

낮이라 한산하고 가볍게 정리하는 중이라 그렇지, 벌써 술 냄새와 뭔지 모를 쩐내가 찐하게 났다.

우유컵을 들이켠 흑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룬을 바라보았다.

“룬 님, 화 난 거예요?”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룬의 시선이 반대편 테이블을 향했다.

거기 있는 여성 드워프가 입술에 찐한 루즈를 바르고 홍홍 거리며, 남성 드워프들과 음담패설을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떨어져 있으니 안들릴거라 여긴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룬과 흑미 모두 드워프들보다 청력이 좋았다.

흑미가 의문 어린 눈으로 룬을 보더니, 뭔가 떠올린 얼굴로 입을 움직였다.

“우웅. 그럼 제드 아저씨한테 화 난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는 여기 들를 때 좋은 일을 했다고 그랬는데.”

“좋은 일이 뭔데.”

룬이 의아하게 묻자, 흑미가 고개를 크게 한 차례 끄덕였다.

“여기서 일하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라구, 꼭 데려가고 싶은 드워프 언니라고 했었어요!”

드워프 언니?

룬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 흑미가 어, 하더니 말을 이었다.

“흑미 옷을 지어준 언니인데, 손놀림이 엄청 좋대요. 못 보긴 했지만요.”

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흑미의 옷들도 여성 드워프들 작품이었지. 꽤 실력자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그 주인이 여기 있나?’

기회를 보던 룬이 마침 술을 가지러 가는 마담 드워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으응? 아휴. 무슨 일이신지요, 어린 후계자님?”

오글거리는 칭호기는 했지만, 룬은 태연히 용건을 입에 올렸다.

“누굴 좀 만나러 왔거든. 아.”

룬은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을 꺼내 마담 드워프에게 내밀었다.

“이거.”

진한 눈썹을 치켜올린 마담 드워프.

눈이 가늘어지더니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는 주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손을 뻗어 보석을 가져갔다.

“드워프족의 은혜를 베푸신 분이 이렇게까지 하실 일이라니. 뭘까요?”

“제드가 찾던 드워프를 만나고 싶은데.”

그 말에 마담 드워프가 콧숨을 내쉬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드워프가 아직 포기 못했어요?”

눈매가 묘하게 표독스러워진 마담 드워프가 팔짱을 꼈다.

“귀한 인력 빼가려고 껄떡대던데, 설마 은인이신 분도 그러려는 거예요?”

얼굴까지 쑥 들이밀며 적대적으로 변한 마담 드워프에게 룬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설마. 궁금했을 뿐이야. 흑미의 옷을 만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도 할 겸.”

순해 보이는 얼굴의 어린 소년은 마담 드워프의 억척스러운 기세에도 제법 부드럽게 대답해왔다.

“감사가 부족하진 않을거야. 좀 전에 내 준 보석은 그 일부니까.”

마담 드워프에게 그 모습은 무척 새롭게 보았다.

‘무서운 드래곤 족 후계자라더니, 어쩜 이리 페르디키온 님과 다르지?’

무해하면서도, 순수한 흑발.

소문으로만 듣던, 인간계의 왕자나 귀족들 같았다.

마담 드워프는 주머니 속에 넣은 보석을 생각했다.

‘옷값을 고것에게 내어준다면 내 손에 들어올테고.’

부탁을 들어주면 하나쯤 더 내어주지 않을까.

그야말로 쉽게 큰 이익을 볼 기회였다.

‘어차피 고년은 여길 못 벗어날 테니, 상관없겠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마담 드워프가 팔을 크게 흔들었다.

“감사를 하러 오셨다는데 너무 막기도 그렇고, 할 수 없네요. 원래는 안되지만, 뭐.”

배짱을 슬쩍 튕긴 마담 드워프가 맥주를 따라가야 할 빈 나무 술잔을 텅! 소리 나게 카운터에 내려쳤다.

“맥주, 직접 가져가셔들!”

“뭐? 아니 이 여편네가, 여기 오는 드워프가 몇이나 된다고 홀대를 해?”

다른 드워프들도 무어라 소리쳐댔지만, 마담 드워프는 그 말에 호통을 터트렸다.

“외상값 받아주는 집이 여기 말고 있으면, 나가든가!”

그 말에 얼굴을 붉힌 드워프들이 이내 조용해졌다.

룬은 흑미 눈을 가려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담 드워프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저런 나부랭이들 신경 쓰지 말고,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걸걸한 술주정뱅이 같은 걸음으로 향한 곳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었다.

‘출입금지?’

드워프들의 문자를 확인한 룬이 흑미와 함께 기다리자, 마담 드워프가 가판대를 옆으로 들어 치웠다.

“허업!”

마담 드워프의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드드드득!

쿠웅!

아주 무거워 보였지만, 역기를 들어내듯 힘을 주어 옆으로 치워내니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나는 2층이 보였다.

룬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거닌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는 길이군.’

하루에 한 번, 아니.

이삼일에 한 번이나 거닌 듯한 복도.

사람이 산다면 식사라도 하기 위해 더 많은 발자취가 있어야하는데, 의아한 부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출입 금지 가판대 밑에도 희미하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쿵쿵쿵!

마담 드워프가 벽을 두드리고는 문을 열었다.

룬은 어둑한 방 안을 보며 생각했다.

‘기척이 있긴 했는데. 묘한걸.’

누군가 있다면 응당 불이 켜져 있어야 했다.

햇살이 환히 들어오는 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환기용으로 쓰는 작은 창 하나뿐인 방인데, 너무 어두웠으니까.

“누구?”

부스스하게 재봉틀 앞에서 일어나는 비쩍 마른 드워프.

마담 드워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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